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본문: 시편 42~43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현실의 고난에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하나님을 향한 굳은 믿음으로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런 과정에서 때로는 처한 상황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 놓기도 한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런 것을 성경에서 읽는 것이 우리는 불편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뭔가 영웅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고 하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시편의 기자들도 연약한 자들이었다. 처한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고통과 고민을 내려놓았다. 다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쏟아 놓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매일의 삶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가 있지만 그것과 싸우며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 싸움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고 또한 강력하다. 이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그 감정이 우리를 매몰시킬 때도 있다.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외로움에 빠져 있다. 어떤 사람은 낙심해서 꼼짝하지 않는다. 억울해하고 어떤 사람에 대한 쓴뿌리와 미움이 가득한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감정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감정은 어떤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나오는 즉각적인 반응이다. 운전을 하는데 누가 난폭하게 내 앞에 끼어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순간 화가 날 것이다. 어떤 몰상식한 사람이 차를 이렇게 몰아!라고 하면서 그 차를 뒤쫓아갈지도 모른다. 마침 그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춘 차들 뒤에 멈춰셨다. 그 옆에 차를 세우고 옆 차를 노려본다. 화가 가득한 얼굴로 창문을 내린다. 그런데 옆 차에 위급한 환자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 분노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오히려 그 앞을 막고 있는 차들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경적을 울리며 길을 비켜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 앞에 난폭하게 끼어든 차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분노하지 않았다.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나의 감정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신앙과의 싸움이 된다.

시편 42-43편에서 시편 기자의 이런 내면의 싸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토로하며 동시에 벗어나고자 한다. 그 핵심은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였다. 그래서 이 시의 후렴구는 이렇게 반복된다. – 42:5, 11; 43:5

이 후렴구의 핵심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명령이다. 이것이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이 후렴구를 중심으로 본문은 3 부분으로 나누자.

42:1-5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혼자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42:6-11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모순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43:1-5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불의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어떤 상황에서도’

42편부터 시편의 2권이 시작된다. 1권과 2권의 차이 중 하나는 1권에서는 다윗이 명시된 유일한 저자였지만 2권은 다윗 뿐 아니라 고라 자손, 아삽, 솔로몬이 저자로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편이다. 고라는 출애굽 당시에 모세를 반역하여 일어났다가 심판을 받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반역에 동참하지 않았고 심판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레위 자손으로 그들은 성막과 성전에서 봉사했고 특히 노래 하는 일을 했다(대상 6:31-43; 대하 20:19).

시편의 1권과 비교하여 2권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에 해당되는 단어의 사용이다. 1권에는 ‘여호와’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2권에서는 하나님이 주로 사용된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는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매우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다.

 

I.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혼자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42:1-5)

먼저 이 시편 기자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1-2절)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깊은 곳, 즉 진심으로 이 말을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갈급하고 갈망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 갈증을 해소하려면 물이 필요했다. 물 비슷한 것을 마실 수는 있지만 갈증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약간의 물을 마시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목마른 사슴에게는 풍성한 시냇물이 필요하다.

시편 기자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뵙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갈급함이 그에게 있다. 그는 지금 단순히 영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같은 느낌을 느끼고 있지 않다. 6절을 보면 그는 현재 요단강이 시작되는 지점, 헤르몬 산 줄기에 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수 있는 곳에서 멀리 있었던 것이다. 왜 그가 그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자는 이 시편의 저자를 다윗으로 보고 압살롬을 피해 도망했던 상황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 시편의 저자는 분명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번역된 표현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성소에 나아가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싶었다. 그것을 명령에 따른 의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것이 영적인 갈급함으로 이어졌다.

그런 그를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조롱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3절)

이들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이다. 이들이 볼 때 시편 기자가 믿는 하나님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찾아도 만나주지 않는 신, 위로가 필요할 때 돕지 않는 신이었던 것이다.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없는 것과 다름 없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시편 기자를 조롱했던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너네 아빠 어디있어?라며 놀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조롱의 말을 들어도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는 것 뿐이었다. 그는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단순히 그렇게 많이 울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먹지를 못하고 계속 그렇게 울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와중에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과거의 즐거운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절)

참으로 행복한 기억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러 하나님께 나아갔었다. 기쁨과 감사가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현재의 상황의 비참함을 더 생각나게 한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 내 안에 내 영혼을 쏟아 붓는다. 마음이 무너졌다고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차라리 과거의 즐거움이 없었다면 현재가 그리 비참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즐겁게 예배했던 추억은 지금 오히려 그의 마음을 무너지게 만든다.

시편 기자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의 주변에 그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갔던 자들이 없다. 오히려 그의 괴로움을 즐거워하며 그가 믿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이 그와 함께 있다. 시편 기자가 처한 외로움은 충분히 괴로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내가 느끼는 것, 내 주변의 사람이 하는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에 대해 “살아 계시는 하나님”(2절)이라고 표현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단순히 존재의 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적 역사하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5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절)

먼저, 시편 기자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다른 누군가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질문인다. 너는 왜 낙심하고 왜 불안하고 있느냐? 자신의 감정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묻는다. 낙심하고 불안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주변에서 그를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함께 교제할 사람도 없다. 오직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 뿐이다. 종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 뿐이다.

