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본문 : 사도행전 7장 1절~60절

설교자 : 조 정 의

 

교회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에 따라 믿고 있는 바를 이성과 논리로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변증이라고 하는데(어폴로기아), 기독교 변증론은 오순절에 시작된 교회가 여러 가지 비방과 박해에 대응하면서 시작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가장 길고 사도가 아닌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기독교 변증이 바로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변증이다.

스데반은 하나님, 모세, 성전, 율법을 모독했다는 거짓 증인의 고 발을 당했다(행 6:11, 14). 그리고 온갖 거짓 증언과 고발에 대 한 그의 변호가 2-53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스데반의 설교가 ‘풋내기의 설교’로 ‘길고 장황하다’ 고 비판하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가 기록한 이 설교는 결코 지루하거나 개연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미 율법에 정통하고 이스라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청중에게 한 편의 역사 수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얼굴이 천사 와 같았던 스데반은 이 설교를 통해 자신에 대한 거짓 고발에 맞 서 완벽하게 교회를 변호했고 동시에 공회를 구성하고 있던 유 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음을 확실히 밝혔다. 그리스도 편에 서는 교회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성경과 성경의 역사를 통해 변증했다.

스데반의 설교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전달한 강의나 교회 예배 시간 말씀을 청종하는 이들 앞에서 전파한 설교가 아니다. 어떻게 든 말꼬투리를 잡아 고발하고 죽이려는 기득권들 앞에서 목숨 걸고 한 최후의 변론이었다.

우리는 스데반의 변증을 통해 교회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확 신을 세 가지 측면에서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교회가 힘써야 할 변증의 원칙을 배울 수 있다.

1.     말씀을 존중하는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했다’는 고발을 당했다. 그에 대 한 스데반의 변론은 ‘교회는 하나님과 모세를 존중한다’였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2절).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솔로몬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주권적으로 움직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의 땅으로 옮기셨다(4절). 아직 나지 않은 아브라함의 자식과 그 후손에게 약속과 그 증표(할례)를 주셨다(5-8 절). 약속대로 요셉을 통해 애굽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옮기셨으며(9-17절), 모세를 일으켜 그곳에서 나와 다시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셨다(18-38절).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든지 약속의 땅에 있든지 장막과 성전을 통해 그들과 함께 하 셨다(44-50절).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역사의 주 권자로서 성경이 계시하는 그대로 존중했다.

모세에 대한 스데반의 평가를 보라.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였다(20절).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 과 하는 일들이 능하”였다(22절).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던 사 람이다(36절). 스데반은 이렇게 말한다.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 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38절). 스데반은 경이 말하는 그대로 모세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

52절에 이르는 스데반의 변증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적이다. 성 경의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진술하고 있으며 직접, 간접 인용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성경을 잘알고 있던 공회 관리들이 절대 꼬투리 잡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오늘날 청중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유신론자가 아니라 무신론자이다. 대상은 다르지만 교회가 하나님 편에 서 있음을 변증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고는 교회는 절대로 자기변호에 성공할 수 없다. 화려한 언변과 강력한 논거로 사람들을 납득시키거나 동정심을 사는 데 성공할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참 교회는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그분의 말씀에 반하는 논리를 펼 수 없다.

성경의 가르침에 서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 편에 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기 위해 먼저 성경을 잘알아야 한다. 믿는 것을 성경대로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성령 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이 성령의 지혜 곧 말씀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 편에 서 있음을 가장 확실하게 변증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가르치며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다. 당신은 말씀에 서 있는가? 말씀대로 사는가?

2.     하나님의 성전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스데반의 죄목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나사렛 예수가 성 전을 헐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예수가 모세 가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칠 것이라’고 가르쳤다는 것이었다(행 6:14). 둘 다 심각한 신성모독 죄에 해당하는 것이며, 같은 공회에서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리기 위해 그들이 사용했던 거짓 증언과 같은 내용이다(마 26:59-61).

