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하라
본문: 시편 4편
설교자: 최종혁

시 4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 이런 시를 썼을까요? 지난 번 말씀드린 시편 3편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전쟁 중에 도망하면서 쓴 시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인 시편 4편은 그런 특별한 상황은 없습니다. 그러나 3편과 마찬가지로 어려움 중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1)“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둘 다 다윗이 어려움 중에 기록한 시인데 시편 3편과 4편은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태도입니다. 3편에서 다윗은 매우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의 약속의 구원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압살롬의 반역, 그 뒤에 숨겨진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인 범죄 때문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겸손히 낮아진 제사로 담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4편은 다윗의 태도가 다릅니다. 그것은 2절~5절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대적들에게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2)라고 꾸짖고, 자신을 “경건한 자”, “하나님이 택하신 자”(3)라고 말합니다. 또한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4)라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환란인 것을 알고 외부적인 어려운 환경에서 쓴 것이라면, 4편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면서 쓴 시입니다. 또한 어떤 외부적인 어려움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고 다만 마음 속에서 전쟁을 겪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까닭 없이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모함하거나 수군거릴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나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을 늘어놓는다면, 특히나 체면이나 평판이 중요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더 어려움이 될 것입니다.

시편 4편은 마음속의 전쟁을 겪고 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을 겪는데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나님의 속성)’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하나님의 일)’를 바탕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나의 의로우신 하나님이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3편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3:3)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고 치욕스러운 상황에서 그가 기억한 하나님은 ‘방패’, ‘영광’,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 불의를 당하고 있는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의 처음과 끝을 아시고 의롭게 판단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1) 과거에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동일한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은 우리의 과거에 지켜온 신앙이 앞으로의 신앙생활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가사입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굳건한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그랬으면 앞으로 그러실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나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다시 동일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1)라는 구절의 “곤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아주 좁은 공간에 갇혀서 꼼짝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시에서 사용될 때는 ‘어려운 처지에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나를 너그럽게 하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시편에는 가끔 “나를 광활한 곳에 두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는 그런 표현을 볼 때마다 의아해했습니다. 이것은 ‘공간을 만들어 넓은 곳에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좁은 곳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시고 때로는 그곳에서 빼내서 넓은 곳으로 옮겨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과거에 꼼짝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건져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다시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 다윗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씩 기도제목을 보면서 쇼핑리스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는 나의 필요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기억하고 그분께 다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에도 하나님의 속성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기도를 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악된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책의 저자는 그렇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정직하고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부탁한다면 그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요? 술을 마시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아는데 술자리에서 그에게 술을 먹이려고 한다면 그를 모욕하는 것이 아닐까요? 도둑이 도둑질하러 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불의한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2). 여기서 “인생들”은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은 다윗의 대적들로서 그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있었습니다. 헛된 것을 좋아하는 그들 때문에 다윗은 곤란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과거로부터 그런 일들이 있어왔고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죄가 있어 당하는 고난과 아무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 중에 무엇이 더 힘들까요? 아마도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이 더 힘들 것입니다. 그는 늘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있을까’, ‘그는 나에게 왜 이와 같이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억울함과 분노를 느낄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3). 1절에서 간절하게 구하던 기도는 3절에 와서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는 확신에 찼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 중 하나이므로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다윗에게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에 주목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계속해서 우리가 처한 환경, 자신의 생각에 주목한다면 억울함, 분노, 하나님께 대한 원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주목하면 확신 가운데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민수기에 등장합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민 13:30,31). 열두 명의 정탐꾼 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백성들 앞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갈렙이 한 말과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한 말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2,33)”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4:1) 밤새 통곡하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4:2,3). 백성들은 지도자에 대해 원망하고 다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4) 그들은 이제 그들만의 지휘관을 세우고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중들은 상황에 그들의 모든 생각을 담아두고 집중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생각을 집중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6-10)”

다윗은 대적에게 “너희는 떨며(두려워 하여)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4)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범죄하지 말라, 그리고 조용한 시간에 그들의 말과 행동, 생각을 깊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헛된 생각과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5). 다윗의 대적들도 역시 제사를 드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 외식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마음이 낮아져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의로운 제사입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 51:18,19).

본문 2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이 대적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다윗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원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누가 우리에게 좋은 것, 행복, 평안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민수기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3-26). 이 축복의 말씀을 바탕으로 다윗은, 좋은 것을 보일 자 누구냐는 세상의 물음에 하나님께서 선을 보여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한 다윗은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농부는 수확을 풍성히 얻었을 때 일 년 동안의 수고를 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기쁨은 어떤 농부의 기쁨보다 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두셨습니다. 그 기쁨을 다른 것과 바꾸려 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8). 우리는 우리가 당한 모든 어려움 중에 슬퍼하고 번민할 수 있지만 편안히 눕고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구절 때문에 시편 4편을 ‘저녁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번민, 두려움, 염려, 억울함, 분노,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그치고, 마음의 전쟁을 가라앉히고, 평안히 잘 수 있다고 말하는 시편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대부분 우리 스스로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도 막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전쟁은 우리가 끝낼 수 있습니다. 불안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하나님에 대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주권적으로 택하셔서 보호하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모친님의 기도제목 중에 ‘불면증이 약을 먹지 않아도 치료될 수 있도록’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치료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생각하시고, 편히 눕고 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