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본문: 누가복음 21장 34~38절
설교자: 조정의

 

우리는 4주 연속으로 종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다. 계속 같은 주제로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만큼 종말은 예수님이 사역의 마지막에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싶어 하셨던 핵심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3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고”, 그것은 곧 아침 일찍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일부터 체포되신 날까지 “밤에는 감람원에 가서 쉬셨고,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37절). 매일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에 힘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또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가르침의 핵심 주제는 “종말”이었습니다(마 24-25(97구절) –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막 13 – 집주인, 종).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말씀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행 1:3).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렇게 간절히 제자들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 잘 준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설명하신 종말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장차 올 모든 일을 준비해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J. C. 라일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여기에 나타난 본문보다도 더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362p)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주 오심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태도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1. 종말을 기다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이 다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35절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여기서 “이날”은 언제를 가리킬까요? “이날”은 휴거의 날이 아니라 유대인 속량의 날입니다(눅 21:28).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는 날입니다(21:31).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들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택하신 유대인을 불러 구원하실 것이고(막 13:27), 반대로 온 사방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죗값을 치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 혹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날 전에 구원받은 이방인들,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이방인의 때가 차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는 이날이 오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홀연히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주님의 호령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집니다. 휴거됩니다(살전 4:16-17).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 남겨져 환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일이 다릅니다. 또 36절을 보십시오.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 제자들에게(“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장차 올 이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인자의 오심과 그 직전에 있을 온갖 무서운 재난과 일월성신의 징벌입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일을 능히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피한다는 말은 단지 목숨을 보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 대비한들 어떻게 그 무서운 진노를 다 피하겠습니까? 실제로 진노의 날에 많은 사람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계 6:17). 

하지만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능히 그들을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들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유 1:24).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살든지 혹은 죽든지 결국 인자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재난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항상,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이미 구원받은 이방인인 우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전에 끌어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환난을 피하고 잘 대비해야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앞에 서겠지만, 우리는 환난 전에 공중에 임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모든 환난을 피하고 그리스도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 전에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과 일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또한 “항상 기도하라”와 “깨어 있으라”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날과 기다리는 일은 다르지만, 그 날과 그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깨어 있으라”에 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종말에 대한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4장에서 성도에게 임할 휴거에 대해 가르치고 나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때와 시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살전 5:1~3).

살전 5장 1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절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교회가 기다리는 “주의 날” 곧 휴거의 때가 언제 어떻게 이른다고요? “밤에 도둑같이”(2), 예상하지 못한 그 때 “갑자기”(3) 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주가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휴거는 청천벽력같은 멸망의 선포입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의 날” 역시 갑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1장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들에겐 징조가 있습니다. 창세 전후로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재난이 있고, 그 후로는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고 땅과 바다가 요동치는 무서운 징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 따위로 마음이 둔해져 그날을 갑자기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이 방심하다가 덫에 갑자기 순식간에 걸려드는 것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대책 없이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아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마 24:37~39).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징조를 보고도 멸망할 때까지 깨닫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심각할 정도로 나약하고 나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진노를 앞둔 유대인들이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면 징조 없이 도둑같이 갑자기 나타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 오심을 잘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종말을 기다리는 자세: 깨어 있으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과 동일한 명령 “깨어 있으라”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그리고 8절에 “정신을 차리고…”입니다.

“정신 차리라”, “깨어 있으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지 않으면 각자 알아서 해석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종말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도구)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오해: 재물사용/항상 생각하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성도를 가리켜 “우리” 혹은 “너희”라고 말하고 성도가 아닌 자를 “다른 이들”(3) 혹은 “그들”(6)이라고 말합니다.

또 성도는 “낮에 속하였다”(8)고 말합니다. 특히 5절을 보시면 성도는 “빛의 아들들”, “낮의 아들들”로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반면에 성도가 아닌 이들은 “자는 자”, “취하는 자”라고 말하며 그들은 “밤에 자고, 밤에 취한다”고 말합니다(7절). 밤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는 빛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는 빛과 사귐이 있는 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요일 1:7).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밖에 있는 어둠 혹은 밤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들은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냥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자는 것’ 혹은 ‘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여 그분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죄), 그것이 밤에 속한 자, 어둠에 속한 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세상 풍조 속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입니다(엡 2:21-3).

하지만 반대로 빛에 속한 자, 낮의 아들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들은 밤에 속한 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요일 1:6). 

