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본문: 디모데후서 2장 8~13절

설교자: 이병권

 

‘참을 인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제는 정말 옛말이 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된다.’라고 말합니다. 참아봐야 득이 되는 건 없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한다는 것입니다. 한자로 참을 인(忍)은 마음 심(心)자 위에 칼날 인(刃)자가 있습니다. 참는 것은 심장에 칼을 대는듯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할까요? 특별히 믿는 자로서 우리가 겪는 갈등은 더 큽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갈 때 참아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쉽고 편한 것을 두고 힘들고 어려운 것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의 신앙으로 인해, 나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부당하게 고난당할 때 그래도 참아야 하는 걸까요?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운 거라고 말씀합니다(벧전2:19). 그리고 베드로는 한 번 더 강조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참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평가하고 무시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참는 것에 대해서 아름다운 거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참는 것은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고 호구처럼 무조건 당하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충분히 합당한 태도와 방법으로 우리의 상황을 알릴 수 있고 적절하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기에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사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고난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고난에 대해서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는 것은 어떤 경우든 무작정 참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파서 치료가 필요한데 그냥 참고, 불의를 보고도 그냥 참고,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수고할 수 있는데 그냥 참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참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인내가 아니라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고 게으른 것입니다. 우리가 참아야 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어려움을 감수하고 인내로써 수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야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아라.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고난을 감당하고 선수로서 규칙대로 행하며 농부로서 계속해서 수고 하여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주님과 바울 자신에 대해서 말하며 디모데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10절을 중심구절로 보고 그 맥락 안에서 “참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본문의 단락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자신이 겪는 고난, 그 모든 것을 참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사도 바울을 초대하는 겁니다. 바울이 참석했습니다. 바울이 우리 앞에 있고 직접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참을 수 있었냐고? 그 비결을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렇게 대답을 시작합니다. 내가 참을 수 있는 건그러면서 바울이 세 가지로 대답합니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내가 참을 수 있는 건첫째로, 주님 때문입니다.

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명령, 이 명령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너무 당연한 일을 명령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가 주님께 있는데,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는데, 그런데 또다시 주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의미 없는 명령 아닐까요? 이 명령은 마치 엄마들이 자녀에게 늘 하는 잔소리처럼 ‘차조심해라, 일찍 들어와라, 밥 잘 챙겨 입어라’, 하는 것처럼 그런 노파심에서 하는 명령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잊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생각보다 주님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보다 많이 주님을 잊고 삽니다. 사소한 일에 빠져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매여서 주님을 잊어버리고 내 욕심에 사로잡혀서 주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앞세우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의도적으로 주님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그저 잔잔한 인생 가운데 반복되는 일상의 편안함 속에서 주님을 잊고 있다가 식사 기도할 때 잠깐 생각하고 끝납니다. 그리고 덮어두었다가 주일에 다시 꺼내서 잠깐 생각하고 그렇게 삽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주님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참아야 하는 일을 생겼을 때 참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특별히 주님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다윗의 씨”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씨,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인성, 사람 되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신성, 하나님 되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어울리는 것은 왕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셨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깊고 험난한 길을 가셨습니다. 그 모든 고난을 몸소 경험하셨고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본을 좇아 따라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따라 가는 동안 고생하며 고난 받을 때도 있지만, 주님이 먼저 가신 길이기에 감사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먼저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고난의 길 끝에서 죽으셨고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신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고난을 참는 것이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기억함으로 주님처럼 참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기억하라는 본문의 명령을 다시 말하면 이러합니다.
‘주님을 따를 때 따라오는 고난을 피하고 싶다면, 그런 유혹이 생긴다면 무엇보다 먼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참을 수 있습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내가 참을 수 있는 건둘째로, 사명 때문입니다.

