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다윗의 삶을 통한 고백 1 – “주를 사랑합니다”

본문 : 시편 18편 1-19절

설교자 : 최종혁

시 18:1-19 [1]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10]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14]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6]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표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가장 긴 표제입니다(60편과 비교). 사무엘하 22장에는 이것과 매우 비슷한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사무엘하가 기록된 후에 다윗이 회중 예배에 맞게 그것을 수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표제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록한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과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비롯한 많은 원수들로부터 다윗을 건져주실 때’인데 사실 그것은 다윗의 삶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편에는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록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살펴볼 18편은 그의 삶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시입니다.

18편에는 크게 3가지의 고백이 등장합니다. 먼저 1-19절은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이고, 20-29절은 주를 의지한다는 고백이며, 나머지 30-50절 말씀은 주를 찬양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의 첫번째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은 다윗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경험 말입니다. 4-6절에서는 다윗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예수님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전체적으로 볼 때 죽음에 직면해 있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흔히 목동을 생각하면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떠올리지만 다윗은 그런 부류의 목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35). 사자와 곰은 우리가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다윗은 당시 양을 치면서 혼자 사자와 곰 등의 맹수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또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골리앗 사건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다윗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왕이었던 사울이 그를 미워했고 그 때문에 다윗은 늘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다윗을 가까스로 죽이려고 했고 적국인 블레셋에 넘겨 죽이려고도 했으며, 그의 모든 신하와 아들 요나단을 통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삼상 20:3). 그는 죽음에 가까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험난했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전쟁이 이어졌고, 통일 왕국의 왕이 된 이후에도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모든 전쟁을 마치고 이제 편안하게 살 것 같았지만 그의 말년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왕궁에서 나와 도망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죽겠네’라는 말을 하지만, 다윗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4-5). 다윗은 죽음을 사낭꾼으로, 자신을 사냥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노련한 사냥꾼에게 잡혀 꼼짝 못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불의의 창수가 두렵게 했다는 것은 대적들의 불의함이 홍수처럼 몰려 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원수들은 강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17). 그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와서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18). 다윗은 그런 환란 중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6). “여호와”와 “나의 하나님”은 다윗의 시편에서 계속해서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했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 하나님은 다윗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다윗은 4-6절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아뢰고 도움을 구하며 확신 가운데 찬양과 감사를 합니다. 은 익숙한 상황입니다. 어려움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찬양과 감사를 합니다. 이것은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하나의 패턴입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보고 있는 시편 18편은 조금 특별합니다. 7-19절의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셨는지를 상세하게 말합니다.

7-19절은 다윗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시편에는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한데, 바로 ‘하나님의 강림’입니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9)로 시작하는 이 부분은, 매우 장엄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이전에 하나님의 강림하심에 대해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신 이전에 하나님의 내려오심을 먼저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어떠하심(7-15)과 하나님의 하신 일(16-19)을 대조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더욱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7-8).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움직이시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가 요동합니다. 코에서 연기가 나오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르는 것 역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들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9-10).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그룹”이라는 존재는 늘 하나님의 가까이에서 그분을 섬겼던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지만, 언약궤 위에는 그룹의 형상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그룹들 위에서 함께 성전을 떠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내려오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발 아래가 어두컴컴하다는 것은 어둠이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은 어둠으로 그분을 가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도 어둠 가운데서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죽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강림하실 때 땅이 진동하고 산이 움직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하늘을 가르시며 빽빽한 구름 위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런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윗이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특별히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7편에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주의 사랑”,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등의 표현이 출애굽 사건을 기록하며 모세가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 19:16-18).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12-14).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재로 원수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박, 숯불, 번개가 하나님의 무기였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수 10:11).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15). 이것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출 15:7-8).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가장 극명하고 강력하며 놀랍게 나타났던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고, 수십년 광야길을 갔지만 신발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셨고, 무리들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으며 가나안 땅의 백성들과 전쟁하여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현상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그 하나님이 크고 놀랍고 두려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한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온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하신 일을 보겠습니다.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16).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 큰 손을 내미셔서 작은 다윗의 손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서 끌어내셨습니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7). 다윗보다 강한 자들에게서 다윗을 건지셨습니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18). 하나님께서 다윗의 의지가 되셨습니다. 여기서 “의지”라는 단어는 시편 23편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에서의 “막대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다윗의 지지이자 보호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9). 그를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셨던 이유는 그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 흑암이 가려 하나님이 나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욥 22:13-14). 그러나 하나님은 그 흑암 위에서 다윗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다윗을 붙잡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7-15절에서 하나님의 장엄한 나타나심과 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룹을 타고 날아다니시는 하나님, 산이 진동하고 물이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님, 하늘을 가르시고 우박과 숯불, 번개를 보내서 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신 하나님께서 그 크신 손을 내밀어 하신 일이 고작 작은 한 인간, 다윗의 손을 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작은 일이어서 너무나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간인 교황이 작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것을 보며 많은 이들이 감동합니다. 하나님은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다윗은 한 단어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35).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은 달리 말하면 낮아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크게 하려고 스스로 작아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경험한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보면서 고백한 것이 바로 1-3절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1-2). 이 말씀의 비유들을 보면 그동안 다윗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계속된 전쟁과 도망하는 일에서 하나님은 그의 반석과 요새,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 되셨습니다. 다윗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정한 보호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3).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다윗이 확신 가운데 나가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1). 하나님은 다윗의 힘이었습니다. 다윗이 했던 모든 일은 무엇이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가 목동이었을 때 사자와 곰을 죽인 것, 골리앗을 쳐서 이긴 것,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죽지 않고 왕위에 오른 것, 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과 싸우고 주변국들과 싸워 이긴 것,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했지만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이 말씀의 중심입니다. 그 일을 만들어내신 하나님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가 선물만을 좋아한다면 어떨까요?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기뻐했지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더욱 찬양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저 그분이 주신 좋은 것들만을 감사하고 찬양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이지 않은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이곳에만 쓰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나 불쌍한 자에게 보여주시는 자비를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 또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 이 단어의 핵심은 그 둘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의 경험을 통해 깨닫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친밀함과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단어를 ‘헌신’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그 안에는 헌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것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은 그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그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은,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삶을 통해 드린 고백을 생각해봤습니다. 그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놀라운 기적이 있었음을 봤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만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만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 삶을 통해서 홍해를 가르셨던 하나님을 경험했고, 여호수아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도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생각할 수 있었던 역사상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은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해낸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극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알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일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구원받은 분들은 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저 알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적인 구원을 경험했고 우리는 영적인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육체적인 구원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영적인 구원을 경험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온 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