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수요집회가 좋은 다섯가지 이유
설교자: 조정의
본문: 여러 본문

수요집회 오신 유평교회 성도님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저는 특별한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수요집회가 좋은 5가지 이유”입니다. ‘수요집회에 더 모이길 힘쓰자’고 권면하기 위한 말씀 제목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 시간 우리가 왜 모이는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모일까요? 무엇을 위해 모일까요? 만나서 하는 일을 통해 무엇을 얻기 원하십니까? 무엇을 기대하고 이 자리에 오시나요?

수요일에 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을 잘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모여서 10~15분 정도 찬양을 합니다. 그리고 30분 가량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마치면 각자 흩어져 짝을 이루어 성도를 위한 기도를 5-10분정도 짧게 하고, 청소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청소를 하면서 혹은 마치고 나서 나누는 교제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함께 모여 찬양, 말씀, 기도, 봉사, 교제 이렇게 다섯 가지 일을 합니다. 계속 하던 것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왜 하는지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수요집회에서 하는 일을 성경으로 재조명하여 수요집회가 좋은 5가지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1. 찬양

찬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높이는 찬양과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는 찬양입니다. 사실 우리는 입술이 아닌 여러 도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예: 헌금). 하지만 찬양만큼 하나님의 성품이나 그분이 하신 일을 다양하고 풍성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없습니다. 

시편 19편을 보면 하늘과 궁창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날이 날에게 밤이 밤에게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온 땅에 통하는 지식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그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지식이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어 시편 19편 찬양으로 불려질 때 분명한 소리로 자세하게 표현됩니다.

그래서 찬양은 하나님이 온 땅에 만물을 통해 풍성하게 드러내신 영광, 또 우리 삶에 베푸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언어로 가장 자세하고 분명하게 노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배의 도구이자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찬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사 43:7). 하지만 죄는 사람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롬 1: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고귀한 보혈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끊어내셨을 때,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엡 1:14).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하늘에 허다한 무리, 천사들, 성도들과 함께 어린양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계 7:12).

쉽게 말해 우리가 수요집회에 함께 모여 드리는 찬양은 우리의 창조 목적이고, 구원의 목적이자, 영원한 존재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모여 찬양할 때 우리는 창조목적에 합당한 일을 행함으로 기뻐하며,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드릴 찬양의 즐거움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함께 모여 찬양해야 할까요? 성경은 회중 찬양을 언급합니다. 시편 149편 1절을 보면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성도의 모임 가운데 찬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시편 22편 21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우리는 찬송을 하나님께만 드리는 고백이라고 생각하지만, 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찬송은 우리들 사이에 중요한 의미를 전달합니다. 내 입술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선포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전달됩니다. 형제자매의 입술에서 나온 하나님에 관한 진리,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찬송이 우리 귀에 선포됩니다. 이렇게 시나 찬송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것을 우리는 “화답”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도가 함께 모일 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고 명령합니다(엡 5:19). (월드컵 축구중계 관람)

우리가 함께 모여 한 목소리로 마음을 다해 주께 노래하고 주를 찬송하며 감사의 찬양을 부를 때,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다스리실 하나님을 선포하고, 계속해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강력하게 격려하는 것입니다.

2. 말씀

두번째로 우리가 수요집회에서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의 중요성 말로 다 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고(벧전 1:23),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긴 것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된 것입니다(롬 10:17).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 갓난 아기가 젖을 사모하듯 찾아야 할 것도 말씀이며(벧전 2:2),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딤후 3:17). 사단을 무찌르는 성령의 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지요(엡 6:17).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사실 현대인들은 말씀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말씀을 귀기울여 듣기 힘들어합니다. ‘말씀은 짧을수록 좋다’라는 말이 있지요? 요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가운데 말씀시간을 20-30분, 어떤 곳은 15분까지 줄인 곳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요.

