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의 말씀, 우리 – 말씀에 합당한 반응

본문 : 시편 19편 11-14절

설교자 : 최종혁

시 19:11-14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6절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고, 7-1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 우리’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제는 ‘말씀에 합당한 반응’입니다.

본문의 10절까지의 말씀과 11절부터의 말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10절까지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성경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그 역할에 대해 설명합니다. 시적으로 잘 조직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11절부터는 관점이 완전히 바뀝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 말씀에 반응하는지를 기록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14). 하나님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 삶의 주관자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분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따르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이야기를 묶어놓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세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11절에서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12-13절에서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14절에서 삶으로 예배합니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11).

여기서 다윗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원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고,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말씀드렸던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인생에 대한 간단한 원리입니다. 이 말이 구약의 율법시대 얘기같이 느껴진다면 그런 분은 신약성경을 더욱 자세히 읽으셔야 합니다. 이 원리는 구약성서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다보니 ‘순종’의 의미가 제자리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절대 분리되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의 끝에서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복에 대한 말씀보다 화에 대한 말씀이 더욱 많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도 천국에 대한 것보다는 지옥에 대한 것이 더욱 많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설교에서도 순종에 대한 복보다는 화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더욱 많습니다. 예언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벌주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길을 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경고로서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그들에게 가서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멸망할 것’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전하신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경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무시합니다. 그렇게 선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경고를 누가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보다는 어른이 하는 경고가 믿을 만 할 것이고, 평소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진실된 사람에게 신뢰가 갈 것입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람보다는 전문가가 말하는 것이 더욱 힘 있게 들릴 것입니다. 또한 나를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경고의 말이 권위 있게 들릴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경험이나 이해가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일기예보를 들으며 그것을 100퍼센트 신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을 보고 추측하고 자신의 무릎 상태에 따라 확신합니다. 어릴 때 저는 일기예보를 믿었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경험 상 그들의 예보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람들도 그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쪽 손에 놓고, 한쪽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 그리고 내가 경험한 것과 내가 원하는 것 등을 올려놓고 저울질 합니다.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어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꿔 해석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지혜, 어떤 경험, 내가 원하는 것이나 나의 판단으로 저울질 할 수 없습니다.

11절에서 ‘경고를 받았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경고를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33장에서 파수꾼의 나팔소리를 들은 사람의 반응과 같습니다.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33:5).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두거나 그냥 무시하거나 또는 자신의 생각으로 재해석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경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경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의 욕심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경고를 받아들이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11) 여기서 상이 크다는 것은 ‘상이 많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정확합니다(10,13).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을 때 상이 많다, 즉 보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앞으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앞으로도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따라 살고 순종하는 것이 뭔가 손해를 보고 억울한 삶을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며 부모는 말씀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한다면 그 가정은 어떠할까요? 정말 행복한 가정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각자가 자신을 낮추면서 다른 사람을 세우고 서로 사랑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하고 완벽한 공동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이 땅에서도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도 그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가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지금 죄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시할 수 있는 분,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2-13).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12-13절에서는 두 종류의 죄를 말하는데 하나는 ‘숨은 허물’이고 또 하나는 ‘고의로 짓는 죄’입니다. ‘숨은 허물’은 무엇일까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허물을 드러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실 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윗이 벗어나고 싶은 죄가 있는데 그것을 ‘숨은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몰래 짓는 죄도 아니고 너무 작아서 잘 안보이는 죄도 아닙니다. 이것은 ‘나도 모르게 짓는 죄’입니다. 교회에서 배우고 자라지 않으면 가치관이 잘 형성되지 않아서 어떤 것이 죄인지 모릅니다.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또한 죄인 줄은 아는데 그 순간 죄를 짓는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 습관적으로 짓는 죄들입니다. 이것을 율법은 “부지중에 지은 죄”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죄에 대해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지도 알 수 없는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전에는 죄인지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는 순간 죄를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그 죄가 습관화 되어서 버리기 힘듭니다. 우리의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선임병에게 탁구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탁구를 전에 쳐본 적이 있는 사람은 더욱 가르치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습관이 있어서 그것을 고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전혀 쳐 보지 않은 사람은 가르치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죄가 이와 같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이것이 옳다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죄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죄를 짓습니다.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아있는 죄입니다.

죄를 버리고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롭다 생각해도 조금 있으면 다시 똑같은 죄에 넘어집니다.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인가 싶어 무력감과 죄책감에 빠집니다. 다윗은 그러한 죄에 대해 그 한계를 인정화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습관화된 죄에 대해 그냥 인정해 버리고 ‘난 원래 그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원래 그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그 죄에 대해 다윗처럼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죄는 ‘고의로 범하는 죄’입니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3). 여기서 “고의로”로 번역된 단어는 ‘주제넘는다’‘교만하다’‘건방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죄와 다릅니다. 물론 어떤 죄가 더 크고 작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죄는 더욱 의지적인 죄입니다.

이 죄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 줄을 알면서 범하는 죄입니다. 더욱 교만하고 주제넘은 죄입니다. 예를 들어, ‘비방’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죄입니다.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깎아내리는 것은 죄인 줄을 모를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정도는 우리끼리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숨은 허물’입니다. 그러다가 구원을 받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벗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죄를 범하고 살아와서 자신도 모르게 그 죄를 짓고 나서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숨은 허물’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비방이 죄라는 것을 압니다. ‘내가 여기서 이들에게 동조하면 나도 같이 비방의 죄를 짓는 것이다’라는 것을 인지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그것을 선택하는 것,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고의로 범하는 죄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즐거워서 그러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싶을 수도 있으며, 나도 그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보다 그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제넘음의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의로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죄에 대한 기도는 12절의 기도와 다릅니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13).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기 전에는 죄가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 사람들은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가 더 이상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의 말씀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죄가 여전히 우리를 주장하려고 한다는 데 있고 또한 우리에게 여전히 노예근성이 남아 있어서 죄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죄를 통제하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3). 그 결과로 정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흠이 없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의 자격에서 ‘책망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데 이것은 평판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정직하여 많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죄가 죄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가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죄와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이러한 탄식 속에서도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고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마지막으로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말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그것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물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요구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생각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기도를 이렇게 바꿔봤습니다.

“제가 피할 안전한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저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저의 하나님! 제가 하는 모든 말과 모든 생각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생각이 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저의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있게 하소서. 세상에 물든 저의 모든 가치관이 주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께서 말하실 때 제가 말하게 하소서. 합당한 때에 합당한 말을 하게 하소서. 그렇게 주를 선포하게 하소서”

시편 19편의 시작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언어도 말씀도 소리도 없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속받은 인간, 하나님의 백성이 입술의 말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말은 삶의 척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종인 우리가 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자연으로 말씀으로 드러내셨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친척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그 역할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알게 되는 하나님이 달라집니다. 그들이 성경을 보기 전에 우리를 먼저 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하기를 원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말과 생각으로 온전히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정말 그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선 자의 자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벌이 두려워서 의무감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태양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을 말하면서 ‘기뻐하는 장사같다’고 말합니다. 즐거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꺼이 기쁨으로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죄에서 벗어나며 삶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말과 순서는 다르지만, 시편 19편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시고 구속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멸망을 향해 가고 있던 우리를 먼저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보여주셨고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 말씀에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반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