밝은 대낮에 보통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과 항상 사귐을 갖는 성도는 낮의 아들로서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롬 12:2).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 이것이 깨어있는 삶,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단순히 내일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으로 돈을 사용하는 삶이 아닙니다. 단지 항상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만 갖고 있는 삶도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입니다.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방해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술취함, 방탕함같은 죄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생활의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수고와 슬픔). 이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소속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땅이 내가 속한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복보다는 보이는 이 땅의 재물을, 측량할 수 없는 하늘의 보상보다는 측량 가능한 이 땅에서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둔해진 마음으로 살게 되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기쁨이 아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닌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나 오실 주님을 대놓고 부인하지 않지만, 현재의 삶에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잠자는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악을 멀리하는 일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하는 일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입니다. 어떻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

바울은 세 가지 깨어 있기 위한 도구 혹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본문에서는 호심경(갑옷의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 방탄조끼)와 투구라는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둘 다 보호하는 방어용 도구입니다. 전쟁에서 팔 다리를 잃어도 죽지는 않지만 심장이나 머리가 상하면 죽습니다. 호심경과 투구는 전쟁 중에 그런 치명적인 부상에서 보호해주는 필수 무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게, 악에 빠지지 않게, 마음이 둔하여 져서 잠들지 않게 막아주는 필수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1. 믿음

첫째로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요일 5:4).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유익한 삶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 불신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생생하고 피부에 와닿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우리가 이 땅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고후 4:18).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약속하신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고, 뜻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믿음을 두십시오. 

생활의 염려가 여러분의 심장을 겨눌 때, 세상의 유혹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려고 할 때, 믿음의 방패로 막으십시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떠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 내게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구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약 1: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굳건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롬 10:17). 그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래 묵상하고, 하루 종일 읊조리며 그 말씀으로 약속하신 이를 굳게 믿으십시오.

  1. 사랑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경의 또 다른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이 이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주 오심을 그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 못할까요? 왜 당장의 생활의 염려나 술취함, 방탕함 등에 쉽게 빠져 영원한 복, 영광스러운 주를 잊어버리며 살까요?

결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먼 지역에 출장갔을 때, 빨리 집에 돌아와 쉬고 싶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가족들과 빨리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빨리 그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아름답고 멋진 해외 여러 나라를 여행해도 집에 오면 항상 하는 말, “역시 집이 최고야” 아닙니까? 내가 진짜 쉴 수 있고, 나를 가장 잘 알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소속된 바로 그곳이 집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자기 나라를 사랑해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지음 받은 사람이 지으신 이를 만나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빛과 사귐이 있는 자가 참 빛이신 하나님을 직접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염려따위에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 어떤 것을 가져다 주어도 그 유혹을 능히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주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의 마음이 확실히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직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주를 사랑하면 당연히 주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칭찬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6-7). 그러면서 그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주를 사랑하면 주를 위한 고난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우리를 깨어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이 깨어 있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라”(요 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더욱 주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소망

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만, 본문이 말하고 있는 소망은 구원에 둔 소망입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해 각자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죗값을 다 지불하셔서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따라오는 말씀에서 이렇게 구원을 설명합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먼저 구원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피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그분의 온전한 의로움을 내게 옷입히셨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죄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롬 8:1). 여기까지는 구원을 이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10절을 보시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깨어 있든지(살아 있든지) 혹은 자든지(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와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가 누리고, 그리스도의 상속을 내가 함께 누리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나도 참여하여 함께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친밀한 교제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히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사시는데 겨우 생활의 염려때문에, 세상이 주는 짧은 쾌락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나와 함께 살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서 탄식하는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부인하며 잠자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영광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나의 신랑, 나와 한 몸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이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 심장을 뛰게 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주 예수와 날마다 함께 살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주 예수와 동행하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깨어 기다리는 삶은 각자 혼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와 연합하셨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권면합시다. 잠자는 사람이 있나 서로 살펴보고 깨워 줍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사람들을 보거든 말씀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줍시다. 어리고 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말씀을 들려줌으로 믿음에서 자라나도록 도와줍시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믿으라”고 강하게 권면합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주가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서로 일깨워 줍시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보여줍시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그보다 얼마나 더 사랑스럽고 고귀한 분인지 말해줍시다.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 삶을 통해 그들의 삶을 뜨겁게 세워줍시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만이 남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계속해서 알려 줍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잘 쓰고 있는지 서로 확인해 줍시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두고 있는지, 아니면 불타버릴 이 세상의 것에 우리 소망을 두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교제합시다.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서로에게 말해주면서 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