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 눈에 좋사오니

본문: 사사기 14장 1절 ~ 4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것들을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일에 대해서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 생각해봐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했습니다. 간단한 예로 지금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것만 생각해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이 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정을 하셨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더운 날씨에 집에서 쉴 수 있는데 왜 고생하면서 여기에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이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 선택과 결정의 근거가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고 그 기준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기준이 올바른 가치에 따라 바로 잡혀있지 않다면, 계속해서 나는 안 좋은 결정을 하고 그릇된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계속 꼬이고 주님 원하시는 모습과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벽에 걸어둔 시계가 잘못된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면 어떨까요? 그 시간을 보고 그에 맞춰서 행동하면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 약속에 늦거나 예상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확한 기준에 따라 다시 시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준도 그러합니다. 살다보면 주님 안에서 세웠던 기준이 조금씩 틀어질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에 조금씩 물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정확한 기준에 따라 맞추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시 기준을 정렬하고 제대로 맞추었을 때 올바른 결정이 나오고 올바른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삼손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삼손이 어떤 일을 판단하고 결정해서 행동으로 옮기는데 기준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눈에 좋은 것입니다. 삼손은 눈에 보이대로 자기 눈에 좋은 것을 좇아 삽니다. 그래서 삼손의 삶을 요약한다면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좋사오니

삼손에게는 좌우명과 같은 말입니다.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 그것이 삼손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인생은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삼손은 시작부터 남달랐고 특별했습니다. 먼저 천사가 나타나 삼손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고 삼손은 잘 자랐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상황에서 삼손의 출생은 큰 기대를 품게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 특별한 삼손을 통해 어떤 일을 행하실까?

그런 기대 속에서 드디어 성인이 된 삼손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어린 시절을 다 생략하고 어른이 되어 등장한 삼손은 등장과 동시에 자신의 어떠함을 다 보여줍니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대충 삼손의 이야기의 줄거리가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삼손이 어떤 사람인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 삼손! 이런 사람이구나!’ 그리고 우리는 삼손의 첫 모습에서 그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서 그 문제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의 결혼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1-2)

삼손이 딤나에 내려갑니다. 딤나는 삼손이 태어난 소라에서 서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이 딤나는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경계에 있었고 단 지파에게 주어진 성읍입니다. 딤나는 단 지파 성읍이었지만 지금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성읍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고 있는 이 딤나에 내려갔던 것입니다. 왜 그곳에 갔는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손은 그곳에 가서 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흔히 말하는 첫눈에 반한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특별히 ‘보았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보다’는 동사가 반복되는 것은 삼손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본 것에 따라, 딤나에서 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삼손의 이 결정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여자가 블레셋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삼손은 하나에 꽂히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삼손에게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의지밖에 없습니다. 삼손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삼손의 부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지금까지 삼손이 어떤 아들로 커왔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지만, 삼손의 이 부탁은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삼손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너도 이제 성인이니 너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마! 너의 인생이니 너의 뜻대로 하거라!‘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기준에서 벗어난 잘못된 선택이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삼손에게 말합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3) 삼손은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3)

삼손의 말입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오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보는 이 장면은 십대 자녀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반항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는 이방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그 부모에게 고집을 피우며 떼를 쓰고 있는 장면입니다. 삼손의 말은 철부지 십대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제 정신이 아닐 때 하는 말 같습니다.

삼손이 말하는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라는 말은 원래 의미대로 하면 ‘내 눈에 좋다’라는 표현입니다. 이와 똑같은 말이 7절에도 나오는데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하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도 3절과 같은 ‘내 눈에 좋다’라는 말입니다. 삼손이 반복해서 하는 말입니다. 내 눈에 좋사오니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손이 하는 이 말이 사사기의 핵심이 되는 말씀과 같기 때문입니다. 핵심이 되는 말씀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다는 말이 이와 같은 말입니다. 내 눈에 좋은 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삼손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삼손의 모습에서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좇아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이스라엘처럼 삼손도 자기가 보고 좋은 것,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결정합니다. 내가 판단의 기준이 되고 내가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딤나에서 본 블레셋 여자가 자기 눈에 좋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그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눈에 좋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삼손의 근원적인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럼 자기 눈에 좋은 대로 결정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내 눈에 좋은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첫째로, 내 눈에 좋은 것이 말씀과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 결혼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반하는 일입니다. 신명기 7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의 사람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인종을 차별하거나 단순히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키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거짓 신들, 우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명령입니다.