하지만 스데반은 그의 변증 설교에서 ‘나사렛 예수는 거룩한 성 전을 헐지 않고 오히려 세우신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교에서 성 막과 성전 이야기는 거의 끝에만 나오지만, 처음부터 스데반이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이라 소개하는 부분은 큰 의미가 있다(2 절). 성막과 성전이 거룩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하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설명한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은 장소의 제 한없이 임재 했다. 아브라함이 있던 메소보다미아부터 하란, 지 금 공회 관료가 모인 예루살렘이 속한 이스라엘 땅에 함께 하셨 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과 함께하셨고, 모세에게 애굽, 미디안,

그리고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 내셨다(31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발의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그곳은 거룩한 땅 이기 때문이다(32절). 모세에게 말씀하신 양식대로 장막을 만들 어 거기 임재하신 하나님은(44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에 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고(36절),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을 밟으셨고(45절),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처 소, 하나님의 집 곧 성전에 임재하셨다(46-7절).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장소의 제한 없이 언제나 그의 백성에게 영 광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스데반은 결론적으로 48-50절 말씀을 인용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 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누구와 함께하시는가? 그 영광을 누구를 통해 드러내고 계시는가? 스데반이 암시한 대답은 바로 그리스 도이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다(요 1:14). 하나님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지 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나 타내셨다(요 1:18).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옛적에 선 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 에게 말씀하셨으니…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 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 영으로 함께 하는 백성,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 약속하신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한다. 하나님 편에 서 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다(고전 3:16). 에베소 교회 에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말했다(엡 2:22).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임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일오후 성경공부를 통해 [모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배웠 다. 교회는 왜 모여야 하는가? 왜 초대교회는 성전뿐 아니라 집 마다 모이기를 힘썼는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경험하기 위 해서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사랑의 교제, 찬송과 만찬 예배 등 은 혜의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곧 성전이다.

스데반을 포함한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성전이라는 건물에 제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들 이 모여서 행하는 모든 일들,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고 따르고 그 이름으로 행하는 사랑과 섬김의 일을 절대 멈추지 않았다.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 특별 한 시기에 당신이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몸으로 삼으신 교회로서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3.     예수님을 믿는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율법에 대한 고발에 스데반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 침이 되셨다’고 변증했다.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 성에게 준 사람은 모세였다(38절). 그런데 모세가 한 말이 있다.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37 절).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 사람을 스데반은 의인이라 불렀고, 그 의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52절).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고치거나 폐하러 오지 않으셨다. 그 분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셨다(마 5:17). 모세가 전해준 율법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죄인을 대신하여 율법이 요 구하는 죗값, 생명을 내어 주기 위해 오신 의인이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했다(롬 10:4).

스데반의 변증 설교의 절정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바로 그 의인을 공회 모인 사람들이 잡아 주었고 살인했다는 것이다(52절).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반전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50절까지 청중이 듣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중간중간 요셉을 시기하 여 애굽에 팔았던 조상들(9절), 하나님이 세운 관리와 재판장 모 세를 거부한 조상들(25절),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마 음을 돌려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심지어 자식을 바치는 몰록 신 과 애굽 신 레판(토성, 농업)을 섬겼던 조상들(39-43절)을 언급 할 때도 양심의 가책이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과 의인들의 비석을 세우고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라고 말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마 23:29-30).

그런데 51절에 구약시대 조상들이 여러 차례 선지자들을 통해 들었던 하나님의 그 책망 소리가 그들에게 똑같이 울려 퍼졌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 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 도다”(51-53절).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란 사실을 알았다. 옛 조상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면, 자 신들은 그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예언해 온 의인 곧 메시아를 죽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54절 ‘마음에 찔려’는 ‘톱으로 켜다’의 의 미를 갖는데, 그만큼 예리한 성령의 검이 그들 양심을 찔렀고 그 에 대한 반응은 안타깝게도 회개가 아니라 분노였다. 그들은 이를 갈고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 다(54, 57절). 그리고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다(58절).

한편 하나님 편에 서 있던 스데반의 최후를 보라. 그는 그리스도를 많이 닮았다. 죽음 직전 그는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 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55절). 산헤드린 재판소 70여명의 권력자가 모두 스데반 유죄로 몰고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지극히 크 신 이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일어서서 친히 그의 변호를 하 신다. ‘나는 네 편이다. 너는 나와 내 아버지 편에 서 있다.’

스데반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신뢰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라는 고백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라는 주님을 참 많이 닮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주님 곁으로 떠났다.

터튤리안의 말처럼 교회는 순교자의 씨앗을 통해 열매를 맺는 다. 스데반의 순교로 빌립은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 여행을 떠났 고(8장), 베드로를 통해 복음이 이방인과 온 유대 지역에 퍼졌으며, 수리아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다(9-12장).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 성령을 통해 파송된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에 심겨진 복 음의 씨앗이 땅끝 로마까지 열매 맺게 된다(13-28장).

수요일마다 우리가 듣는 디모데후서는 그가 로마 감옥에서 처형 받기 직전에 디모데에게 쓴 편지이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이다(딤후 4:22).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약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말씀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 받으시고 열매 맺게 하 시기를 간절히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