제목: 아름다운 마무리
본문: 창세기 50장 
설교자: 이병권

 

오늘 본문은 야곱의 죽음 후에 요셉에게 있었던 일과 요셉의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죽음을 맞이하자 요셉은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는데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릅니다. 요셉이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과 그 규모입니다. 시신이 썩지 않도록 40일에 걸쳐서 향으로 처리를 하고 슬퍼하며 곡을 하는데, 애굽 사람들이 곡을 하는 기간이 무려 70일입니다. 바로가 죽었을 때 애곡하는 기간이 72일인 것과 비교하면 요셉의 아버지는 바로의 애도 기간보다 불과 2일이 적은 기간입니다.

장례 기간뿐만 아니라 요셉이 바로의 허락을 받아 가나안으로 떠나는데 규모를 보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7~9)

장례의 기간이나 규모를 통해 애굽에서 요셉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성대하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매장지에 아버지를 장사합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요셉, 열일곱 살에 떠나 대략 39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 겁니다.

야곱의 장례를 보면서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슬픔입니다. 애굽에서 70일의 애도의 기간이 지나고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와서 다시 7일 동안 슬퍼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면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요셉은 자신의 체면이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슬픔을 표한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슬픔에 빠져 울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요셉을 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요셉의 형들은 별로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슬퍼하는 요셉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요셉의 형들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요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요셉의 형들은 슬픔보다 다른 것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15)

그들이 행한 악을 요셉이 되갚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빠진 형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소서”(19, 21)하고 말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했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동생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열일곱 살이었던 요셉이 당한 충격과 괴로움은 당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이야기는 어떤 걸까요?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이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해서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통쾌하게 갚아주는 것, 그런 걸 기대합니다.

이제 요셉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요셉과 형들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고 요셉의 말 한 마디면 형들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자신을 외면했던 형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돌려 줄 수 있습니다. 곁에서 요셉을 말릴 수 있는 아버지는 안계십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한 말입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17) 형들은 아버지가 남긴 말씀을 전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어렵게 만듭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형들에게는 죄책감이 남아있었고 불안했던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또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라도 치르고 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까 불안하고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할 거 같으니까 상대방도 이렇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요셉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지금이 기회인데 분명 복수할거야! 당한 만큼 돌려줄 거야!‘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 아닙니까?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 그 사람도 아팠으면 좋겠고,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더 힘들었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래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마음에 불만과 원망이 생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본성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떻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다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셉처럼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요셉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하나님을 대신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상황을 아시고 나의 어려움을 아시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을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죄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셉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미워해서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자유를 빼앗긴 나의 상황, 거짓말로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여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나의 상황, 상황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상황들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니 그런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상황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문제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어려움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수하고픈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속삭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 내가 뭐라고 반대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 일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감사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괴로웠지만,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그 일에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황은 어떠십니까? 어떤 상황이 여러분을 속이려고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 말 못할 아픔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고, 앞뒤에 꽉 막힌 상황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고, 남들과 비교되는 나의 처지 때문에 낙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 뜻대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그림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복수하는 것,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갚아 주는 것, 요셉은 이런 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그의 마지막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자손들에게 유언의 말을 전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4~25)

요셉의 유언은 두 가지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땅에 이를 때에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약속에 대한 요셉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요셉의 유언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표현입니다. 요셉은 특별히 강조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방문한다’,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실 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오셔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것이니 하나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 명하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은 요셉의 삶을 우리는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셉의 삶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어려움을 이기고 총리가 되어 성공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삶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이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가꾼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의 삶이 하나님이 빚으신 작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KBS 다큐에 방영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채팅방에도 공유된 적이 있는데 교회오빠라는 제목의 다큐입니다.

젊은 한 부부가 나오는데 남편이 어느 날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며 투병 생활을 하는데, 다음해에는 아내가 산후 조리를 마치고 나와서 검사를 받았는데 림프종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남편의 항암치료가 끝나자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아내의 항암치료가 시작됩니다.

남편은 그 과정 속에서 이런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이러다 저희 가정 다 죽겠습니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로가 그 아픔을 알기에 배우자가 투병 중에 있을 때 어떤 마음인지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고 치료는 종료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14개월 만에 남편의 암은 재발되었고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복막에서부터 여러 장기에까지 전이된 것입니다. 의사의 표현으로 모래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는 겁니다.

제가 이 영상을 보는데, 그냥 눈물이 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할 텐데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암에서 나아서 건강해져야 될 텐데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제 마음을 울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내가 이 질병에서 완치되어야지 기적이라고 생각할거야 그런 기적들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우리가 질병을 만나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지 우리는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서 깨달았잖아. 그래서 암 자체는 축복은 아니지만, 암을 통해 우리가 얻은 유익인거 같아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보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되냐고 물어봤을 때는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서 제가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지는 기회를 얻고 싶은 거예요

하루하루 눈뜨고 호흡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우리 부부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명, 그렇게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죽는 죽음이라면 삶에 대한 후회가 없을 것 같고

그의 아내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부르심을 받는다 해도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걸 우리는 알잖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우리에게 펼쳐질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다리며 삽니다. 약속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조금 더 성숙하는 기회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기회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