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엇을 위해

본문: 사사기 20장 1절~48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려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화를 내고 있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힘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가? 가치 있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신을 살피면 마음을 정리할 수 있고 감정을 추스를 수 있기에 이 질문은 하면 할수록 나에게 유익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할 경우 많은 경우에는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나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 내 욕심을 위해 이러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결국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하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화가 난 거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말하지만 얼마나 자주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해서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안 좋은 결과를 거두기 전에 미리미리 자신을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얻어지는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경고가 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하는 일을 다시 생각해보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지, 내가 하는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기브아 불량배들이 행한 끔찍한 일을 보았습니다. 레위 사람은 그들의 악을 갚아주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 시체를 보냈고, 이스라엘은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1)

이스라엘의 가장 남쪽에서 가장 북쪽까지, 그리고 요단강 건너 길르앗에서도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인 미스바는 베냐민과 에브라임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었고 문제가 되는 기브아 지역과 5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과 그 결과를 보면 좋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같은 이스라엘끼리 싸우려고 모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인 이스라엘 병사의 수가 40만 명입니다. 엄청난 수가 모인 것입니다. 한 자리에 모인 이스라엘은 먼저 사건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레위 사람에게 이 일에 대해서 묻습니다.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4-6)

레위 사람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잘 전달했습니까? 특별히 5절에 보면 기브아 사람들이 이 일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 레위 사람이 말한 “사람들”이라는 단어는 그냥 일반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지도자들이나 유지들, 주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레위 사람은 지금 몇몇 불량배가 아니라 기브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벌인 것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에게 첩을 내어주었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정당화합니다. 자신이 한 일은 기브아 사람의 악에 대한 당연한 반응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브아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일으켜서 그 분노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해레위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합니까? 자신을 위해 합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려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때때로 우리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사실보다 좋게 말하고, 사실보다 나쁘게 말하고, 사실과 다르게 말합니다. 나에게 유리하게 말합니다. 레위 사람처럼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

레위 사람의 말에 넘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끔찍한 일을 벌인 레위 사람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레위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입니다. 모든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8-10)

이스라엘은 전쟁을 결정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모인 인원의 1/10은 양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게 합니다. 40만명 중에 36만명은 전쟁에 투입되고 4만명은 보급을 맡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한 마음이 되어 기브아 성읍을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는 베냐민에 속한 모든 지역에 사람들을 두루 보내어 기브아가 행한 악행을 알리고 기브아 사람들을 넘겨 줄 것을 요청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베냐민은 기브아를 내어주기 보다는 싸우기로 합니다. 싸우기 위해 모인 베냐민 병사가 2만6천명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에서 왼손잡이 즉 전쟁을 위해 훈련된 자가 7백 명입니다. 이렇게 해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군사의 수가 총 2만6천7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36만과 베냐민의 2만6천의 싸움입니다. 숫자만으로 생각하면 13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냥 봐도 싸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왜 베냐민은 무모하게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할까요? 베냐민 지역에서 벌어진 일인데, 베냐민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 악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냐민은 왜 이런 결정을 한 걸까요?

무엇을 위해베냐민 지파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합니까? 자기 사람을 위해 합니다. 자기 사람이면 다른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죄에 대해서도 용납합니다. 자기 사람, 자기 지파, 자기 가족이면 합당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혈연을 우선시 하고 친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 자체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정당한 다른 기준을 넘어서게 될 때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공의를 벗어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족을 위해 불법을 행하고 자기 사람의 죄는 눈감아줍니다. 이런 일은 요즘에도 계속 뉴스에 나오는 일들입니다. 옳고 그름을 정직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결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동족 간에 피 흘리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진영이 있습니다. 그 행한 일을 심판하기 위해 일어선 이스라엘 연합군과 죄를 범한 자기 사람을 지키려는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은 3번에 걸쳐서 계속됩니다. 성경의 기록이 같은 형식으로 반복되는데 먼저 질문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그러고 나서 전쟁이 있고 그 전쟁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럼 세 번의 전쟁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18)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이 질문은 바른 질문일까요?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과 싸워야 할지를 묻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질문은 이 전쟁이 합당한 것인지, 하나님이 이 전쟁을 원하시는지, 베냐민과 싸우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전쟁 자체에 대한 질문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없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늦은 밤에 잘 시간이 다 되었는데, 엄마한데 와서 묻습니다. ‘엄마, 초콜릿하고 사탕 중에서 무엇을 먼저 먹을까요?’ 이스라엘은 이미 전쟁을 결정한 후에 단순히 누가 먼저 싸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유다가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1장에서도 하나님은 유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다에게 리더의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냐민이 승리했고 이스라엘 연합군 2만2천명이 전사합니다.

