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각해 보라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3절~7절

설교자 : 이병권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비난할 때 믿는 사람에 대해서 맹목적이다 라고 안 좋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을 강요하고 믿음을 내세워서 헌신을 요구하고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한다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모르지만, 진리를 잘 알지 못해서 생기는 오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무슨 말을 하든 무턱대고 ‘믿습니다.’를 외치고 무조건 ‘아멘, 아멘’을 말하는 것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인 사고를 정지시키고 질문도 포기하고 묻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오히려 생각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믿음을 시작할 때, 신앙을 가질 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매순간마다 계속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더 영광이 될지 생각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가치와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다양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명령합니다.

‘기억하라, 묵상하라, 계산하라, 마음에 두라, 마음을 품으라, 이해하라, 살피라, 여기라, 기념하라‘ 표현에 따라 뉘앙스나 명령이 의도하는 바는 차이가 있지만, 핵심은 생각하라고 우리의 지성에 대해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에서도 이러한 명령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생각해 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그럼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라”는 명령은 앞에서 언급한 것에 대한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바울이 앞에서 무엇을 말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은 생각해 보라고 명령하기 전에 세 가지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어떠한 모습인지 생각할 수 있는 비유들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의 모습과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도 이 명령대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명을 맡은 자로서 나는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또한 사명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비유, 세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병사입니다.

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병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병사의 사명은 자신을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모집한 자의 뜻에 따라 싸우고 지키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모집한 자가 나라라면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고 모집한 자가 개인이라면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나라에 속한 군인이든 개인에게 속한 사병이든 용병이든, 병사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자신을 불러준 사람을 위해 일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가 누구의 병사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병사로서 나와 같이 너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누구도 이 고난에서 면제될 수 없기에 너도 나와 함께 고난을 받아라.’

병사로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받는 고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 표현으로 하면 군대에 갔을 때 겪는 고난들, 혹시 이런 걸까요?

‘밥을 빨리 먹어야 해요. 스타일에 맞지 않는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해요.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해요. 늦잠을 잘 수 없어요. 베개 높이가 맞지 않아요.’

병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불평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불편할 수 있지만 고난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군대에 간다고 했을 때, 우리가 격려하면서 군대에 있는 시간이 고생이고 힘들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분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소속이 달라집니다. 그 생활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물론, 병사가 힘든 훈련을 받으며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고난이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포인트는 자기 생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병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병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속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기에, 세상을 따르지 않기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기에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고난으로 다가오고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병사로 복무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따라 수고하고 고난을 감수합니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모집한 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병사로서 개인 생활은 다 포기해야 되는 걸까요? 군인처럼 살아야 합니까?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주님이 허락하신 삶이 있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그 삶을 누리며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신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들은 그 자체가 해가 되지는 않지만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데 방해가 되거나 얽매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냥 놀러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병사로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 얽매이게 되는 것을 조심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겨주신 분의 뜻에 따라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고난이 따라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병사인 우리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도망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병사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두 번째 비유는 선수입니다.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세 가지 비유를 두 글자로 맞추려고 선수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경기하는 자”입니다. 운동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경기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선수를 뽑으면 어떤 사람을 뽑습니까? 국가대표를 선발할 때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을 뽑을까요? 아닙니다. 실력이 제일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 그 분야의 최고를 뽑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수로 뽑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발탁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기준과 거룩하심 앞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자인데, 하나님은 그런 자격 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같은 자를 선수로 뽑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가슴에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그분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선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선수가 되었고 선수로서 사명이 맡겨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열심히 해야겠죠. 경기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부분은 생략하고 다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법”, 규칙을 말씀합니다.

바울이 첫 번째 비유, 병사에서 고난에 대해서 언급했다면 두 번째 비유, 선수에서는 규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을 참고하면 현대인의 성경은 5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운동 선수가 규칙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상을 받지 못합니다.”

규칙대로 경기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선수에게 있어서 목표는 승리입니다. 상을 받는 것입니다. 당시에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승리자의 관” 월계수를 엮어 만든 관이 상으로 주어졌습니다. 오늘날 금메달이나 우승컵, 트로피와 같은 것입니다. 승리자의 관, 이것이 선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승리가 어떤 것보다 가장 우선되는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수에게 주어진 사명은 단순히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대로 경기하면서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모든 경기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어떤 운동선수도 아무리 뛰어나고 특별한 선수가 있다 해도 규칙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혹,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규칙대로 경기를 하며 규칙대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유혹들을 만납니다. 순종하기 힘든 말씀은 무시하기, 남들이 하니까 나도 모른 척 따라 하기, 양심에 걸리더라도 이득이 생기는 일은 포기하지 않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기 나에게는 관대하게 남에게는 엄격하게,