어떤 면에서 맞습니다. 현대인들은(물론 과거에도 그랬겠지만) 자신에게 관심이 있고 듣고 싶은 것은 두시간이 넘도록 들어줄 수 있지만, 관심도 없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는 설교는 아무리 성경적인 설교라 해도 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미 디모데에게 경고했던 바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하나님은 지금도 강단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계십니다. 전달하는 사람이 성실하게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해석하고 분명하게 전달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담고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 지역교회 집회에 나와 함께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는 성실하고 유능한 설교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존 맥아더, 존 파이퍼 등. 그들의 설교는 온라인에서 얼마든지 찾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와서 함께 모여 지역교회 세워진 일꾼(어쩌면 아직 설교를 공부하고 있고 훈련중인)에게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성경적인 교회의 9가지 특징이라는 책을 쓴 마크 데버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그 설교 영상 끝에 재미있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유익을 얻었다면 참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지역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여 그 지역교회 세워진 일꾼을 통해 말씀을 공급받기 원한다’라는 광고였습니다.

존 맥아더와 존 파이퍼, 마크 데버처럼 해박한 성경지식, 유능한 전달력과 표현력을 갖지 못하지만 지역교회 설교자는 그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영혼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을 가리켜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히 13:17). 지역교회 목사는 그 지역교회 성도를 자기 자신처럼 돌보는 자이고 그 영혼의 상태와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역교회 속한 그 양들을 인도자에게 맡기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가장 좋은 꼴,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음식을 찾아 인도하듯, 설교자는 성도 모두가 함께 들어야 할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을 위해 준비하고 그들 모두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지역교회 세우신 말씀의 일꾼을 통해 지역교회를 이루는 성도들 전체의 영적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우리는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은 세월을 소중히 여깁니다. 같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함께 공급을 받는 시간입니다. 영적 양식을 함께 먹는 것에도 그와 같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설교자가 엄마는 아니지만, 정성스럽게 준비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성도의 유익을 위해 사랑을 담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귀한 영적 식사시간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기도

다음은 기도시간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면 서로 짝을 이루어 기도책자를 펼쳐놓고 각자에게 배정된 성도의 기도제목으로 우리가 기도합니다. 수요일마다 유평교회 전체 성도를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어떨 때는 기도제목이 추상적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세요. 매주 반복하다보니 무뎌져서 큰 의미 없이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취업, 출산, 건강, 결혼 등.

우리는 왜 함께 모여 이렇게 기도할까요?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요? 성도가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면 기도빨이 더 세질까요? 혼자 조르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조르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실까요? 저는 아무리 하나님께 많은 사람이 구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회중 기도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회중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것의 가치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때 드러납니다. 기도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신뢰하는 마음, 인정하는 마음이 기도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회중이 함께 어떤 사안에 대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회중 기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의 흩어지고 연약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회중 기도의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매년 기도제목을 정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참 많습니다.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건강을 붙들어주시고, 배우자를 만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시고… 모두 우리가 함께 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번 교회에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서신서를 통해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은혜롭게 응답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성도들은 함께 기도한 것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사실 때문에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회중이 함께 기도하면 회중이 그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은혜를 함께 체험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 시와 찬미로 화답하며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회중 기도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함께 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교회에게 베푸신 풍성한 인자와 긍휼을 함께 맛봄으로 다시금 한 목소리로 찬양의 제사를 그분께 바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4. 봉사

다음은 봉사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여러 봉사를 합니다. 애찬당번, 아이돌봄, 수요일에는 청소를 합니다. 예전에 주일에 대청소를 해보니 성도들이 많이 온 날 청소를 하니 좋더라구요. 수요일 저녁 적은 성도가 왔을 때 청소를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서로 각자 맡은 구역에서 교회를 청소함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 그리고 주일에 참석할 성도들과 손님에게 예배할 수 있는 깨끗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봉사하는 것. 이것이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꼭 청소만이 아니라 유평교회 여기 저기서 성도가 가지고 있는 은사로, 힘과 지혜로 섬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은사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면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명령했습니다(벧전 4:10).

나이가 많이 드신 형제 자매님이 걸레를 들고 장의자를 닦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다 참석한 형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참석한 자매, 아이들 돌보느라 고생한 엄마와 할머니… 그들이 손에 빗자루를 들고, 걸레를 들고 구석구석을 닦고 쓰는 모습 속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님의 겸손과 은혜를 봅니다.

