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경이 말하는 침례3
본문: 에베소서 4장 1~16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 시간에 침례의 방법과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물에 잠그는 예식’인 침례라고 말씀드렸고, 침례는 외적인 증거이지 구원의 내적 실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구원의 실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령의 인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외적으로 침례를 통해 증언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침례를 통해 증언하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음으로 모든 죗값을 씻고 죄의 종에서 놓였으며, 주와 함께 살아 의롭다 함을 얻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침례가 개개인의 영적 구원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공동체 가운데 침례가 선언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우리가 지체의 각 부분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고 말합니다(고전 12:27). 한 몸의 원리가 여러 측면에서 강조됩니다.

1) 나는 너와 상관없다, 너에게 붙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고전 12:15-16)

2) 쓸데없거나 무시할 수 있는 지체가 없다(고전 12:21).
부족하고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더 요긴하다(고전 12:22-23).
주께서 그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셨다(24)

3) 몸 가운데 분쟁이 없이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고전 12:18, 25)

4) 한 지체의 고통이 다른 지체의 고통이요 한 지체의 영광이 다른 지체의 영광이다(고전 12:26).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 교회, 공동체에게 침례가 어떤 의미를 제공할까요?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하나님이 부르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 교회에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인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모두 한 성령을 마십니다. 여기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가 말하는 것이 물에 잠그는 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성령 침례, 성령세례라고도 부릅니다)이지만, 물에 잠그는 침례가 성령 침례(혹은 성령세례)를 외적으로 증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에도 이 부분이 강조됩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5)

우리가 한 주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받은 세례도 하나라는 말입니다. 한 성령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고, 그 안에 소망도 같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운명 공동체입니다(엡 4:4, 6).

어떤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면 교회 더 헌신해야 할까 봐 부담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례는 외적인 증언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머리 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침례는 외적으로 증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침례의 유무와 상관없이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서 헌신과 봉사할 의무 그리고 특권을 갖습니다.

침례는 개인의 영적 구원을 증언합니다. 주와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침례는 그렇게 구원받은 개인이 각각 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 공동체(교회)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침례가 증언하는 메시지는 이처럼 개인적인 측면과 공동체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침례를 통해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무엇으로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을까요? “모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용납”, “평안”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덕목들은 성령의 열매(갈 5)입니다. 성령이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서로를 대할 때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음을 품고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품어야 하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분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마 11:29).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우리 모습을 입고 오셔서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빌 2). 그런 마음으로 성도를 대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무엇을 위해 기도해줄까요?”

이것이 우리가 침례에 순종하면서 외적으로 증언하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의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4:8)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봅시다.

하지만 성도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라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인 행함과 진실함은 바로 “오래 참음”과 “용납”입니다. 형제 사랑은 서로를 향해 오래 참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매 사랑은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오래 참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침례에 순종하면서 외적으로 증언하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의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고, 성령은 화평이라는 열매를 맺으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가진 자라고 부릅니다(고후 5:18).

교회 안에 화목하지 않은 상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별, 교육수준, 정치적 성향, 피부색, 성격, 그 어떤 요소도 성령이 우리 안에 이루신 화평, 화목을 위협하게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침례에 순종하면서 외적으로 증언하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의 구체적인 적용입니다.

