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신앙, 삶으로 드러나다

본문 : 룻기 2장 8-16절

설교자 : 이병권

룻 2:8-16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저는 오늘 “신앙, 삶으로 드러나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의 말씀을 잠깐 복습하겠습니다. 룻기 1장에서는 과부가 된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2장에 와서 왠지 모르게 든든한 남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보아스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절에서 “엘리멜렉의 친족 유력한 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력한 자’라는 것은 단순히 돈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도덕적인 힘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유력한 자, 보아스에게 초점을 맞춰서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 그에 대한 교훈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과 이어지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서 밭에 나왔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열심히 이삭을 줍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보아스가 밭에 와서 룻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 두 사람의 드라마 같은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8-9). 보아스는 룻을 향해 “내 딸아”라고 부르며 그녀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내 딸아”라는 말은 나이 많은 어른이 젊은 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부를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밭주인이나 일꾼들에게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귀찮은 존재일 것입니다. 사실 환영하고 싶은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불렀고,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를 격려합니다. 그녀를 배려할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보아스가 어떤 은혜를 베풀었을까요? 8절과 9절에 나오는 보아스의 말을 통해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느 날 여러분 집에 갑자기 가난한 사람이 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다른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으로만 오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밥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밭에서만 주워도 충분한 양식을 얻도록 할 테니, 다른 밭으로 가지 말 것을, 자신의 밭에서 떠나지 말 것을 말합니다. 보아스는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밭을 가지고 있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보아스는 룻에게 그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합니다. 룻이 낯선 곳에서 혼자 이삭을 줍다 보면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의 여자 일꾼들과 함께 있으면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함께 있으라”고 말한 이 단어는 룻이 시어머니와 절대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룻은 여자 일꾼들과 함께함으로써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일하는 외로움도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룻을 건들지 못하도록 명령했음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건드린다는 말은 ‘추근거리다, 괴롭히다’라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보호하고 지켜주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힘이 없고 가난한 이방 여자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런 룻을 생각함으로 보아스는 미리 자신의 사람들을 단속시킨 것입니다. 보아스의 보살핌이 얼마나 자상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넷째, 보아스는 룻에게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당연히 갈증이 나서 물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이 귀한 곳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배려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은혜로 이 밭, 저 밭을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일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밭을 찾아다니며, 주인의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이런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룻기를 읽어가면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실제로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은 룻은 어떻게 했을까요?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10). 이러한 보아스의 친절에 대해서 룻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룻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방 여인인데, 이런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에이, 저 사람 재산이 좀 되는 거 같은데.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네’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룻은 엎드리며 보아스가 베푼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런 룻에게 보아스가 다시 말합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1-12). 보아스는 룻이 남편이 죽은 후에 시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리고 홀로된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이스라엘까지 온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며 위로합니다. 그녀가 시어머니를 보필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온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사실 보아스는 룻을 처음 만났지만, 이미 룻의 소식은 베들레헴 동네에 두루 알려졌기 때문에 룻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룻이 늙은 시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베들레헴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보아스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격려하고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금, 그녀가 자기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 기회에 그녀를 격려하고 베들레헴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기로 한 것입니다. 룻이 밭에 나오기 전에 시어머니에게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이라고 소망했던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우연’을 사용하여 하신 일입니다.

보아스는 더 나아가 룻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하나님께서 룻이 행한 일에 따라 그녀에게 보상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축복하면서 모압 사람인 그녀가 모압의 신 그모스가 아니라 전능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있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줍니다. 여기 “날개”란 말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룻은 힘없고 연약한 ‘아기 새’와 같지만,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어미 새’가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왔고, 이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를 덮어줄 것입니다.

