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분하다

본문 : 사도행전 8장 1절~25절

설교자 : 조 정 의

 

충분하다는 말은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여 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다 (시 23:1). 사도 바울 역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말했다(고후 3:5). 당신은 어떤가? 그리스도로 충 분한가?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가?

본문엔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았던 인물이 나온다. 가장 먼저 사울, 그리고 더욱 중점적으로 살펴볼 마술사 시몬이다. 그리스도로 충분했던 인물도 나온다. 스데반을 장사한 경건한 사람들, 흩어져 복음을 전한 사람들(대표: 빌립), 그리고 사도들이다.

누가는 매우 중요한 교회 역사의 장면을 기록했다. 예루살렘에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교회가 박해로 인해 예수님 말씀처럼(행 1:8)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된 역사이다. 우리는 이 역사의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로 충분했던 사람과 충분하지 않았던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기 원한다. 이를 통해 결론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진리를 배우기 원한다.

오늘 말씀에서 당신은 세 인물과 그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디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지 잘 생각해보고 가장 좋은 것을 택하길 바란다.

1. 사울: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자(1~3절)

사울은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교회를 박해했던 자다. 사도행전에 그의 이름은 스데반을 돌로 친 증인들의 옷을 맡은 자로서 처음 등장한다(7:58).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처럼 우연히 그고 억지로 연루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겼다(1절).

사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박해를 일으켰다(1절).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그날부터. 그의 목표는 교회를 잔멸(파괴)하는 것(3절)이었고, 그 일에 얼마나 열심이 있었는가 하면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길 정도였다(3절). 유대인 학살의 주범, 히틀러의 조상뻘.

사울의 간증을 보면(22, 26장), 그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일 곧 성도를 옥에 가두고, 그들을 죽일 때 찬성 투표를 던지고, 회당마다 찾아가서 형벌하고, 강제로 신앙을 부인하게 하는 등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는 일에 앞장섰다(갈 1:13).

왜 그랬을까? 왜 예수님을 박해한 걸까?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 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행 22:3).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사람이 왜 예수님을 박해한 걸까?

정확하게 말하면 사울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유대교 전통에 열심이 있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하나님의 참 율법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고, 참 유대교는 기독교를 환영해야 했지만, 사울의 지나친 유대교 사랑은 도리어 그의 눈을 멀게 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한 것이다(행 26:9).

오늘날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자 역시 사울처럼 여러 가지 것에 눈이 멀었다.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려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지만 결코 갈급함을 채우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만 남는다. 그런데도 평생 거기에 눈이 멀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다(렘 2:13). 그리스도는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생수가 되시는데(요 4:14; 6:35), 사람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등 이 땅에 있는 것으로 영혼의 만족을 채우는 데 눈이 멀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당신의 갈급함을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채우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당신을 충분하게 하실 분이 없다. 지금 당신의 눈을 멀게 하여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모두 지나간다. 영원한 만족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라(요일 2:16-17).

2. 빌립: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4~8절)

사울이 주도적으로 일으켜 교회 불어닥친 큰 박해의 결과로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1절).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했는데(4절), 빌립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다(5절).

큰 박해를 피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도망친 이들을 생각해보라. 특히 빌립은 그와 함께 세워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가 2절에 나온 경건한 사람들 중 하나로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돌에 맞아 죽은 형제를 장사하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임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어디에 머물 수 있겠는 거? 두루 다닌 것을 보면 한동안 정처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빌립을 비롯한 흩어진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과 시험을 초월한다. 그들은 흩어져 숨기보다 흩어진 곳에서 복음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다. 자기 목숨을 위해 그리스도를 감추기는커녕 자기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강력한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그들에게 충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로마서 8장 35~37절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교회는 모든 시험을 힘겹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이나 열심 때문이 아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이 그리스도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모자람 없이 넉넉한 분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기쁨으로 우리를 영원히 만족시키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충분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들과 함께하셨다. 빌립을 통하여 표적을 일으키셨는데(6절), 많은 병자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거나 많은 중풍 병자 걷는 사람이 낫는 등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다(7절).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온전히 기뻐하는 빌립을 비롯한 흩어진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그들에게 충분하신 분인지 전파하게 하셨고 그 결과 성에 기쁨이 게 하셨다(8절).

