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힘써 지켜야 할 부르심, 하나 됨
본문: 에베소서 4장 1절~3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저는 교회의 “하나 됨”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금 교회에 “하나 됨”의 문제가 있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잘하고 있더라도 언제든 “하나 됨”에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 됨”은 계속해서 힘써 지켜야 할 일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됐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음행과 성도 간의 소송, 무질서한 예배 등 수많은 문제가 가득했지만, 바울이 가장 먼저 다룬 것은 그들의 분열이었습니다(고전 3).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복음의 일꾼이었던 두 자매의 실명을(유오디아, 순두게) 모든 교회에서 돌려볼 편지에 언급하면서까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 했습니다(빌 4:2-3). 교회의 하나 됨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하나 됨”에 관하여 오늘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을 통해 배워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교훈을 나누려 합니다. 이 교훈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 즉 “하나 됨”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를 원합니다. “하나 됨”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힘써야 할지 가르쳐 주기 원합니다. 하나 됨을 위해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보여주기 원합니다.

1. 하나 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1절)

많은 사람이 교회의 하나 됨을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되면 좋긴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안 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 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러셀 무어가 추천사를 쓴 브렛 맥크래큰의 책 “불편함”에서 저자는 교회에서 만나는 불편한 성도들의 특징을 살려 목록을 만들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각색함). 여러분이 불편해하는 사람 목록과 겹치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십시오.

    • 악수쟁이: 하루에 열두 번은 악수를 청하는 사람, 하지만 정작 이름은 기억 못 함
    • 집시성도: ‘나는 보통 그리스도인과 달라’라고 말하며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 무서운 아줌마: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대놓고 공적으로 묻는 사람(물론 사랑으로)
    • 수다쟁이: 너무 말이 많아서 대화를 시작하기 무서운 사람
    • 헐크: 평소엔 좋은 사람인데 욱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
    • 소심쟁이: 다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에 쉽게 상처받는 사람

불편하신가요? 모두가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면 혹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이라면 하나 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잘 안 맞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품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저자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교회의 다른 성도가 목록을 만들면 자기도 그 목록에 포함될 것이라고요. 

그 말이 맞습니다. 내가 불편해하는 사람, 하나 되기 힘든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고, 나와 하나 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잘못된 방법은 편한 사람하고만 어울리는 것입니다. 하나 되기 어려운 사람은 굳이 하나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피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하나 됨을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 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위해 기도하실 때 “저들 중 편한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22). 하나 됨이 필수라는 교훈은 오늘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에베소서 4장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는데, 이는 앞에 1~3장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전반부에 구원에 관한 교리를 소개했는데, 2장에는 특별히 구원의 개인적인 측면(2:1~10)과 교회로서의 측면(2:11~22)을 각각 강조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

이것이 성도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우리 각 사람을 은혜로 불러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불러낸 우리 안에 거하기 위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가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가 되라고 구원하셨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선택이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우리가 장기를 이식할 때, 죽은 몸에서 장기를 빼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로운 몸과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 됨”이 왜 중요한지 분명히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 됨은 단지 성도 간의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 됨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과 관계 문제입니다. 결국 하나 됨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하나 됨이 필수라는 말은 모든 성도와 똑같은 수준의 친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12:18). 등을 돌리는 성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요일 2:9). 피해가거나 일부러 인사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빌 2:14).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3-24).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고 그런 자에겐 영생이 거하지 않는 걸 너희가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요일 3:15). 왜 이렇게 하나 됨을 강조할까요? 구원받은 우리에게 있어 하나 됨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됨이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십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요 13:35). 

반대로 우리가 하나 됨에 실패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하나 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선택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와 더불어 필수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2. 하나 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2절)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을까요? 두 번째 교훈입니다. 하나 됨은 절대로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 되기 어려운 성도와 연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4장 3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3절…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힘써 지켜야 합니다.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받지 못하는 상대방의 특별한 기질이나 연약함을 품고 하나가 되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질이나 연약함 때문에 하나가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 됨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몇 가지 덕목을 말씀해주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2절).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첫째, 모든 겸손과 온유

하나 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하나 되지 못한 빌립보 교회의 두 자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는데, 그 마음이 바로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진 마음이었습니다(빌 2).

여러분, 우리는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 되기 어렵습니다. 저 성도보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므로 하나 되기 힘듭니다. 내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 앞에서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하나 되기 힘든 성도를 보면서 “도대체 왜 저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도 그래!”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겸손입니다. 하나가 되려면 우리는 겸손을 노력해야 합니다.