낙심하고 불안할 이유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그러니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다.

이것이 상황에 대한 다른 해석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상황을 보면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포함하고 상황을 보면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내가 현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다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냐? 혼자인 것 같은 상황은 있다. 하지만 정말 혼자인 것은 아니다. 혼자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도우실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찬송할 수 있을 것이다.

 

II.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모순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42:6-11)

6절에서 시편 기자는 다시 자기 영혼이 낙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좋아진 것은 그가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6절)

그는 요단 땅, 헤르몬, 미살산을 언급한다. 미살산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헤르몬산의 낮은 봉우리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요단 강의 발원지에 있다. 7절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물이 풍부한 곳에 있다. 그런 자연을 보며 자연스럽게 1절에서 시냇물을 찾는 사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낙심해 있다. 자연을 바라보며, 특별히 강력한 폭포와 물결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이 그런 폭풍우 속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7절)

이것이 낙심한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거대한 물에 휩쓸리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그가 처한 상황이 그를 압도하는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주의 폭포 소리라고 하고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그에게 언약에 기초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고 계심을 알았다. 그래서 8절에서는 그동안 사용한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를 사용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절)

변하지 않는 여호와께서 그를 돌보고 계시다. 여전히 그분의 찬송이 나에게 있다.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9절)

하나님을 생각해 보니, 그가 처한 상황이 더욱 모순처럼 느껴진다. 내가 의지할 수 있고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나는 원수의 압제 때문에 슬퍼할 수 밖에 없는가?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10절)

여전히 내 대적은 나를 비방하며 동일한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 말이 내 뼈를 찌르는 칼과 같다. 그러니 나도 하나님께 이렇게 묻는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9절)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그 하나님이 나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여호와이신데, 나에게 이런 원수들의 압제가 있는 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에 대한 유일한 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 그러니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서 다시 우리는 후렴을 만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절)

모순이 되는 것 같은 상황도 내가 볼 때 그런 것뿐이다.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주관하시고 나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분이시고 나의 반석이시라면, 그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다. 기다릴 수 있다. 그분이 내가 느끼는 모든 모순의 합리적인 설명이 되신다. 욥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에게 설명해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합리적인 설명일 뿐이다.

모순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도우실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찬송할 수 있을 것이다.

 

III.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불의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43:1-5)

이 시에서 시편 기자의 시선은 조금씩 자신에게서 주변으로 옮겨간다. 처음 5절까지는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다가 6절부터는 자기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43편에 와서는 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호소는 줄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그에 따르는 기도가 더 많아진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절)

여기서 시편 기자는 불의한 일을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변호사이며 동시에 재판관이 되어 달라고 구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가장 잘 알고 계시고 공의롭게 재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절은 42:9와 매우 유사하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2절)

42:9와 유사하지만 좀 더 확신에 차 있다. 시편 기자는 여전히 왜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는지 왜 원수들의 억압으로 슬퍼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묻지만 그 기초에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두고 있다. 그래서 기도는 회복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절)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제 시편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그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으로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길 원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그 회복을 구한다. 하나님의 빛과 진리로 인도하심을 구한다. 어두움이 그를 덮고 있었고 거짓이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불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로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실 것을 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다.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편기자의 목적이 아니다. 그는 거룩한 산으로 갈 것이고 주께서 계시는 곳, 즉 성전으로 갈것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절)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후렴을 찬양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이해는 달라졌고 따라서 감정도 달라졌다. 외롭고 모순되고 불의한 상황 같아 보이는 것은 동일하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에 진리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힘이 되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다.

 

도전

시편 기자는 우리와는 다른 시대를 살았다. 그가 처했던 상황은 우리와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시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도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무도 내 편이 아닌 것 같을 때가 있다. 하나님도 지금 내 상황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지금 상황이 모순되게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되면 안되는 것 아닐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안될 때가 있다. 불의하게 느껴지는 상황도 있다. 내가 불의를 당할 때도 있고 불의한 일을 보게 될 때도 있다.

이럴 때마다 사람들은 묻는다.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우리 속에서도 같은 질문이 올라온다. 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럴 때 그 질문에 귀기울이지 말고 이렇게 혼잣말을 해보기 바란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다른 것에서 소망을 찾지 말라. 괴로울 때 우리는 다른 것에서 소망을 찾으려고 할 때가 있다. 물질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궁극적인 소망을 찾지 말라. 일에 몰두하거나 취미 생활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을 열심히 하고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때로 이런 경향은 실제 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약물이나 게임, 도박 등에 중독되는 이유 중 하나가 처음부터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자살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분께서 나타나 도우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