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버림받은 자의 시편

본문 : 시편 13편

설교자 : 최종혁

시 13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좀 더 분명히 말씀드리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시편’입니다. 본문은 개인적인 슬픔을 노래한 시편으로, 그런 형식의 시편 중 가장 짧으면서도 애가의 핵심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시입니다. 시편 13편을 통해, 슬픔과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는 다윗이 슬픔 중에 탄식하는 기도를 하고 있고, 5절과 6절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기쁨 가운데 하나님께 찬송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슬퍼하고 탄식하다가 끝에 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극단적인 태도 사이에는 3절과 4절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기도’입니다.

버림받은 자의 탄식(1,2절)

1, 2절에서는 같은 말이 4번 반복되는데 바로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현재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당장 멈춰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절망의 상황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신 것 같다고, 잊으신 것이 아니면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숨어계신 것 같다고 느낍니다. 현재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다윗을 잊으셨다거나 일부러 숨어 계시는 것은 아니지만(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이 처한 고난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식하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종종 이런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3:7; 9:19; 10:12) “여호와여 돌아오소서”(6:4) “여호와여 나를 위하여 깨소서”(7:6)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7:7)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0:1). 이와 같은 말씀들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치 그러신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시적인 표현입니다.

1절에서 “잊으십니까”, “얼굴을 숨기십니까”라는 물음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기억하신다”거나 “얼굴을 비춘다”라는 표현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가 길어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잊으셨다가 갑자기 기억해 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호의와 은혜를 내리기로 결정하실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 “나를 기억해달라”거나 “얼굴을 비춰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용한 표현도 그와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 같고 얼굴을 숨기신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호의와 복, 사랑이 다윗의 삶에서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깊은 절망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조차 의심스러울 때, 하나님이 내가 믿고 있던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일까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으셨습니까. 감사도 잘 나오지 않고, 어려울 때 힘이 되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으며, 가족도 자녀도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을 때, 직장은 그만 두지 못해서 다니고 있고 교회도 맡겨진 일들만 겨우 해나가며, 내 안에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런 때가 있으십니까. 삶 가운데 승리는 없고 죄책감만 늘어가는 상황,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런 상황을 한 두 번은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린 것 같은 상황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감정의 늪입니다.

다윗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깊은 절망에 빠졌을 때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들만 많아집니다. 더 깊은 감정의 수렁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주변의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그래서 삶에 평안과 즐거움이 있다던 나를 더욱더 비웃습니다. 다윗은 이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이런 상황이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고통의 크기보다는 고통의 길이가 될 때가 많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정직하게도 내가 지금 이렇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없는 자의 불평이 아닙니다. 정말 믿음이 없는 자라면 이런 고통 중엣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돌밭에 떨어진 씨는 금방 싹이 나고 자라지만 해가 나면 금방 말라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의 의미는, 처음에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지만 후에 환란이 오면 그 예수님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자들은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참된 신자는 다윗의 기도처럼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절망의 감정조차도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옵니다. 이 고통이 왜냐고, 어느 때까지냐고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탄식은 회복으로 가는 시작이어야 합니다.

버림받은 자의 간구(3,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다윗은 언약의 관계,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을 의미하는 “여호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내 하나님”으로 그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그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하나님께서 나를 잊고 계신 것 같은 상황에서, 그는 나를 생각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숨어계시고 귀를 닫고 계신 것 같은 상황에서 응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근심할 때 그냥 두지 마시고 눈을 밝혀주시고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굶어서 배가 고팠다가 꿀을 먹을 때 “눈이 밝혔다”고 말합니다. 육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그는 세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시면(나를 그냥 두시면) 내가 사망의 잠을 잘 것이고, 다윗의 원수들이(악인들) 다윗을 이겼다고 말하고 자랑할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면서 그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자체는 다윗에게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슬픔이 끝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잘되는 것으로 눈앞에서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의가 무너지는 세상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있었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땅에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다윗의 죽음으로 인해 원수들이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고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시 10:11). 이것이 정말 다윗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올바르게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다윗이 염려합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바라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윗의 간구는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버림받은 자의 찬송(5,6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성경에서 “오직”이라는 말은 앞의 말과 반대의 의미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든지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그래서 나는”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것이 환경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환경에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어계신 것 같고 환경이 나를 몰아가지만,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대적들은 조금만 있으면 기뻐하고 자랑할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러한 확신은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붙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변하지 않는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너그럽게 대하셨다’, ‘풍성하게 대하셨다’, ‘분이 넘치게 베푸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주십니다. 언제나 넘치게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시작은 어둡습니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말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위대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시편인 동시에 ‘인도자에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회중들이 함께 불렀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경험했던 상황, 경험이 다윗에게만 유별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이러한 감정을 느낍니다. 우리도 슬픔 가운데 머무를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탄식에서 찬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시는 삶에서 절망을 경험하는 우리의 모델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좌절할 때 이 기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주님은 언제 이 말씀이 이뤄질지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