부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친밀하고 직접적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정말 중요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우상을 섬긴다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내 눈에 좋아 보인다 하더라도, 아무리 예쁘고 잘 생기고 아무리 성격이 좋고 매너가 좋다 하더라도, 아무리 애교가 넘치고 매력적이고 좋은 직업에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다른 모든 사람이 부러워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내 눈에 좋아 보이더라도 하나님 눈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에는 통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기준에는 미달이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과 맞지 않는 것을 내 눈에 좋아 보이기 때문에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에 따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절대로 소홀히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기준입니다. 내 눈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기준입니다.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맞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죄 된 본성을 가진 우리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내 눈에 좋은 것을 좇아 살면 안 됩니다. 세상은 우리의 눈을 자극하며 우리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쉼 없는 수고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첨단 매체와 더욱더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들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더 예쁘게 꾸미고, 더 도발적으로 포장하고, 더 노골적으로 유혹합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들 정말 조심하시고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 죄악된 것들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은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으로 예방주사를 맞을 때 가능합니다. 말씀에서 멀어지면, 그 가르침과 진리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버틸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을 혼자두지 마십시오. 힘들더라도 피곤하더라도 내 몸이 원하는 대로 그냥 두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어떻게든 내 몸을 이끌어 성도와의 교제의 자리에 두십시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내 몸을 끌고 나오십시오. 그렇게 해야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내 눈에 좋은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둘째로, 내 눈에 좋은 것이 사명과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왜 딤나에 내려갔을까요? 삼손이 그의 사명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이스라엘 지역이지만 지금 블레셋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는 딤나, 이 딤나는 자신이 속한 단 지파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것을 알고, 그 땅을 구하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삼손은 그런 생각을 일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삼손은 단지 그곳에 살고 있는 블레셋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자기 눈에 좋은 것을 좇다가 자기 존재의 이유와 사명을 잊고 그것에 반하는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사명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의 삶에서 한 번도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충분히 더 생각해야 했고,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을 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는 삼손은 본능에 따라 사는 수컷에 불과합니다. 남자라고 부르기보다 수컷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립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는 삼손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습니까?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13:5)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삼손을 택하셨는데 그런데 삼손은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고 블레셋과 한 가족이 되려고 합니다.

만약에 불을 끄기 위해 소방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밤마다 불장난을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불장난할 때 보는 그 불꽃이 자기 눈에 너무 좋아 보인다고 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이 나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두신 이유를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내 눈에 좋은 것을 좇아서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우리도 그와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명을 잊고 본능에 따라 사는 삼손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왜 여러분을 유평교회로 부르셨고, 왜 한 지체로 이곳에서 섬기게 하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 나에게 맡기신 일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 좋은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생각하고 그것에 합당한 일을 하고 그 뜻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사명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 내 눈에 들어올 때, 그 일이 좋아 보일 때, 그런 유혹이 있을 때, 그 때는 차라리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에 그 유혹을 거절하시기 바랍니다. 나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내 눈에 좋은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셋째로, 내 눈에 좋은 것이 충고와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충고와 조언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충고를 통해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어떻게 합니까? 돌이키지 않습니다. 수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에 좋은 것을 결정하고 굽히지 않습니다. 끝까지 고집합니다. 부모의 충고도 삼손의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막무가내입니다. ‘내 눈에 좋사오니! 내 뜻대로 해주세요! 내 눈에 좋사오니! 그 여자와 결혼하게 해주세요!’

당시 자녀를 결혼시키는 것은 부모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손도 그의 아버지에게 결혼을 위해 떼를 썼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손에게는 부모의 권위도 부모의 충고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혼에 대한 부모의 충고를 무시합니다. 자기 눈에 좋은 것을 위해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충고를 들을 때 삼손처럼 할 수 있습니다. 내 고집대로 하면서 충고를 그냥 무시하는 겁니다. 내 눈에 좋사오니, 내 눈에 좋은 것만을 보고 다른 것을 보지 않고 그냥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충고를 들을 때 얼마나 잘 받아들이십니까? 나이가 들수록 충고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데, 어른이 될수록 그렇게 안 됩니다. 나의 생각이 생기고, 나의 기준이 생기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괜히 충고했다가 서로의 관계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흔히 나오는 반응이 어떤 걸까요?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하냐?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하세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충고를 비꼬며 무시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에 대해서, 얼마나 성숙했는지, 얼마나 겸손한지, 얼마나 인격적으로 자랐는지 점검하기 원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의 충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들수록 여러분에게 충고하는 사람은 더 적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집이 세질수록 여러분에게 충고하는 사람은 더 적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나의 잘못을 지적하며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주님 안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충고를 받아들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지혜롭게 충고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일은 지혜롭게 잘 해낸다면 여러분은 그만큼 성숙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그 말에 너무 휘둘리지도 말고, 그 말에 너무 상처받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사이에 두고 걸러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듣고 은혜로 소화시킨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삼손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삼손은 충고를 무시했고, 사명을 잊었으며, 말씀에 반하는 결정을 합니다. 결국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삼손의 문제입니다. 기준이 내가 되어서 내 눈에 좋은 대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이런 삼손을 그냥 두어도 될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4) 4절을 보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을 치려는 목적이었고 이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이 일을 반대했던 삼손의 부모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 잘못된 번역을 수정했을 때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틈을 타서 ”라는 말씀에서 삼손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에는 삼손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원래는 ‘그가 틈을 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손이라고 한 것은 번역자가 잘못 판단한 것이고, 올바른 번역은 ‘하나님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비록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며 하나님 말씀과 사명과는 관계없이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삼손을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기준을 벗어나고 자주 넘어지고 내 눈에 좋은 것을 좇아 행할 때도 많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나의 실수와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이루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오늘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삶에서 결정의 순간에 선택의 순간에 행동할 때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