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난을 통한 영광
본문 : 누가복음 9:23-26
설교자 : 최종혁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시점입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님만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9장에서는 제자를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한 9장에 와서 주님은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고, 51절에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셨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9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다”(9:20)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정확한 대답이었고, 다른 복음서에서 보면 이 대답에 대해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마16:17).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이미지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가 즉각적으로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런 영광스러운 왕으로 오시기에 앞서 죽음이라는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으로, 이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혼란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언급하시고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고난을 통한 영광’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23)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제자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23절), “누구든지”(24, 26절)라는 표현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일반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믿고 있는 사람에게 뭔가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 모든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고 나서 하는 결정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 하는 결정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하고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구원받고자 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제자가 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

본문 말씀에는 주님의 명령이 3가지, 그 이유가 2가지 나옵니다. 주님의 명령으로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셋째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뭔가를 부정하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딸의 아들로 불리기를 ‘거절’했을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관계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부인하다’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나와 내가 관계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구원받기 전의 자신’을 가리킵니다. 구원받기 전의 소욕, 우리의 욕구를 말합니다.

요즘 세상 어디를 가도 이런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자신을 무엇보다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본이 되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자기를 비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신을 부인하는’ 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3:4). 자신은 육체적으로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5,6). 그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유대인스러운 사람이었고 바리새인 중에 하나였으며 지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열심이 커서 교회를 박해하기까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7-9). 이방인을 상종도 하지 않던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되었고,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교회와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옳다 말하고 굳게 붙들던 가치관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두 번째 명령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남편이나 시어머니, 직장 상사 등이 자신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나를 조금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십자가라고 말하곤 하는데, 물론 그들이 어려움을 줄 수는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주님을 위하여 감수하는 어려움, 위험, 환란 등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는 사실 무시무시한 사형틀입니다. 즉, 죽음까지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십자가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귀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이 죽은 사형틀, 그것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15:18).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 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20).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십자가를 “날마다” 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난을 추구하기 보다는 평안한 삶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때로 이정도면 충분히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합니다. 직장에서 나를 어렵게 하는 상사에게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순종했다면, 다음 번에는 상사가 달라져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가 달라져있지 않으면 주님께 불평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고난은 날마다 계속됩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고 말한 것은, 날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영광의 때는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기 전까지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유혹을 힘들게 한 번 이겨내면 그것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다음에 또 있고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갑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세 번째 명령은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 전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신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생겼습니다. 주님과 밀접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하신 명령은 분명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는 죽기를 각오한 고난을 감수하는 삶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군가에게 가서 이런 조건들을 말하고 나서 주님의 제자가 되겠냐고 한다면 누가 따라올까요?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하신 분명한 명령입니다. 말씀이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있는데, 옳다고 여기고 큰 가치를 두고 추구해온 방향이 있는데 그것을 뒤집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신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세상 누구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요3).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평안한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진정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서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 내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우리는 주님을 영접할 때 이미 이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주님을 구주와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했을 때 이 세 가지 명령에 응답한 것입니다. 이것을 전혀 모르고 구원받으신 분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응답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그 어떤 관계도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먼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자신의 삶을 버렸지만, 삶을 버렸던 것이 그 소유를 모두 팔아 예수님께 드렸던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살았다면, 주님을 섬기겠다고 한 순간부터는 그 소유를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몸이 있고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들을 나를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기에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선을 위해서 받는 고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 날마다 져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위 말씀에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할 발자취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고난이 있을 것이고 동시에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창조의 목적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연필은 뭔가를 쓰는데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누군가를 찌르는데 사용된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던 우리를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연필이 다시 좋은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세 가지 명령이 여러분에게 짐으로 다가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소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 자신을 부인하고 더욱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싶어하는 마음이 여러분 마음속에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 24, 25절에서는 이와 같은 명령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명령을 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첫째로 우리는 손익계산을 해봐야 합니다. 무엇이 손해고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계산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원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면 진정한 생명을 잃을 것이고, 이 땅에서의 자신의 삶을 잃으면 진정한 삶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이득이 되고 해가 되는지 여러분이 계산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25).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26).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주님은 아직 영광을 얻기 전이었고 그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24:25-26).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같은 끝이 아니라 영광으로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 중에 계시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제는 고난 받는 종이 아니라 영광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영광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들이 행한 것을 보상하실 것입니다. 26절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영광이 왕이 누군지 안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앞에 손익계산서를 내 놓으셨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삶도 얻고 영원한 삶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주님의 진리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지 못하신 분은 여러분 자신이 이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자신을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님께 나아오는 자를 절대 내치지 않으십니다.

구원받으신 분들은 이것이 우리가 처음 구원받을 때 응답했던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겠다고 했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 명령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영광의 주님께서 보상하실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으로 배우고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주님의 본을 따라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