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본문: 갈라디아서 2장 1절-10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제목은 5절에 나오는 말씀을 가져온 것인데 바울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했던 여러 수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의 수고와 희생을 통해 진리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진리를 지키고 전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도전하는 수많은 공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공격을 대응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진리에 반하는 거짓과 공격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본문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과 사도직분을 변호하기 위해 간증을 시작합니다. 간증을 통해 복음과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합니다. 바울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간증을 이어가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전 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베드로와 함께 15일을 함께 했다고만 말했다면 이번에는 사도들과 무엇을 했는지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말해줍니다. 기본적으로 1장에서의 간증과 2장에서의 간증의 요점은 같습니다. 다만 2장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까 1장과 2장을 나누어서 살펴보고 있지만 원래 이 편지를 받은 갈라디아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간증을 한 번에 읽으면서 바울이 전하고자하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서신을 보고 있는 우리가 아직 알 수 없지만, 갈라디아 교회는 다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따랐던 다른 복음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내용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고 바울의 대응이 어떠했는지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1)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데 십 사년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긴 시간동안 예루살렘과 떨어져서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구분되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과도 관련 있기 때문에 어떤 방문이냐에 대해서 견해차이가 있습니다. 두 견해가 있는데 첫째는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구제를 위한 방문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큰 흉년으로 인해 유대에 있는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서 그들을 구제합니다. 이 때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을 오늘 본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견해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이방인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바로 잡는 일을 합니다. 이 때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을 오늘 본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 사도행전 11장의 큰 흉년에서 구제하기 위한 방문이었는지 아니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한 방문이었는지 어떤 견해든 장단점이 있어서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사도행전 11장의 구제를 위한 방문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2절에 예루살렘 방문의 성격이 “사사로이” 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방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공의회라는 공적이고 공개적인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방문이 공의회에 방문하는 자리였다면 바울이 그의 간증을 하면서 공의회에서 결정된 내용들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지금 간증하는 내용은 공의회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10절에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는 사도들의 부탁을 봤을 때 구제를 위한 방문이 그 배경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동행한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방문합니다. 특별히 디도를 언급한 것은 중요한데 3절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사도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유대 교회에서 나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아니면 내가 하고 있는 이방인 사역을 선전하기 위해서 아니면 내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추가적인 조언을 받으려고 이런 개인적인 이유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다시 방문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2) 바울은 하나님 뜻에 따라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입니다. 여기 계시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 받은 계시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사도행전 11장의 구제를 위한 방문이라면 선지자 아가보가 큰 흉년을 예언했던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지 자기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해서 유력한 자들에게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제시합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2)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구체적으로는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에게(9)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제시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유력한 자들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 자체는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도들을 유력한 자들로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을 비교해서 예루살렘 사도들을 더 힘이 있고 권위 있는 사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조금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한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력하다는 말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합니다(6).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도들을 유력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에 바울은 그러한 평가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하는 말이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그 예루살렘의 사도들, 기둥 같이 여기는 그 사도들에게 나는 내가 전하고 있는 복음을 제시했다‘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통해 바울의 복음은 또 한 번 사도들에 의해 검증됩니다. 변함이 없는 참된 복음이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가 처음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베드로를 만나 15일 동안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사도들에게 복음을 제시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울의 복음이 처음과 달리 변질되었다는 공격,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을 바꾸었다는 공격,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는 공격을 모두 무효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이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사도들에게 복음을 사사로이 제시합니다. 쉽게 말하면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공개적인 자리에서 복음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말한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기에 바울은 조심스럽게 이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수고와 앞으로의 사역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지혜로운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 복음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토론이 되고 결정된 일은 후에 바울이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들의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신중하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지켜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공격이 어떤 것인지 다른 복음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3) 여기서 바울이 처음으로 할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복음에 있어서 핵심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 추가적으로 할례가 있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표징,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정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이었는데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할례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무들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졌고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할례를 받은 사람이었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할례 받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큰 도전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은 바울의 복음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며 다른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할례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습니다. 할례가 하나님 백성이 되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면 디도도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주장했던 자들에 대해서 “거짓 형제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거짓 형제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 거짓 형제들은 숨은 의도를 가지고 가만히 들어와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엿보고 그 자유를 빼앗기 위해 작전을 펼칩니다. 그들은 스파이입니다. 첩자와 같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결국, 거짓 형제들은 믿는 자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노예가 되게 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런데 진리를 왜곡시키고 참된 복음을 다른 것으로 바꾸고 뭔가 다른 것을 추가하는 것은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지킴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 바울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형제들의 다른 복음에 대해서 단 한순간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함으로 복음의 진리를 지켰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자유를 빼앗아 가려는 공격을 철저히 막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단호했던 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그들 가운데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율법을 비롯한 사람의 모든 수고로부터의 자유는 포기할 수도 없고 타협할 수도 없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로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수고했고 또 그 복음이 참된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기 위해 유력한 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 사도들은 바울이 제시한 복음에 대해서 부족함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좀 부족한 거 같은데 조금 수정이 필요하네요. 이 개념은 중요한 건데 빠뜨렸군요. 반드시 추가하시기 바랍니다.’ 이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어떤 것도 더하여 준 것이 없습니다. 바울의 복음이 복음으로서 충분했고 복음의 진리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7-8)

복음이 선포되는 두 대상이 있고 이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로 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다른 문화와 생각과 가치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 자체를 바꾸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사도로 삼으신 분이 바울을 사도로 삼으셨고 베드로와 바울은 같은 사도로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대상이 다를 뿐이지 복음 자체는 다를 수 없습니다. 만약 복음이 달랐다면 두 사람은 서로의 복음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섬기는 대상이 다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함께 하기에 이들은 서로의 사역을 인정하며 복음의 진리가 같음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의 사역을 인정하는 친교의 악수(9)를 나누었습니다. 각자의 부름에 따라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베드로는 유대인에게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동일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청중은 달랐지만 전하는 내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리는 변할 수 없고 앞으로도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복음은 동일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다만, 바울에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10) 가난한 성도들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거하고 있을 때 따라오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열매가 가난한 성도들을 향한 긍휼과 섬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서로가 하나의 교회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일은 바울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해왔던 일이고 지금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도 성도를 돕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리하면 오늘 본문은 계속되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간증에서 중요한 구분점이 되는 것이 예루살렘 방문인데 오늘 본문은 그 두 번째 방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을 간증하면서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분을 변호합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 방문한 바울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제시합니다. 결과적으로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은 물론,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간증을 통해, 이 모든 일을 통해 바울이 바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그들 가운데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허락하신 자유를 지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 넘어가지 않는 것, 거짓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바랐던 것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진리 가운데 거하며 우리가 가진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리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게 하려면, 우리는 같아야 할 것과 다를 수 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동일한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율법에서 자유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율법에 매여 있던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방인이 얻은 자유는 불편한 것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되려면 율법의 요구를 지켜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로 생각해볼 때 할례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같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고 자유를 빼앗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했던 일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언성을 높이고, 본질이 아닌 것을 두고 다를 수 있는 선택 사항에 대해서 때로 정말 사소한 문제를 두고 열을 내면서 죽일 듯이 싸울 수 있습니다. 정말 소모적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지키며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려면 같아야 할 것과 다를 수 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되, 진리 안에서 다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물러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이지 않은 것,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을 잘 구분하는 것이 진리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게 하는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그것과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다른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나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먼저 곰곰이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같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를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진리에 비추어볼 때 마땅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전통이나 사람의 관습이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을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도록 서로에 대해서 용납하고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 너그러이 받아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