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신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 골로새서 1장 1-8절

설교자 : 조정의

골로새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탁월성”,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오랜 기간 살펴본 누가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배웠다면, 이제 그분의 탁월성과 충만함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로새서를 통해 확실히 알기 원합니다.

골로새서는 기본적으로 편지입니다. 다른 말로 서신서라고도 부릅니다. 편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골로새서의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1절과 2절에 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 보내는 사람: 바울 & 디모데(1절)

신약성경 대부분의 서신서는 초반에 이렇게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짧은 인사말이 적혀 있습니다. 먼저 편지를 쓴 사람은 1절에 나오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간략하게 바울을 소개하면 그는 자기를 소개한 바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뒤바뀐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가는 곳곳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열심히 핍박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행 22:3).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택하여 자기 그릇으로 삼아주셨을 때(행 9:15), 그는 가는 곳곳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행 26:17-18).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하게 여겨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배설물처럼 가치 없게 여겼습니다(빌 3:8).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었고, 죽는 것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는 것이기에 오히려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빌 1:21). 그만큼 그리스도는 바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바울은 충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그리스도로 충분했는지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한 세 가지 곧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고전 13:13). 첫째, 바울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 바울이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둘째, 바울의 헌신적인 형제 사랑이 어디서 흘러나온 것입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셋째, 바울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이 대답합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바울의 믿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성도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바울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모든 것이 되셔서 참으로 바울을 충만하게 하는 분이셨습니다(엡 1:23).

형제 디모데 역시 바울과 함께 골로새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가 공동저자라기보다는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디모데는 2차 선교 여행이 시작될 때부터 바울과 동역했던 자로, 바울은 디모데를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 불렀습니다(고전 4:17).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도 불렀는데(딤전 1:2), 아마도 바울을 통해 구원받고 그 이후 가장 강력하고 헌신적인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골로새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인데, 여기 디모데 이름이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디모데 역시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처럼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생을 뒤바꾼 삶의 전부가되시는 분이었습니다. 디모데에게 따로 쓴 편지인 디모데전후서 내용을 보면 바울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딤전 1:14), 그리고 소망을(딤전 1:1; 4:10) 붙잡으라는 권면을 합니다. 디모데에게도 그리스도 예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충만한 분이셨습니다.

2. 받는 사람: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2절)

이제 골로새서 편지의 받는 사람을 볼까요? 2절에 나옵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입니다. 

골로새는 소아시아 남동쪽 리쿠스 강가에 위치한 소도시였습니다. 오래전에는 이 도시에 중요한 두 개의 도로가 교차하면서 문화와 상업, 무역이 활발하게 교류되었지만, 중심 도로가 옮겨지면서 주변에 있던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에 가려져 이 편지를 쓸 때 즘엔 쇠퇴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재건은 되었지만 60년대 초에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던 곳입니다. 더 중요한 건 바울이나 그 동역자인 디모데 등이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성도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골로새에 복음이 전달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7-8절에 나오는 에바브라입니다. 

7절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절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에바브라는 바울, 디모데와 함께 그리스도의 종 된 사람이며, 최초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골로새 성도에게 들려준 사람이었습니다. 골로새 근방에 있는 에베소에서 바울이 3년간 머물며 복음을 전했을 때(두란노 서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행 19:10), 아마도 이때 에바브라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골로새로 돌아가 그 근방에 있던 이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렸고(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그 결과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 즉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 자라난 것입니다(골 4:13). 대부분 이방인이었으나 당시 이주시킨 유대인이 이 지역에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도 분명히 이 무리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에바브라는 단지 복음을 전달해준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항상 골로새 성도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가르치는 목사였습니다(골 1:7-“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4:12). 그뿐만 아니라 빌레몬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힐 정도로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자였습니다(몬 23).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 부릅니다. 성도들을 구분하여 신실하거나 신실하지 않은 부류로 나눈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모두 신실한 형제자매들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에바브라처럼 골로새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둔 그리스도로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는 인사말로 그들에게 보낸 이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3. 교회의 소망(4-8절)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청년 형제와 통화하는데, 그 청년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유평교회는 좀 어때요?” “교회엔 별일 없나요?” 저는 “응, 좋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뭐가 좋은 것일까요? 교회가 어떤 모습인 것이 좋은 상태일까요? 별일 없는 건강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3절에 편지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3절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바울은 가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기도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에바브라가 바울을 찾아와 전해준 소식, 즉 골로새 교회가 좋고 건강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8절).

5절…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절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5-6절에 나온 것처럼 복음은 온 천하에 퍼져 열매를 맺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지역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에게 전파된 복음 진리의 말씀을 그들이 듣고 나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열매를 맺고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며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1960 후반, 유평 지역에, 아무런 영적 생명이 없는 이곳에 복음 진리의 말씀이 전달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이 모여 지금의 유평교회가 되도록 자라났습니다. 지금도 복음은 이 가운데 열매를 맺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을까요? 만일 사도 바울이 우리 교회 소식을 듣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남은 시간 우리가 바울이 감사했던 골로새 교회의 모습,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열매 맺고 자라났던 모습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개인의 삶을 돌아보고 또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정말 잘 자라고 있는지 점검해봅시다.