전쟁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베냐민은 지형적으로는 더 유리했습니다. 기브아가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더 수월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수적인 우세를 앞세운다 하더라도 어차피 싸울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습니다. 36만명이 동시에 베냐민 군사들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순서를 정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베냐민에게는 훈련된 군사들도 있었기에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패배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울면서 질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23)

여기 두 번째 질문을 보면 첫 번째 질문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을 다르게 말합니다. “내 형제 베냐민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형제라는 언급이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싸우러 나갔고 또 패배합니다. 1만8천명이 전사합니다. 두 번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4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은 또 다시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엎드려 웁니다. 여기서 또 달라진 것들이 있습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26)

세 번째 전쟁을 앞두고 달라진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할 때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모든백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만 언급이 되었는데 이제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금식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두 번의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알지만 그들이 지금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합당한가? 그래서 사사기의 저자는 27절과 28절에서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이유를 언급합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벧엘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고 그 자리에 아론의 손자인,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생기는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의 언약궤가 벧엘에 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분명 18장에서는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벧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사기 이후에 사무엘 때,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를 보면 언약궤가 실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언약궤가 실로에 있기 전에는 벧엘에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고 사사기의 두 번째 결론은 첫 번째 결론보다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28) 질문도 달라졌습니다. 싸우리이까 말리이까전쟁 자체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습니다. 패배 전에는 이런 질문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런 죄악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공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듭 되는 패배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합당한 일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28) 하나님이 이번에는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장면이 자세히 기록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승리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복 작전을 펼칩니다. 일부의 군사들이 베냐민과 싸워 패하고 도망을 가는 척 합니다. 베냐민은 속아서 성읍에서 나와 도망가는 적들을 쫓아갑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먼저 비어있는 성읍을 점령합니다. 그러고 나서 매복했던 군사들과 함께 모든 군사들이 연합해서 추격하던 베냐민 군사들을 포위하여 공격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쓰는 전략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점령할 때 썼던 전략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사용했던 전략을 형제를 정복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사기의 저자는 여호수아에 기록된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이들이 하는 일이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와 같음을 알려줍니다(40; 수8:20).

결국 베냐민은 크게 패합니다. 잘 싸우던 베냐민이 왜 패배했을까요? 이스라엘이 정신을 차리고 전략을 세워서 제대로 싸웠기 때문일까요? 이 패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35)

결국 베냐민을 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베냐민을 심판하셨고, 베냐민뿐만 아니라 베냐민을 치기위해 모인 이스라엘도 두 번의 패배를 허락하시면서 그들을 일깨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승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한 후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48)

베냐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도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은 징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했을 때처럼 베냐민을 진멸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합니까? 복수를 위해 합니다. 시작은 이스라엘에 죄악을 없애기 위해서,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4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냐민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더 크게 쌓이게 됩니다. 적대감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갚아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갚아줍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무엇이 옳은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할 때 처음에는 좋은 뜻에서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좋은 의도와 계획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 개인적인 욕심과 다른 목적으로 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레위 사람에게, 베냐민 지파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냐고? 무엇을 위해 일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을 위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려고 이러고 있습니다. 내 눈에 좋아보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나의 만족과 나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내 뜻을 이루려고 이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긴다고 하면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기를 원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 질문이 필요한 상황이 오기 전에 먼저 나에게 이 질문을 반복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여러분 삶에서 계속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매 순간 이 질문으로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나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여러분, 사사기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그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 벌어진 죄악 된 일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그 시대에 왕의 명령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자기 욕심이 우선 되는 그 때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혼란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같습니다. 왕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각자가 왕이 되어서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삽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삽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금하신 것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죄든, 망령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왕이 뭐라고 하든 내가 좋으면 상관없습니다. 내 눈에 좋으면 그것을 선택해도 됩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과 다릅니다.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목표가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가장 우선되는 궁극적인 이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하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최우선에 두고 다른 모든 것은 주님 아래에 둡니다. 그럴 때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고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결론으로 “주님”이라고 답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로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결론 내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주님”으로 답하는 것은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주님”으로 답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주님”으로 답하는 것은 나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주님”으로 답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는가 아니면 나를 우선순위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가 아니면 나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어떤 결론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