온유는 ‘마음이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본문에서 사용된 온유라는 단어에 “연약함”의 의미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에서 “온유”는 자신이 가진 것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온유의 대명사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지구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민 12:3). 그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온유하다는 평가가 등장하는 것은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장면에서입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의 입으로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능력을 행한 지도자인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두 사람에게 해코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권리를 사용하거나 분을 내는 것을 잘 참고 통제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가지고 있는 온유함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온유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1:29).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여리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서 가진 권리와 권세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철저히 통제하신다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위협하지 않으시고 선으로 갚으신 것,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이러한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성도와 하나 되기 위해 우리는 내세울 수 있는 권리나 분노를 내려놓고 통제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 했으니 나도 이렇게 해도 된다’ ‘나에게 충분히 이럴 권리가 있다’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있어 온유함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둘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오래 참음은 사랑의 행위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덕목입니다(고전 13:4). 우리는 기본적으로 한두 번은 잘 참지만 오래 참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도와 하나 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은 수다쟁이 성도를 참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지만, 계속해서 참기는 힘듭니다. 한두 번 성도가 잘못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반복되면 못 참습니다. 용납이 안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같은 죄를 몇 번이나 참고 용서해야 하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오래 참으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얼마큼 오래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입니다(마 18:22). 그렇게 오래 참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종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형제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않냐고 물으셨습니다(마 18:33).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한 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만큼 성도를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만큼 오래 참고 용납해야 합니다. 잘 안되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 안에 끊임없이 채워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오래 참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미쁘신 하나님. 그 사랑으로 성도를 오래 참고 용납하여 하나 됨을 이루어 갑시다. 성도를 보며 ‘이건 정말 참기 힘들다’ ‘더는 정말 용납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 때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참아 주셨지?’ ‘얼마나 자주 같은 죄를 계속해서 용서해주고 계시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지?’라고 물으십시오.

하나 됨에 관한 마지막 교훈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용납, 사랑은 하나 됨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덕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된 것을 말하지 않거나 성도의 죄를 모른 척하거나 직언 혹은 반대 의견을 낼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덕목은 그런 것을 어떤 태도로 할 것인지 규정합니다. 참된 것을 말하되 온유하고 겸손하게, 직언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용납하며 직언하는 것입니다. 반대를 하더라도 오래 참음으로 반대의견을 겸손히 제시하는 것입니다. 

3. 하나 됨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이 이루신다(3절)

자, 이제 마지막 교훈입니다. 하나 됨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은 이미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3절이 그것을 확실하게 가르칩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성령님은 “평안의 매는 줄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셨고, 성도와 성도 사이에 화목을 실현하셨습니다(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 2:16).

그 앞에 2장에서는 바울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했습니다(엡 2:22). 성령이 하나 됨을 계속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말합니다(현재형 수동태).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를 하나로 묶어주실 뿐 아니라 은사를 주셔서 각각 지체로서 기능하게 하셔서 하나 됨을 지속하게 만드십니다(고전 12-14).

그뿐만 아니라 성령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덕목들 곧 교회의 하나 됨을 힘써 지키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맺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는 성령의 열매 목록이 나오는데, 흥미롭게도 우리가 방금 살펴본 “사랑”, “오래 참음”, “온유” 그리고 3절에 나오는 “평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 됨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하는 덕목 역시 우리가 성령의 뜻을 따를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성도와 더불어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계속해서 하나되게 하시는 것을 거스르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든 성도 사이에 이루신 평안을 힘써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의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에 거하시기 위해 요구하신 것이 바로 하나 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 됨을 요구하시면서 바라시는 것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버리고 성령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십니다(갈 5:16).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행하기 원하십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온유하게 자기를 내려놓기 원하십니다. 분노하지 않고 오래 참기 원하십니다. 등을 돌리고 피하지 말고 사랑으로 용납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힘써 성령의 뜻에 따라 살 때, 성령은 우리 안에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납과 사랑을 풍성히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 되는데 꼭 필요한 성령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하나 되지 못하는 지체 하나만 있으면 온몸이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작은 암세포 하나가 얼마나 빠르고 무섭게 온몸을 죽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지체의 범죄가 온 교회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역사를 통해 적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분열되어 죽어가고 있는 교회의 안타깝고 슬픈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이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성령이 이미 우리 가운데 이루신 평안을 힘써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 됨의 명령에서 예외인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한 지체라도 하나 되지 못하면 한 몸으로서 모두가 하나 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각 사람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각 사람의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납이 필요합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교회가 주님이 거하시기 합당한 하나 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임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임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