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
본문 : 빌립보서 3:1-16
설교자 : 조 성 훈

1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경주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은 많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마라톤 경기는 완주를 한 것만으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믿기 전보다 훨씬 갈등과 어려움이 많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육신이 싸워서 고통스럽러운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42킬로 정도를 달리면 끝납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주는 몇 킬로를 달려야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께 갈 때까지 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무슨 생각으로 달릴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상과 영광을 생각하며 달릴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절).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1절). 이것은 여러 번 말해도 수고롭지 않다, 이렇게 말함으로 너희에게 더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되고 그는 주 안에 있게 됩니다.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무엇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집을 새로 짓고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며 승진을 하는 등 기뻐할 일들이 많지만 그것으로 날마다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월급이 오르면 잠시 기쁘다가도 곧 기쁨이 그칩니다. 집을 지으면 몇 년간 기뻐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또다시 만족이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주 밖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소유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가장 기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된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의 자부심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 밖에서의 기쁨은 곧 사라지는 것이지만 주님 안에서의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경주를 달리게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넘치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기에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기업,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늘 기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환경과 조건은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 때문입니다. 자녀의 성적을 보면 기뻐할 수 있나요? 남편이 받아오는 월급을 보면 기뻐할 수 있나요? 자녀를 시집보내고 장가보내서 마음이 편할 것 같지만 오히려 걱정이 두 배로 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의 눈이 이 땅에 머물러 있다면 그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려면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우리는 하나님 자체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분이 자비로우신 것,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을 생각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3절).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무엇을 하면 안 되고 육체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은 5,6절에서 말한 것(“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육체의 신뢰할 만한 것들(율법, 할례, 근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여 마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무익하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죄를 짓는 데 사용하지 말고 의의 병기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사도 바울은 이미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시 신앙의 경주의 어느 시점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15절). “온전히 이룬 자들”은 ‘성숙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중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절). 우리의 경주는 뒤를 돌아보고 하는 경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위해 잘 한 일이 있다면 그의 마음은 교만해질 것입니다. 반대로 과거에 너무 많이 넘어졌다면 그는 아마도 좌절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양심이, 믿는 자로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지 못했다고 스스로 송사하는 것입니다. 둘다 좋은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보지 말고 앞을 보라고 말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며 계속 좌절에 빠져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소망이 우리를 달리게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앞에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의 상을 따라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습니다. 요즘 매체를 보니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주들이 있고, 규모가 큰 교단에서 동성애자 목사를 인정하고 동성애자들의 결혼식 주례를 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동성애자의 주례를 거절했다가 고소당해 벌금을 내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몇 주에서는 마약이 합법적으로 거래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급속도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해서 현재 중국에 있다는 전면 광고를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고 말하고 그분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면, 세상의 적이 되는 시대가 곧 올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의 골인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우리의 신앙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 무엇보다 큰 무게로 우리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떨어집니다. 신앙 안에서 잠자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눈꺼플이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신앙의 경주를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불행하게도 이 중에 남아있게 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시고 내 영혼이 거듭났는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