바울은 4절부터 5절까지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세 가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바로 그 세 가지 이유로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골로새 교회를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둔 믿음

먼저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복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롬 1:17). 죄인이 성도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롬 3:28).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히 11:6).

어제 아침엔 아주 예쁘게 지어놓은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4층짜리 건물에 1층엔 카페, 2-3층은 아주 멋진 대예배실, 4층엔 식당과 중고등부 교실,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의 멋진 교회였습니다. 부럽더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건물이 멋지면 건강한 교회일까요?

만일 멋진 예배당에서 아주 많은 사역을 하면 어떨까요? 섬김과 봉사가 넘치고, 유익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그러면 건강해 보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정말 그러면 건강한 교회일까요?

아닙니다. 근본적이고도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건강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 믿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둔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건물이나 우리의 열심과 헌신과 봉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로 하나님과 우리의 영원한 화목 조약을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행하는 만찬 예배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백성이 된 것은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를 많이 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인정을 받고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몸이 찢기시고 자기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요 1:12). 그것이 우리가 만찬을 통해 매주 고백하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 편지하면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권면했습니다(고후 13:5).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2)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둘째로 골로새 교회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은 행함이 뒤따릅니다(약 2:22). 그 대표적인 행함은 바로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 형제자매를 사랑합니다(요일 4:21).

사도 요한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믿음)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요일 3:14). “형제를 사랑함”을 빼고 “믿음”을 넣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만큼 참된 믿음에 반드시 따라오는 행위가 형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일 4:20).

그러면 무엇이 형제 사랑인가요? 어떤 사람은 잘 챙겨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일을 챙겨주고, 시험 볼 때 화이팅 해주고, 관심과 사랑의 문자를 보내주고… 물론 이런 행위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사랑의 행위가 있습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사랑의 행위인데,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는 것, 온유하게 대하는 것,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는 것,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 것,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모든 것을 믿고, 참고, 바라고, 견디는 것 등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행위가 더 어렵습니다. 생일을 챙겨주는 건 쉽지만, 그것에 별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을 참고 온유하게 대하는 건 어렵습니다. 이 어려운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사랑을 통해서만 행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채워집니다”(엡 3:18-19).

우리 교회가 건강하게 열매 맺고 자라나는 교회라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주신 사랑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이 모든 성도를 향해 차별 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래 참음이, 온유함이, 무례하지 않음이, 참고 견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3)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마지막으로 골로새 교회의 소망은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5절을 보시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말미암음이니”라는 표현입니다.

‘말미암았다’는 이 표현은 앞에 나온 골로새 교회의 믿음과 사랑이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이 “소망”에 근거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골로새 교회는 자신들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소망, 그 소망을 바라보고 그 힘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을 두고, 그 힘으로 모든 성도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이 믿음과 사랑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 중반에 이렇게 골로새 성도를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골로새 교회의 소망은 하늘 또는 위에 계신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그 소망이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는 연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건강을 좌우하는 핵심을 발견합니다. 우리 교회가 건강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질문을 발견합니다: 당신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그리스도께 믿음을 둘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땅만 쳐다보고 있는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모든 성도를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히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거하지 않고서는 줄기 떠난 가지처럼 아무런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땅에 있는 것으론 모든 성도를 사랑할 동력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소망을 그리스도께 두고 있는가입니다. 나의 눈이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는가입니다. 내가 이 땅에 잠시 거하다가 이 썩을 육체를 벗고 나면 예수님과 같이 새로운 몸을 입고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그 풍성한 기업을 함께 누릴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가입니다. 

돈, 명예, 가족, 친구, 사람들의 인정, 모두 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죽음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내 영혼이 충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던 이유는 골로새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참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 교회를 보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면, 우리 교회가 건강하게 복음의 열매를 맺고 잘 자라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두고 있는가? 우리는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보이고 있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결론:

여러분 혹시 이매진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세계적인 가수 비틀즈의 멤버인 존 레논이 쓴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평화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로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몇 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모든 사람이 그저 오늘을 위해 서로 나누며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종교가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한 형제처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 봐요.

여러분 존 레논이 어떤 소망을 노래하고 있나요? 하나님이 없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세상을 소망합니다. 천국과 지옥, 종교가 없어도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를 향해 노래하는 내용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도라면 이 노래를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소망을 두어야만 우리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두고 심판하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오직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 믿음을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멋진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거기 계신 내 모든 소망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상상하십시오. 그분께 내 소망을 두십시오. 그 소망이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낳을 것입니다. 그 소망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굳건하게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