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온에서의 예배
본문: 시편 48편
설교자: 최종혁

 

시온의 노래 – 46, 76, 84, 87, 122편과 함께 “시온의 노래”로 분류되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로서 예루살렘이 시의 주제가 된다. 특별히 48편은 이런 주제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시편은 마치 예배자들이 예배소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배 인도자가 회중을 인도하는 모습과 같다. 예배 장소인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며 하나님과 그 처소를 소개한다(1-2절). 그리고 그 처소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언급한다(3-8절). 그리고 그것을 지금의 예배자에게 적용한다(9-14절). 시온에서의 예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함께 살펴보자.

 

I.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신 곳(1-2절)

이 시편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선포하며 시작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극진히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이런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분이 하시는 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우리는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하셔서 위대해지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위대하신 분이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름답다”는 표현이 그분께 잘 어울린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하지 않아도 어떤 특별한 유익을 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기뻐하기도 하고 만족하기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탁월하심, 놀라우심, 우리와는 다르신 그 모든 본질적 속성들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로 인해 놀라고 또한 기뻐하게 될 것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우리에게로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어느 곳에나 계시는 편재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특정한 공간에 자신의 임재를 두시고 스스로를 우리에게 나타내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처음 에덴 동산이 그러했고 광야의 성막 후에는 성전이 그러했다.

여기 시편에서도 하나님께서 극진히 찬양을 받으셔야할 공간을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그 특별한 임재를 두시고 백성들에게 예배를 받으시는 곳, 바로 시온 산이 있는 예루살렘 성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곳이 “터가 높고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예루살렘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올라간다’는 표현과 함께 사용된다. 동서남북 어디서 접근해도 예루살렘은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시온 산이 있는데 이 산은 그렇게 높다고 말할 수 있는 산은 아니다. 높고 크고 웅장한 산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산은 특별하다. 처음 다윗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 시온은 예루살렘, 유대 땅, 더 나아가 이스라엘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이름이 되었다.

시온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다.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라는 표현은 조금 어색하다. 우리가 알기로 시온 산은 남쪽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마 시온의 북쪽에 성전이 자리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거나 혹은 ‘북방’을 고유 명사인 차폰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차폰은 가나안인들이 신들의 거주지로 여겼던 산이다. 이 경우라면 시온 산을 참되고 유일한 신의 거주지로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해하든 중요한 것은 시온 산이 왕이신 하나님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온은 거룩한 산이다. 시온을 바라볼 때 높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곳에 높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높고 아름다운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거룩한 곳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의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왕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분이 계신 곳도 그러하고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분이 계신 곳도 그러하다. 그분이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계신 곳이 곧 보좌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께 온 세계가 기쁨으로 화답해야 한다. 온 세계가 이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극진히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화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땅한 찬양을 돌려드리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는다. 시편 2편에서 말했던 것처럼 오히려 열방은 분노하고 대적한다. 계략을 세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항하여 싸우려 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II.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3-8절)

하나님은 자신을 요새로서 알리셨다(3절). 예루살렘은 높은 곳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어서 안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새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안전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요새가 되어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심으로 자신을 세상 가운데 알리신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구체적이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많은 위대한 일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5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6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 7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4-6절)

묘사하는 상황은 여러 왕들이 모여서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보았을 때 그들은 놀랐고 두려워 도망했다. 시인은 이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묘사하여 아주 당연하게 이런 일들이 발생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두려움이다.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하듯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난 왕들도 그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하신 일이다. 다시스의 배는 당시의 무역선과 같이 큰 배를 의미한다. 그런 거대한 배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묘사와 가장 유사한 것은 암몬과 모압, 그리고 세일 산 사람들이 여호사밧 시대에 침략해왔던 사건일 것이다. 그때 여호사밧은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한다. 이에 하나님은 “이 전쟁은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대하 20:17)고 응답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다음날 유다 백성들은 함께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하며 행진했고 그 때 하나님은 유다를 치러 온 적군을 치셔서 멸하셨다. 유다 백성들은 풍성한 전리품을 취하고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예배한다. 그리고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대하 20:29)고 역대기의 저자는 기록했다.