그리스도로 충분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사모하지 않는 것을 못 견딜 정도로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존 스토트의 복음전도, IVP, 32p). 그리스도를 말과 삶으로 어떻게 전달하는지가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로 충분한지를 보여준다. 삶에 어떤 환난이나 박해, 유혹이나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진정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충분한 분이 되신다면, 당신은 그분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다.

3. 시몬: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자(9-25절)

빌립이 전파한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자 중에 시몬이라 는 사람이 있었다(13절). 시몬은 사마리아 성에 오래전부터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했는데, 이를 자기의 명성을 높이는 데 사용했다(9절).

흔히 마술을 눈속임, 속임수라고 하는데, 과학과 기술을 종합하여 청중을 속이는 것을 가리킨다. 시몬은 마술에 매우 능숙했다. 예전에 데이비드 카퍼필드라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하도 신기하고 규모가 큰 마술을 척척 해내니 항간에 그는 마술이 아니라 마법, 마귀의 능력을 사용하는 적그리스도라는 말도 있었다. 단순한 눈속임과 속임수가 아니라 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현란한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시몬이 그랬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그를 따르며 “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고 평가했다(10절). 그렇게 시몬은 오랫동안 사마리아 백성을 마술로 놀라게 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시몬을 따랐다(11절). 그런 마술사 시몬이 빌립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니며 놀라운 표적 능력을 봤다(13절).

하지만 시몬의 믿음은 또 다른 시몬에 의해 그 본색이 드러났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냈다(14절).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하여 사마리아, 이방인(고넬료),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게 하셨다. 이로서 사회적 문화적 장벽이 심하게 세워져 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이방인에게까지 그리스도께서 충분한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교회가 인정하게 하셨다. 그 확증은 사도들이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안수하기도할 때 성령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났다(15~17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시몬의 믿음이 드러난다(18~19절).

시몬은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 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했다. 어디서 이런 발상이 나온 것일까? 시몬은 마술 기술을 돈 주고 사서 부와 명성을 쌓은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사서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매우 강력하게 시몬을 책망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20~21절).

잘 모르면 친절하게 가르쳐주면 될 것 같은데, 베드로는 참 혹독하게 저주했다. 왜 그랬을까? 그만큼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자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충만함을 조금도 누릴 수 없다. 무엇을 추구하든 그것과 함께 망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사랑과 만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다른 무언가를 얻거나 구하려는 자는 기독교의 도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유업을 조금도 받지 못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를 사랑하기보다 주를 이용하여 얻을 것을 사랑하는지…

베드로는 시몬이 이 심각한 죄에서 돌이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 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2~23절).

시몬의 반응은 석연치 않다.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시몬은 “나를 위하여 주께 이미 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구했다 (24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는 베드로를 통해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막고 싶은 것이 더 크다. 시몬에게 그리스도는 명성과 부를 쌓은 도구이거나 화나 부정을 쫓아내는 수단에 불과한 것 같다.

시몬은 빌립을 통해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큰 표적과 권능을 따라다니며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었을까? 전승에 따르면 시몬 마구스라는 사마리아 마술사가 있었는 데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자가 되었지만 결국 각종 이단의 아버지 특히 초기 형태의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의 거짓 가르침에 기초를 놓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스윈돌, 170p).

천국에 갔을 때 전승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나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만일 시몬이 베드로가 지적한 불의에 계속 매였다면, 다른 말로 그리스도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과 만족과 안위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악독이 가득했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천국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힘은 그리스도로 얼마나 만족하는가에 달려 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우리를 충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신앙의 건 강은 얼마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가로 측정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우리는 흩어져 있고, 경제적인 압박과 건강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일에 비방을 받고 각자 지고 있는 인생의 짐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채우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오히려 이때가 세상에 우리를 영원히 만족시키시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우리의 충분한 구주가 되시는지 기쁨으로 선포해야 할 기회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교회의 힘이다(느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