그럴 때마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냥 선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이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선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름값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경기에, 우리의 삶에, 우리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걸려있는데 그냥 내 마음대로 규칙을 어기면서 경주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하며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리는 방식은 언제나 규칙대로입니다. 페어플레이를 하는 것이 우리 경기 스타일입니다. 매너게임을 하는 것이 우리 경기 방식입니다.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리를 위해 규칙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모두가 다 우리의 승부처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길로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칙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선수인 우리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마라톤 도중에 힘들어서 택시를 타고 결승점에 도착한 선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시고 경주를 허락하신 선수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주님 안에서 규칙대로 달리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유는 농부입니다.

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선수가 정정당당히 경주해야 한다면, 농부는 열심히 수고해야 합니다. 여기 말씀에서 “수고하는 농부”라고 할 때 “수고하는” 이라는 단어는 ‘지치도록 힘들게 일하다’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수고하고 가볍게 일하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수고와 노력을 계속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농부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수고”입니다. 열심히 수고하는 것은 농부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농기계가 있고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는 여러 기술들이 개발되었어도 농사는 사람의 수고가 많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바울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농사에서 성공하려면 수확을 얻으려면 농부의 수고는 당연한 것입니다. 농부의 흘린 땀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비유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 아닙니다. 바울은 영적인 일에도 이와 같은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수고하여 곡식을 받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농부가 수고하는 것을 개인의 영적인 훈련으로 보고 수고를 통해 영적으로 거룩함을 수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농부가 수고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수고를 통해 사람을 수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적용이든지 핵심은 헌신적인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절제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하며 계속해서 자신을 훈련했습니다(고전9:27) 뿐만 아니라,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매 맞기도 했고 갇히기도 했고 잠을 못하고 먹지 못하고 온갖 수고와 어려움을 감수했습니다(고후6:5). 그렇게 했을 때 농부가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는 것처럼 바울의 삶에도 그러한 열매들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농부의 수고와 인내는 때가 되었을 때 그 결실로 나타납니다.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게으른 농부는 거둘 것이 없습니다. 절대로 좋은 농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농부로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고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르고 나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성품이라는 땅을 경작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거룩함을 심고 가꾸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거둘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에 심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점점 더 열매를 얻기 어려운 쓸모없는 땅이 될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J.C 라일은 거룩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하기, 주일을 이용하기 등에 대해 부지런하지 않으면서 거룩함을 이루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추수 때까지 전혀 돌보지 않으면서 농사에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수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너무 높고 영적이라 아무런 수고 없이도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절대 축복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농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수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땅을 소유하고 소작농을 부리는 지주가 되려고 합니다. 나의 수고 없이도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도 누군가의 수고를 통해 이득을 얻고 수확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죄송스럽게도 저는 그런 경험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심고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은혜로 열매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고구마며, 감자며, 옥수수며 때에 따라 열매들을 은혜로 얻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수확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수고에 따라 열매가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나의 수고만으로 되지 않으며 그 모든 일에는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는 것은 우리 측면에서의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고를 하지 않으면서 성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훈련하지 않으면서 더 주님 닮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열매만 얻으려는 게으른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땀을 흘리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어떤 모습인지, 세 가지 비유로 생각해보았습니다. 병사선수농부입니다. 병사로서 고난을 감당하며 선수로서 규칙대로 행하며 농부로서 수고를 다할 때, 우리는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따라오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보상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농부가 수고할 때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확을 하는 겁니다. 선수가 규칙을 따라 경기하면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승리자의 관이 있습니다. 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병사가 고난을 잘 감당할 때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병사의 사명은 자신을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사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자신을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값지고 귀한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병사로서 고난을 받는 일은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주님, 나를 쓸모 있게 하시고 보잘 것 없는 나를 가치 있게 하신 주님,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한다면 이 보상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깊이 사랑하면 할수록 이 보상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분을 나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분을 내가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보상이며 은혜입니까! 내가 뭔가를 받고 내가 뭔가를 누리고 그 보상의 초점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미소 짓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이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게 만드는 동기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총명을 주십니다. 이해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2: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주님께서 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살펴본 말씀도 그러합니다. 다시 생각하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수고 가운데 은혜를 더하셔서 병사로서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선수로서 유혹과 시험을 이기게 하시고 농부로서 게으름과 안일함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비유를 생각하시고 또 생각하셔서 주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해 수고하시고 규칙대로 행하고 고난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