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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겉사람과 속사람

본 문: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설교자: 조 성 훈

 

 

“그 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사 람은 육체와 영으로 이뤄져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겉사람과 속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겉사람도 낡아지고 속사람도 낡아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겉사람은 낡아지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낡아지는 겉사람

 

세 월이 가면서 겉사람은 점점 늙어갑니다. 사람들은 그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얼굴에 이것저것 바르기도 하고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 먹습니다. 그러나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낡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낡아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사람입니다.

 

이 것은 탄식과 기대의 말씀입니다. 겉사람을 생각하면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기 저기 아프고 병도 생기는데 인간의 몸은 자동차가 아니니 부품을 갈 수도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점점 소망이 사라집니다. 사업도 잘 되지 않고 자녀들도 기대만큼 자라주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다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생각할 때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 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4:16)” 사실 겉사람에는 낙심할 것이 많습니다. 원하는 만큼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도 겉사람이요, 세상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여 우리를 낙심케 하는 것도 겉사람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경제적으로도 살기 힘들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시대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반 이상이 싱글맘을 통해 태어난다고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성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헤어지는 것이 너무 흔합니다. 정치적으로도 세계는 신뢰할 만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가 늙어가며 소망을 잃게 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날로 새로운 속사람

 

“우 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4:16)” 여기서 “새로워진다”는 말은 날로 “성장한다”, “좋아진다”, “즐거워진다” 등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과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수명이 길어져서 더 오래 산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기쁜 일만은 아닙니다. 90세 노인이 100세까지 산다면 춤을 추며 좋아할까요?

 

우리의 마음이 날로 새로워지는 이유는 바로 ‘하늘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내가 하늘나라에서 만날 사람과 누릴 것들을 생각하면 설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처음 외국에 나가게 되면 마음이 설레어 잠도 안 오는데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으면 설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로 가는 것을 기뻐해야 정상입니다. 주님이 계신 아름다운 곳, 영광이 가득한 그 곳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은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고쳐야 할 것도 많고 여러 가지 제약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은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환난

 

“우 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초대 교회 시대에는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동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여기고 핍박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은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정말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잠시’라는 것은 영원한 삶에 비할 때 잠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는 내내 한 번도 핍박 받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평생 채찍질 당하고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그는 평생 당하는 환란을 잠시 받는 환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경한 것” 즉 ‘가벼운 것’,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이 지옥에 가서 받는 고난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라는 의미, 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는 영광과 상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받는 고난은, 믿지 않고 지옥에 가서 받는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늘나라에서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의 고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평생 노숙자로 살아도, 우리는 날마다 춤을 추며 살아야 할 정도로 값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살게 될 영원에 비하면 지금은 한 순간 뿐이고, 그 영광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의 고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삶을 사는 이유

 

“우 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것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리가 애벌레 즉 물 속에서의 삶과 물 밖에서의 삶을 다 알고 있다면, 그 두 가지 삶을 다 고려하면서 살 것입니다. 애벌레가 앞으로 잠자리로 살 세상을 생각하면서 물 속에서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오로지 물 속에서 살 생각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더구나 물 속에서보다 물 밖에서 사는 생이 더 길다면 어느 쪽을 더 생각하면서 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바라보고 세상을 팽개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또한 이 땅에서의 고난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 나님을 생각하고 하늘나라를 생각하면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이 드신 적이 없습니까? 텔레비전을 통해 광활한 우주의 모습을 보노라면 훗날 그곳에 가보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기대가 됩니다. 이 세상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저의 생각이 이상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도 생각하고 앞으로의 영원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않고 날로 새로운 것입니다. “나는 죽을 날이 점점 가까워온다”가 아니라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워온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사 도 바울은 점점 쇠약해져가는 자신의 육체와 핍박받는 환경을 볼 때 낙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날로 새로워짐을 경험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주위 환경이나 자신을 볼 때 전혀 즐거울 일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눈을 하늘에 고정시킨다면 우리의 마음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것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 떤 젊은이는 예수님의 오심을 반기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은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합니다. 살아보니 별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하늘나라일 때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의 생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하늘나라를 바라보시고 진정한 소망 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