비슷한 사건은 히스기야 시대에도 있었다. 아마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요새가 되셔서 그들을 보호하셨던 역사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단순히 과거의 일은 아니었다. 이 시편을 기록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이렇게도 고백할 수 있었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8절)

이 모든 과거의 일들을 후손들은 들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르고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하나님의 성에서 그들의 부모와 조상들이 본 것과 같은 것을 본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 조상들의 경험과 자신들의 경험에 기초하여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이곳 예루살렘의 견고한 요새로 항상 함께 하실 것을 확신 가운데 기대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두 무리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두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이고 따라서 그들은 두려워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구원이고 따라서 그들은 즐거워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두려움은 마땅히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가나안 정복 시대때 라합이나 기브온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즐거움은 무엇으로 그들을 이끌까? 하나님의 처소에 나아간 그들은 즐거움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답은 예배다. 시편 48편의 나머지는 예배자가 어떻게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화답하는 지를 네 가지로 말한다. – 생각하라. 기뻐하라. 전달하라. 기대하라.

 

III. 예배자의 기쁨의 화답(9-14절)

A. 생각하라(9-10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10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9-10절)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언가 마음 속에 이미지를 그려본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실제로 이 단어는 의미를 예배 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가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까지 의미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며 그 모습을 그려본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떠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여기 예배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주의 인자하심”으로 표현한다. 주의 오른손,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의를 행하셨고 그것이 충만하여 땅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 미치게 하신 일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초한 일이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 그 백성을 구원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여 마음 속에 그려보는 것, 그것이 예배의 시작이다.

지금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예배할 때 우리를 구원하고 보호하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 대하여 정말 다양한 측면을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드러내주신 구원의 모습을 묵상하고 마음 속에 그려보며 그 안에 있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생각할 때 우리가 매주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참 의미가 있다. 떡과 잔이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그분께서 베푸신 구원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예배에 참여하지 말고 생각하고 참여해야 한다.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형제들 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합당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B. 기뻐하라(11절)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11절)

두번째는 기뻐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 백성들에게는 구원이며 따라서 기뻐할 이유가 된다. 시온 산, 유다의 딸들은 모두 그 주민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의 예배에는 기쁨이 있다. 가슴 벅찬 감동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무언가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로 나의 것이 아니라면 기쁨이 있을 수가 없다. 단한번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이 나에게 실제적인 기쁨을 주지 못했다면 정말 내가 그런 구원을 경험한 자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혹, 하나님의 구원이 나에게 너무 익숙한 얘기가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우린 이미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모른다. 구원이 그런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기도하며 말씀과 교제를 통해 구원에 대해 더 묵상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구원을 단순히 과거와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뿐 아니라 오늘 나의 삶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과의 싸움,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 싸움은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다. 승리의 기쁨이 있는 싸움이다. 만약 그런 기쁨이 없다면, 지금 싸우고 있지 않거나 혹은 승리할 수 없는 싸움만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의 기쁨, 구원의 기쁨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우리는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C. 전달하라(12-13절)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13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12-13절)

다음으로 시편의 예배 인도자는 예배자들에게 시온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을 권한다. 성 자체가 얼마나 잘 방어가 되어있는지를 보라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이 요새시다. 구원을 베푸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소를 자세히 살피며 후대에 그 하나님을 전할 것을 명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의 책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그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으로 예배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특별히 이 일이 시온, 즉 하나님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며 하는 일이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삶에서도 그런 일을 했고 유월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면서도 이런 일을 했을 것이지만 또한 이렇게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후대에게 전하는 일을 해야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할 일이다. 앞서 예배자들은 “우리가 들은대로 보았다”(8절)라고 고백했었다. 그들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믿음의 선조들이 최소한 이런 책임을 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으로, 실제적인 가르침으로, 예배하는 모습을 통해 구원의 하나님을 후손들에게 전달했다.

먼저 믿은 우리의 책임도 동일하다.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지금 나이에 관계 없이 우리에게 이런 책임이 있다.

 

D. 기대하라(14절)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절)

이것이 모든 구원 받은 자가 끝까지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진리다.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이다. 그분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고 우리가 죽을 때 그분의 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확실한 기대를 가지고 예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

때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여호사밧처럼 말할 수 밖에 없을 수도 있다. 우리를 치러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겠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여호사밧처럼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이 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세상 끝날에만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지금부터 계속해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우리의 예배가 이런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또 다른 날들을 확실한 기대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구원을 경험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위대하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도전

유대인들에게 시온이 더욱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들은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는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제한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언제든 어디서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다. 특정 장소는 의미가 없지만 모임은 여전히 중요하다. 영원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을 찾아가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모여 예배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의 임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단지 먼곳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예배한다. 그럼, 지금 우리의 예배는 그런 하나님의 임재를 바르게 드러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며 기쁘게 하나된 마음으로 예배하는가?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전하고 있는가? 이 예배가 구원의 하나님을 다시 기대하고 의지하게 하고 있는가? 교회가 모여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능력과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나타내심을 온 세상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하며 또한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