성도의 봉사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그들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섬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며 그 은혜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꼭 청소만 봉사는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섬김이고, 아이와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섬김입니다. 차량운행도 섬김이요 애찬봉사도 섬김입니다. 아이돌봄이나 예배찬양준비도 섬김이지요. 수요집회 시간에, 주일에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성도가 여기 저기서 섬기는 모습,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겸손히 우리를 섬기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봉사할 수 있는 힘은 먼저 우리를 죽기까지 섬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봉사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보상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5:40),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함께 봉사합니다. 예수님은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이렇게 말씀하시며 상을 주실 것입니다.

함께 봉사할 때 우리는 서로의 모습속에 은혜로우신 하나님 형상을 보게 되고, 우리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손과 발을 봅니다. 

5. 교제

마지막으로 교제입니다. 우리는 참 외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기계와 1대1 교제를 많이 합니다. 예전엔 만나서 함께 무언가를 했다면 이제는 함께 하더라도 따로 각자 집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합니다.

심지어 가족, 부부끼리도 단 둘이 앉으면 할 말이 업어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용합니다. 진지하게 삶의 문제를 나눌 시간도 사람도 점점 사라지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외롭습니다. 세상에 우리같이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다 이 땅에 눈을 고정시키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 바쁘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하늘에 눈을 고정시키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며 살아야 합니다. 같은 삶을 살아가는 성도와 교제가 필수적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습관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성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고 말합니다(살전 5:11). 성도가 성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하나님 말씀으로 권면해주고, 서로의 유익을 세워줍니다. 서로 하늘 소망으로 위로합니다(살전 4:18).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니다(히 10:24). 모두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며, 이 일은 함께 모일 때 가장 힘 있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가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을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똑같은 어려움을 겪는 성도를 위로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각자 여러 가지 상처를 가지고 있고, 여러가지 환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난 가운데 주신 지혜와 위로가 있고, 그것을 서로 교제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성도와 함께 태양보다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나누게 될 아름다운 교제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고 소망을 허락하셨는지 영원토록 나누지 않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교제를 우리가 먼저 지금 여기에서 함께 모일 때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수요집회에서 우리가 하는 다섯 가지를 살펴보며 그것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히브리서 말씀처럼 모이기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전에 자동차 극장 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 성도들이 각자 자기 차를 끌고 자동차 극장 교회에 옵니다. 각자 자기 차에 앉아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흐러나오는 찬양 반주소리에 맞춰 찬양을 부릅니다. 그리고 말씀도 듣습니다. 떡과 잔도 있다는데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들어갈 때 창문 속으로 약간의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겠지요. 그렇게 예배 프로그램을 마치면 차를 끌고 밖으로 나오는데 입구에 헌금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셈이죠.

하지만, 여러분 진지하게 생각할 때, 이게 정말 교회입니까? 아름다운 교회, 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모양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론 우리가 집회에 참석하며 자동차 극장 교회에 나오듯 그런 마음으로 참석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교회 구성원들을 ‘한 몸’이라 부르셨습니다.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하나로 움직이는 몸처럼 성도는 함께 모일 때 놀라운 생명력을 갖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우리의 창조주, 구원자를 찬양합니다. 서로 화답하며 온 맘으로 주를 한 목소리로 찬양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 영혼의 양식을 책임지고 공급할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을 통하여 함께 진리의 말씀을 함께 먹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를 의지하고, 주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함께 경험함으로 주의 은혜와 능력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주를 위해 봉사합니다. 서로의 봉사하는 손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은혜를 맛보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부르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우리를 섬기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서로 섬깁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교제합니다. 서로의 삶에 들어가 각자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여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고 서로를 주님앞에 온전하게 세워줍니다.

이것이 수요집회가 좋은 다섯 가지 이유입니다. 주일 집회가 좋은 이유이기도 하지요. 주일에는 한 가지 우리가 더 하는 것이 있지요? 만찬예배입니다. 주일 설교시간에 그 가치에 대해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함께 모여 드리는 모든 예배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