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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내 영혼의 탄식
본 문: 로마서 8장 22-23절
설교자: 조 성 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며 칠 전 뉴스를 들으니 우리나라에서 매일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나름대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사람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탄식하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들이 먹이를 먹을 때 일부는 망을 보고 있습니다. 야생동물들 역시 한 시도 편안히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을 포함해서 구원받은 우리까지 이 땅에서의 진정한 쉼이란 없습니다.

피조물들의 탄식
“피 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22)” 우리가 보기에 자연스러운 것들도 그 내막을 보면 저마다 질병, 투쟁,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다시 말하면 피조물들도 자유롭게 되길, 저주 가운데서 해방되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불신 인생들의 탄식
불 신자들도 탄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유명한 대학 병원에는 많은 환자가 줄 서 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우리는 기대하기를 시간이 지나면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 자체가 고생입니다. 우리 눈이 보아도 만족함이, 가져도 만족함이 없으니 늘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내 집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작은 평수 아파트에 들어가면 행복해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족함을 느끼고 평수를 넓힙니다. 그러기 위해 대출을 받고 그것을 갚아나가면서 고생 고생하다보면 죽을 날이 다 되어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동 물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들개는 먹이가 지칠 때까지 쫓아갑니다. 쫓기는 사슴이 도망가다가 지쳐 결국 악어가 우글거리는 물에 뛰어듭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처한 환경이 그러합니다. 먹고 살기 바쁘고 육체의 소욕 때문에 만족이 없어 고통스럽게 살다가 결국 죽어 지옥으로 갑니다. 사슴이 들개를 피하다가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에게 편히 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들의 탄식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23)” 구원받은 자의 탄식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느끼는 탄식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부인해도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과 함께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상황에 부딛혀 보니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탄식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 기도하러 가실 때 제자들에게 깨어 기다리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마 26:38).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목숨을 내놓더라도 주님을 시인하고 싶고 어떻게 하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으면서 원수를 사랑하리라 다짐하지만, 하루를 보내면서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베드로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 고넬료에게 갔지만 유대인들 앞에서 부끄러워 숨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갈 2:12-1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그 리스도인이라면 선을 행하고자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싶고 영혼에게 전도하고 싶으며 성도를 격려하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성령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소욕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해서 괴롭거나 예배에 참여하지 못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주님 다음으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도 바울이 이런 고통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오죽할까요. 주님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작은 것에도 괴로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 님을 믿는 자들의 특징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육체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편과 같습니다.

우리의 안식

이 러한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이 육체를 벗어날 때 끝납니다. 이 육체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탄식은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먹이면 먹일수록 더 깊은 탄식 가운데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탄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상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양심이 마비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하였을 때 에스라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앙의 양심이 마비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 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우리의 안식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평안한 삶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성령이 있기 때문에 탄식은 계속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가치 있는 탄식이요, 싸울 만한 싸움입니다. 결국 승리로 끝날 싸움입니다.

결론

여 러분에게는 이런 싸움과 탄식이 있습니까? 원하는 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해, 성도를 더 섬기지 못해, 하늘나라를 확장하지 못해 탄식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선한 싸움이요, 경건한 탄식입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하나님 나라에서 참다운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탄식하지 않을 새로운 몸을 입고 영원토록 참다운 만족과 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