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다윗의 삶을 통한 고백 2 – 주를 의지합니다

본문 : 시편 18편 20-29절

설교자 : 최종혁

시 18:20-29 [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3]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25]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시편 18편에는 세 개의 고백, ‘주를 사랑합니다’(1-19)와 ‘주를 의지합니다’(20-29), 그리고 ‘주를 찬양합니다’(30-50)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그 첫 번째로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 경험했던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와 같이 고백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주를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그가 삶을 통해 배운 중요한 진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것으로,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할 때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우리는 그것을 심판과 관련하여 떠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사람,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진노, 심판, 형벌과 같은 말입니다. 그것을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구원과 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다윗의 삶을 생각하면 참 억울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시편 말씀을 통해 그의 고민과 괴로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그러실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의 결론이었고 그렇기에 ‘주를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편에 선 자로서, 주께 순종하는 자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9). 왜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셨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20-24). 다윗은 자신의 순종하는 삶에 대해 ‘의롭고 깨끗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듯하여 오해할 수도 있는 표현들입니다. 그가 자신의 삶이 그러했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는, 자신의 순종의 삶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보응하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을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로 오해하기 쉬운데 많은 규례와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도들도 행위만을 강조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2-16). 이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먼저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마음의 문제’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셔서 택하셨으므로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육신의 할례는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였습니다. 모든 행위 이전에 와야 하는 마음의 동기, 태도였습니다. 다윗은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명령을 순종하는 것만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다윗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의 순종의 삶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21). 다윗은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고 말하고,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도를 지켰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했고,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22). “도”와 “규례”, “율례”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그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를 잘 알았습니다(시 19:7-14).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순종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가나안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그에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편에서도 복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순종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배우고 알며 그에 따르는 것이 순종의 삶입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이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21). 악하게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인데, 악하게 떠나는 것은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이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죄 가운데 거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23).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흠이 없고 죄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온전했다’라고 바꿀 수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나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어떤 것을 눈 앞에 놓고 저울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중요한 자리에 놓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두 주인을 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입니다. 그는 또한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나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일반적인 죄들과 다른, 다윗이 자주 넘어졌던 죄를 말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도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하여 각자의 연약한 면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각자가 미혹되는 부분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죄를 지으면서 사는데 모든 죄를 똑같이 짓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방하는 것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에, 어떤 사람은 성적인 유혹에 약합니다. 저마다 개인의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자신의 연약함, 자주 넘어지는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나에게 유혹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겨냈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혹되지 않는 것을 이겨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순종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자주 넘어지는 죄에서, 당연히 따라갔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종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선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는 분명 죄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했고 살인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윗의 삶 전체적으로 보면 때때로 넘어졌지만 곧 거기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길로 가고자 나아갔던 우리와 같은 성도였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순종의 삶이고 의로운 삶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에 따르는 삶, 하나님을 우선에 두고,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께 돌이키는 삶이 순종의 삶입니다. 다윗의 삶을 돌이켜볼 때 결론은,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대로 갚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24). 적들로부터 구원을 받고 어려운 상황에서 건짐을 받는 것, 그것은 즉각적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원하는 결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이렇게 보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그 안에는 보편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25-26).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행위를 동일한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27)입니다. “곤고한 백성”은 ‘가난한 자’, ‘궁핍한 자’, ‘겸손한 자’입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부족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낮은 자,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말합니다. 반대로 “교만한 눈”은 ‘하나님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곤고한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 ‘정의를 흐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잘 사는 것 같고 형통할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삶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고 다윗이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율법을 말한 뒤에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는 생명과 복을,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사망과 화를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배운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편에도 원망과 울부짖음의 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셔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공의를 논하기에 앞서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우리의 기준을 하나님께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어려움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하나님이 공의로우셨다, 선하셨다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이 지나고 나서 깨닫고 하나님의 공의를 뒤늦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28). 등불을 켜시고 흑암을 밝히신다고 말합니다. 등불이 끄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욥 18:5-6; 21:17).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등불을 켜시고 흑암을 밝히십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29). 다윗은 적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달리며 심지어 담을 뛰어넘는다고 말합니다. 지금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전쟁을 마친 뒤 다윗은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통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제 그분을 확신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멀리 있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지만, 이제 다윗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 하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선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공의로우십니까? 선하시고 신실하십니까? 아마도 마음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공의로우심이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욥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사회의 불의를 보면서 이러한 유대를 내버려두시냐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하시자, 하박국은 ‘어떻게 악한 자를 심판하는 데 더 악한 자를 사용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벨론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의문을 가지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다르고 그분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다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어려운 상황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그 신뢰에 기초해서 내 현재의 태도와 삶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서, 우리의 이해가 더뎌서 오랜 시간 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분명한 말씀을 주셨고 역사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선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공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뢰를 잃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받는 시험을 기쁘게 생각했고 죽음을 앞두면서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잘 알려진 ‘폴리캅’이 순교할 때 했던 말이 유명합니다. ‘지금 예수를 욕하라 그럼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평생을 두고 단 한 번도 나의 왕께서 나를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내가 그 왕을 부인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으신지 저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편에 서 계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라면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선대하고 계십니다. 후하게 대우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