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왜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9) 바울은 복음을 위해 고난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을 지키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고난은 당연합니다. 또한 그런 바울이 모든 고난을 참는 것도 당연합니다. 바울은 사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습니다(9). 여기 죄인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두 곳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하고 또 다른 곳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행악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냥 죄인이 아니라 정말 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고 무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으로 인해 그런 악한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난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사슬에 매이는 고통스러운 일을 참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의 현실은 어둡지만, 나는 지금 고난 가운데 있고 어려운 상황에서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하지만 내게 주어진 사명은 주님께서 그 뜻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난 받고 있지만, 그래서 감옥에 갇혀있고 사슬에 매여 있지만,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실망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이 받은 사명이 그저 개인적인 사업이라면 자기 유익을 위한 일이고 자신의 어떠함에 달린 일이라면,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사업은 끝이고 그는 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은 사명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이고 주님이 함께 하는 일이며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주님이 그 뜻대로 일을 이루십니다. 비록 지금의 고난이 심각하고 바울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님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도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확장되고 주님의 영광을 계속 드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과정에서 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명은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명은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명의 가치를 알 때 우리는 그 가치 있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참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택함 받은 자들이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고 그러한 이유로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고난을 참는 것으로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바뀐다면 어떨까요? 내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선을 행할 때, 내가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수고할 때, 주님은 나를 사용하셔서 누군가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면 좀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바울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주님이 부르신 곳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한 팀이 되어서 각자의 위치에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전방에서 골을 넣은 사람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수비를 하면서 팀의 승리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도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사명이든 주님께서 맡기신 일은 주님의 일이라는 것과 그 일의 가치를 알고 참으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 일의 가치를 기억한다면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내가 참을 수 있는 건셋째로, 약속 때문입니다.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 이 말이여우리가 디모데전서 말씀에서 종종 봤었던 말입니다. 이제 중요한 진리를 말하니까 마음을 준비하고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미쁜 말은 목회서신에 다섯 번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바울이 남긴 마지막 미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쁜 말 중에 유일하게 찬송시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마 당시에 믿는 자들이 찬송처럼 부르며 암송했을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이 찬송을 부르며 말씀을 되새기고 또 생각합니다. 극심한 핍박을 당할 때, 감옥에서 굶주림과 외로움에 떨고 있을 때, 화형을 앞두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잠잠히 기다리고 있을 때, 십자가에 위에서 극심한 고통으로 서서히 죽어갈 때, 사나운 맹수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 때, 그럴 때 이 찬송을 읊조립니다. 조용히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이 미쁜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미쁘다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고 신뢰할 수 있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를 제대로 살게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품게 합니다. 어떤 역경이나 핍박에서도 참을 수 있게 합니다. 인내하며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기에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참고 인내하면 주께서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 때 우리도 그 통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를 주님께서 보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주님께서도 부인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3)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 혹 말로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삶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 주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자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말뿐인 자들, 주님께서는 그 날에 그런 자들을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부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에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고난은 사람의 믿음이 진실한지 드러내는 시험과도 같습니다. 생명과 영광에 이르는 길은 고난이기에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생명도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미쁜 약속의 말씀을 신뢰한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을 하신 분이 주님이시고 주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주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약속을 취소할 수 없으며 약속을 어길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하시고 오직 그분의 온전한 성품과 뜻에 맞는 일만을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하실 수 없습니다. 그 성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제까지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을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이 있기에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주님 때문입니다. 사명 때문입니다.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참을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도 주님 때문에, 사명 때문에, 약속 때문에 참으시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참아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얼마나 그럴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믿는 자로서 받는 고난이 많은 분도 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적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상황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던 당시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 보다는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가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남편이, 아내가 잘못했을 때, 연약함을 보였을 때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자녀가 속을 썩일 때, 말 안 듣고 힘들게 할 때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 한 말로 인해 마음 꽁해있는 것보다 참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화를 내며 다투기보다 용납하고 참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주님 때문에, 사명 때문에, 약속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수고함으로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을 겪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말씀을 떠올리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은 유익합니다. 때로는 찬양이 그런 역할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찬양이 주는 장점입니다. 멜로디를 맞춰 우리가 익숙하게 따라 부르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참을 일이 생겼을 때, 참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이렇게 하십시오. 이 말씀을 노래처럼 되새기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