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십자가의 의미
본문 : 갈라디아서 2:20-21
설교자 : 이병권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오늘은 예수님의 죽으심, 특별히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분부하신대로, 떡과 잔을 앞에 두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매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매주 이렇게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 그 십자가를 기념하는데 그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삶에서 십자가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기서 ‘못 박혔다’라는 말은 현재완료라는 시제인데,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사건은 과거에 있었지만 그 효과가 지금도 계속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 때문에 지금 나는 죽었습니다. 난 이제 끝난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러분은 이런 말 하신 적 없으십니까? “요즘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내가 살긴 살지만, 정말 내가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바울의 말이 그와 비슷합니다. 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겁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내 인생으로 살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더 이상 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신앙적인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으니까, 그래서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이제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바울이 여기서 “나를 사랑하사”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과거의 한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자로서 하는 가장 기본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것처럼 ‘2000년 전에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 이런 게 아니라, 나랑 상관없는 그런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바울은 지금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히 “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를 위하여’, 이렇게 공동체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으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자신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이 말은 그냥 쉽게 편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고백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고백은, 이게 아무런 느낌 없이 그냥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말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냥 맹숭맹숭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TV다큐이야기인데, 월남전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을 인터뷰한 내용인데, 자신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수행했다는 겁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일을 회상하며 설명하는데 나중에는 말을 못합니다. 설명을 좀 하다가 그 다음에 계속 말이 막히고, 감정을 다시 추스르며 반복해서 하는 말이 “왜”라는 말입니다. “왜”, “왜 그랬을까?” 자기를 구출하기 위해서, “왜”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죽을 거를 뻔히 알면서 왜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참느라 한참을 애씁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겁니다.

누군가가 정말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았다는 이야기는 이게 그냥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그랬다더라, 식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 이와 가장 비슷한 것이 있다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는 어버이날에 ‘어머님의 은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생님이 집에 가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숙제로 내주기도 했습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어릴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하며 잘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노래를 부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잘 안 불러집니다. 물론, 그런 숙제를 내주는 분이 없어서 부를 기회가 없는 것도 이유이지만,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울컥해서 자꾸 멈추게 됩니다. 철이 들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좀 더 공감하게 되니까,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어떻게 사셨는지 좀 더 알게 되니까, 그렇겠죠.

사랑이야기는 아무 느낌 없이 그냥 그랬구나! 하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을 더 절실히 느낄수록 좀 더 감정적이게 됩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야기, 그래서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고, 자기 인생을 바친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무너뜨립니다. 그 이야기만큼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가 ‘구원 받았다’ 혹은 ‘예수님을 믿는다’. ‘복음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를 사랑하사”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가 무릎을 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3장16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구원의 이야기! 그 출발점이 사랑입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다 내어줍니다. 자기 자신까지도.

우리가 복음을 말할 때, 내가 믿는다고 말할 때, 기억해야 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셔서, 그래서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십자가, 그 사랑에 있는 겁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생명이 없는 그냥 죽은 언어가 되는 겁니다. 그냥 잠깐 허공을 울리다가 사라지는 소리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랑을 깨달았을 때는 다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전하고는 다른 삶, 예전하고 삶의 방향이 같을 수 없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6장에서는 세상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자랑할게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랑한다는 것은 드러내며 으쓱거린다는 의미를 넘어서 삶의 바탕으로 삼는다.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 의미를 갖습니다.

누군가가 바울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바울이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당신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까?” 아마 바울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내 인생의 목표는 십자가 말고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확실한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인트가 그겁니다. 관계가 끝났다는 겁니다. 근데 한쪽만 끝나서 다른 한쪽은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죽어버렸고 나도 죽어버렸고, 세상과 나는 이중적으로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전에 살아가던 삶의 방식하고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근본적인 변화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렸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없애버려야 하는 하나님의 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예수님의 그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고, 이제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정말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교회를 없애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뭐가 진짜 인생인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정말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왔던 것이 사실 껍데기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말 쓸데없는 것을 위해 살았구나! 하고 느낌이 확 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죽음 앞에서 느낍니다. 죽음에 직면하면 그제야 알게 됩니다. 쓸데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에 직면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보게 됩니다. 뭐가 중요한지, 뭐가 중요한 게 아닌지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호스피스 병동에 가면 보다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은 죽을 때가 임박한 분들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좀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인생의 마감을 기다리며, 죽음을 예감하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분들이 모여서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자랑할까요? 죽어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집안, 학벌, 재산을 자랑할까요? 죽음을 앞에 두고 인생을 바라보면, 인생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내 자존심, 내 자랑,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쓸데없는 거구나!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갈 때는, 그게 중요하니까, 그게 힘을 발휘하니까, 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바울은 “세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어떻게 됩니까? 내가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히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 못 박히고, 이제 서로 끝났습니다.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봅니다.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나의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은 그 새로운 삶의 열정이 됩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살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멍청해보였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게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지는 겁니다. 예전에는 말도 안 된다 생각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게 아닌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에게 선명한 삶의 목표가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이 나쁜 건지, 무엇이 좋은 건지 알게 되고 우리의 삶이 바뀌어 가는 겁니다. 이전에는 육체의 일들을 하면서 나쁜 열매를 맺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 없이 만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나의 노력이나 행위에 달려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쓸모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주어진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구할 수 없음을 안다면, 십자가는 나의 모든 것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통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분은 나의 전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분을 섬기는 일에 수고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어 마땅한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바꿉니다. 하나님을 대항해서, 내 논리, 내 욕심을 앞세우고, 내 생각을 주장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십자가를 통한 그 사랑을 깨달으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그냥 엎드리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랑 앞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제 제가 어떻게 할까요? 저는 당신 것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세요.” 이것이 우리가 은혜를 깨달을 때 갖게 되는 반응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헷갈리기도 하고, 순종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제가 다닌 학교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학교의 규모는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규모에 비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습니다. 장학금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성적 장학금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과 관계없이 주는 장학금입니다. 그래서 은혜 장학금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생들은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아서 어렵게 학교를 다닙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은 큰 격려와 힘이 됩니다. 제가 받은 장학금 중에 가장 저의 마음을 울렸던 것은 제가 학교를 쉬고 있을 때 받은 장학금입니다. 학교를 다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한 학기를 쉬었는데, 학교에서 장학금이 나온 겁니다. 이번 학기를 등록한 것도 아니고, 지금 휴학하고 있는데, 특별히 학교를 위해서 한 것도 없는데, 장학금을 받은 겁니다. 교수님들이 특별히 저를 생각해서 은혜를 주신 겁니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어떤 장학금보다 저의 마음에 큰 감사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은혜를 받으면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새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은혜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는 능력이 됩니다. 예전 같으면 안 할 일을 은혜를 경험하면 합니다. 은혜를 맛보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고, 그분을 위해 살도록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예전에 없던 삶의 에너지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억하고,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금 마음에 되새길 때,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도전하게 되고, 다시 수고하게 되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니 다시금 그 십자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것은 이 십자가의 은혜를 맛본 자로서,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겁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함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