교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나, 복음을 알지 못한 이들이 교회 왔을 때 종종 사람들이 선하고 좋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연약한 면이 많고 아직도 성화 돼야 할 부분이 많지만, 외인들에게 그런 선한 간증을 얻는 것은 좋은 것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성령이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과 용납과 평안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자라며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성령이 은사를 주신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먼저,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을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엡 4:13). 다른 말로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 온유, 겸손, 평안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성령 충만의 상태로 서로 봉사의 일을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성령이 교회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 각 사람을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도록 하나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각각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서로 봉사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몸에 비유해서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활력 있게 작동할 때, 각 지체가 연합하여 자기 역할을 충성스럽게 해냅니다. 뇌는 명령하고 근육은 움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호르몬이나 신경체계 등이 조화롭게 일을 해냅니다. 각자 자기 역할의 분량대로 일합니다. 그럴 때 몸이 온전히 작동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잘 생각해보면 봉사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매주 우리가 먹는 밥과 국과 반찬, 자매님들의 봉사로 주어진 것입니다. 매주 주일 학생들, 학생들, 청년들이 배우고 교제하는 것은 누군가의 봉사로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 앞마당이 깨끗한 것도 누군가의 봉사 때문이고, 교회 뒷마당 잔디가 아름다운 것도 누군가가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커피가 떨어지지 않고 보급되는 것도 누군가의 봉사 때문이고, 매 주일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전날부터 찬양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떡과 잔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어 만찬에 참여할 수 있고, 쓰레기 분리수거 하는 사람이 있어 교회 쓰레기가 넘치지 않고 항상 깨끗합니다. 미얀마에 매달 5명의 현지 선교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우리의 봉사를 통해서 되고, 교회 안에 어려운 성도를 돕는 일도 구제부의 봉사를 통해 되고 있습니다. 부친님, 모친님 한 달에 한 번 또는 수시로 섬기고 복음을 들려드리는 일도 우리의 봉사로 되는 일입니다. 교회 전체 등이 LED로 바뀌어 빛이 더 밝은 유평교회가 된 것도 봉사로 된 것이고, 교회 전체 방향을 계획하고 무리를 인도하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성도를 만나러 가서 세워주는 것도 성도가 하는 일이고, 오래 나오지 못한 성도에게 연락해서 물어보는 것도 성도가 할 수 있는 봉사입니다. 오랜만에 나온 성도를 만나 반갑게 맞이하고 안부를 묻는 것도 성도가 하는 봉사고, 교회 온지 얼마 안 되는 가정을 챙기고 빨리 적응하도록 돕는 것도 성도를 세워주는 일이며,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교인을 위해, 성도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밤낮 기도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성령으로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봉사하는 사람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함이라(벧전 4:11)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셔서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나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기쁨으로, 특권으로 여기고 힘차게 봉사해야 합니다.

이 영적 실재가 가진 특권과 축복을 이해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분노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왜 나만 일해?”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일해?”
“주일학교 교사면 이래야지”
“애찬 반찬이 뭐 이래?”
“찬양 선곡이 왜 이래? 반주가 왜 이래?”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조언이나 권면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나오는 불평입니다. 은사를 가지고 나를 섬겨주는 성도인데, 오히려 내가 돈 주고 부리는 것처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데,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봉사하는 것에 대해, 남이 하는 봉사에 불평을 갖는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봉사하니? 내 영광을 위해서, 나를 사랑해서 하는 거니?”
“너는 일하는 지체를 힘 나게 해주는 말을 하고 있니? 아니면 힘 빠지는 말을 하고 있니?”

둘째로 섬김을 받는 것만 좋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각 사람이 서로 자기 역할을 다하여 봉사하기를 원하시는데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참여하기보다는 회비를 내고 서비스를 받는 시설에 다니는 것처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여기에 두신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려고 당신을 구원하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를 섬기게 하십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지옥에서 꺼내준 건 고맙지만 이제 내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이 오히려 복된 거야”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영생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얼 하겠느냐?”

셋째로 지체로서 다른 지체에게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다른 지체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봉사를 많이 하든 적게 하든,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이룬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 섬기는 것과 교제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가령 남편과 아내가 서로 극과 극인 자녀 양육 방식을 추구하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가운데 낀 자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서로 다른 생각과 성숙도를 가진 수많은 지체의 유기적 연합입니다.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교회에 제시간에 오는 것은 단지 개인의 신앙생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9시에 일찍 도착해서 예배시간에 미리 앉아있는 구도자의 눈에 매주 떡과 잔을 돌릴 때 도착하는 성도가 어떤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담배나 술을 절제하는 것은 개인의 신앙생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가족, 자녀, 가까운 성도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계속해서 미칩니다.

수요집회 참여하는 것, 주일 오후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것, 물론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만, 매주 성실하게 참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진지하게 모이기에 힘쓰고
말씀을 배우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납니다.

교회에서 하는 주일학교행사, 콘서트, 실버학교 등 모든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우리는 나에게 유익이 되면 하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안 하고 이런 태도가 아니라, 내가 가서 섬길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내가 지체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없는가? 이런 태도로 서로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체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지체로서 다른 지체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셨던 것처럼
이 세상에 수많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의 마음에 비추기 원하십니다(고후 4:6; 딤전 2:4).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4).

어떻게 죄인을 위해 겸손과 온유로 옷 입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섬기는 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섬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체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겸손과 온유로 대하고,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납할 때, 우리가 서로 가진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고 세상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넘치는 일을 위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능력이 넘치는 일을 위해 성령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침례는 이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각자의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복음, 우리를 하나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매주 우리가 드리는 만찬 예배 역시 이것을 계속해서 증언합니다.

당신은 매주 공적으로 고백하는 이 증언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