룻은 이러한 보아스의 축복과 격려에 매우 감격합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13). 룻은 겸손한 태도로 다시 보아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감사하는데, 하나는 보아스가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는 점에 감사합니다.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스라엘을 찾은 룻에게 보아스가 베푼 은혜는 참으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아스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에 감사합니다. 보아스는 그녀의 형편을 잘 헤아리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말로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룻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가운데 있습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정착해야 하는 룻에게 보아스가 베푼 은혜와 배려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축복된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14). 이미 룻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었던 보아스가 또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샀는데 특별 할인혜택을 해줍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덤으로 사은품을 주고 보너스로 상품권까지 주는 겁니다. 은혜 위에, 또 은혜를 얹어주는 것입니다. 관대한 보아스가 또 어떤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까? 그녀를 초청해서 음식을 주고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던 룻은 무지하게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마도 룻은 집에서 먹을 것을 챙겨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이제 이삭줍기를 시작한 룻입니다. 혹시 챙겨왔다 하더라도 그녀가 무엇을 얼마나 준비했겠습니까? 이런 룻에게 보아스는 일꾼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이리 와서 떡을 먹으라고 권하며, 그냥 떡만이 아니라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합니다. 보아스는 정말 센스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주는데,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넉넉히 줍니다. 볶은 곡식을 그냥 푸욱 퍼준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 덕분에 정말 배부르게 음식을 먹습니다. 배부르게 음식을 먹는 일, 룻이 이와 같은 일을 얼마 만에 경험했을까요? 또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보아스는 이 일을 일꾼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가 가장 낮은 이방인 과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보아스가 자신의 일꾼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부터 그의 인격이 어떠한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처럼 탁월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룻이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삭을 주우러 갈 때, 보아스는 자신의 남자 일꾼들에게 당부합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15-16). 보아스는 룻이 땅에 떨어진 이삭뿐만 아니라 곡식 단 사이에서도 주울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당시 밭주인들이 일반적으로 했던 일과는 반대되는 일입니다. 밭주인들은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단 사이에 다니는 것을 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서 주인 몰래 곡식 단에서 이삭을 뽑을까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보통 세워둔 곡식 단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일부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버리라고 합니다. 이 같은 호의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손해를 보면서까지 룻을 배려하며 돕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모든 일을 일꾼들에게 당부하며 거듭해서 말합니다. “책망하지 말라, 꾸짖지 말라” 보아스는 진심으로 룻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천한 처지에 있는 가련한 이방 여인 룻을 너그럽게 대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거나, 여자들이거나, 이방인들이다 보니 추수하는 일꾼들도 이들을 무시하고 책망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아줌마 같으면 좀 책망을 받더라도, ‘에이 다같이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너무 그러지 말자고’ 가볍게 받아 넘기겠지만, 의지할 곳 없는 이방 여인 룻은 다를 것입니다. 보아스의 자상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보아스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이타적인, 품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보아스는 율법의 규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사람 됨됨이가 자연스럽게 그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 보아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떠한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실천하는 헤세드, 그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렇게 룻이 하루 동안 주운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략 20kg 정도 되는 양입니다. 룻은 정말 풍성한 은혜를, 넉넉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룻의 마음은 보아스로 인해 부요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가운데 룻이 나오미에게 행한 헤세드를 기억하시고, 보아스를 통해 다시 룻에게 헤세드로 갚아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 만남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리고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또 어떻게 전개되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그럼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보아스가 자신에게 고용된 일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모압 여인 룻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하는지, 보아스가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유력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유력한 자가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는 겁니다. 보아스는 부자였고,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나이가 많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남자였습니다. 반면에 룻은 가난했고, 모압 사람이었고, 여자였으며,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위치에 있는 룻에게 먼저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관대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어려움 없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격려하며 위로하며 축복했습니다. 풍성한 음식을 베풀었고, 일부러 이삭을 뽑아 버리기까지 하도록 합니다. 그녀에게 넘치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한 가련한 여인에게 삶의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말과 행동은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의 성품은 보아스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한 번만 하고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평소에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평상시에 늘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런 삶을 살기 때문에 유력한 자로 묘사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자신을 잠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보아스와 같은 유력한 자입니까?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의 삶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다른 기준과 다른 태도와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 중심, 주일 중심의 신앙으로, 교회와 주일의 벽을 넘지 못하고 갇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교회를 넘어서 삶의 현장에까지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잔인하고 살벌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신앙으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으로 살기를 명하십니다. 세상의 상식이나 관습이나, 세상의 문화가 아니라 말씀의 원리를 따라 살기를 명령하십니다. 단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불렀지, 교회의 빛과 소금으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배당 안에서는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배당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니 가정과 학교와 회사와 사회에서 믿는 자로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을 지킵시다. 말씀의 원리를 존중하고 그 원리에 따라 삽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삶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각자가 속해있는 어딘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그분의 성품을 드러낸다면, 세상은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할 때 우리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힘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런 교회가 된다면, 우리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되고, 신뢰를 얻으며,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입니다. 유력한 자가 될 것입니다. 외적인 겉치레와 예배당의 중심의 신앙을 극복하고, 말뿐인 위선과 정답만 말하는 가식들을 내어버리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믿음과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으로 어디 있든지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 모두가 그런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