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다 

본문 : 시편 54편

설교자 : 최종혁

상황_피할 곳이 없을 때 

먼저 표제를 살펴보자. 앞의 두 시, 그리고 이어지는 시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마스길”로서 인도자를 따라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다. 다윗 개인의 경험에 기초해있지만 공동체가 함께 배워야 할 교훈적인 요소가 있다는 얘기다. 특히 이 시편은 기록된 상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이 일은 사무엘상 23장과 26장에 기록되어 있다.  

23장 : 시편 52편의 배경이 되었던 도엑의 제사장 학살 사건 이후. 다윗은 도망 중이었고 여러 이유와 필요에 의해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던 중 당시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블레셋이 그일라를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일라는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 영역의 경계에 해당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도망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그를 만류했지만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확신을 얻은 후, 블레셋을 쳐서 이기고 그일라를 구원했다. 

 이 사건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꽤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단순히 도망만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일을 통해서 도망자 생활을 끝내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을지 모른다. 자연스럽게 다윗은 그일라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지자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다윗을 쫓는 입장에서 사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다윗이 포위하기 좋은 성에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20:8). 사울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그일라로 내려가려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묻는다. 정말 사울이 저를 잡으려고 내려옵니까? 하나님은 그렇다고 하셨다. 재차 다윗은, 내가 구원한 이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배신할 것이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이에 다윗은 그와 함께 한 사람들 600명 가량을 이끌고 다시 도망한다.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다녔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삼상 23:14). 그일라에서 피할 때만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은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구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도망하는 중에 다윗은 ‘십 광야’의 한 수풀에 숨게 된다. 그리고 그때 십 사람들이 사울이 있는 기브아까지 올라가서 다윗이 숨은 곳을 알리면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삼상 23:20)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하시던 일과 정확히 반대의 일을 이들은 자신들의 의무라고 하며 열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고, 사울은 그런 그들의 말에 대하여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화답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반하는 일을 하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거의 유사한 일이 26장에서 다시 한번 벌어진다. 

 이렇게 다윗을 밀고한 십 사람들은 사실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스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파 안의 유대가 강했던 시대다. 그래서 사울도 다윗을 쫓으면서 자신이 속한 베냐민 지파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 책망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다윗도 후에 왕이 될 때 유다 지파의 왕이 먼저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었다. 따라서 지금 유다지파인 십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밀고하는 일은 다윗에게 있어서는 큰 배신이었다. 어쩌면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가장 안전하고 또한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 쉽게 무너졌다고 절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고 있는데 도망할 곳이 없었다. 가드에 갔다가 미친 체하여 빠져나왔었고, 모압으로 갔을 때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 유다 땅에 머물라고 하셔서 유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곳은 안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편이 되어야 할 같은 지파인 십 사람들이 자신을 두 차례나 팔아넘겼다. 

 다윗은 피할 곳이 필요했다. 몸도 그렇지만 그의 마음도 피할 곳이 필요했다. 우리는 몸이 괴롭고 힘들 때 마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잘 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며칠의 광야길에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사탄이 택했던 타이밍도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였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우리는 광야까지 갈 필요도 없다.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넓은 집에 살면서도 조금만 몸이 아프거나 혹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작은 것에 쉽게 분노하기도 한다. 조금만 불편한 상황에 있게 되면 쉽게 짜증내고 또 그렇게 하는게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다. 

 때로는 다윗처럼 더 큰 일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큰 질병을 예기치않게 만났을 때, 사업에서 크게 실패했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크게 실망하고 배신을 당했을 때, 기대했던 일이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 때로는 이런 일들을 만나면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원했던 삶이 무너질 때, 그 마음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하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런 상황에서 나름의 희망을 찾고 마음을 다잡는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여기 다윗이 그렇게 한다. 그의 삶이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앞으로의 희망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 상황들이 아니라 바로 그가 믿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무너질만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한다. 이것이 크든 작든 어려운 일을 만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필요했던 교훈이었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교훈이다. 

 I주의 이름을 부르다(1-3절) 

부름(1-2절)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까? “형제님, 물이 별로 깊지 않은 것 같았는데 들어와보니 생각보다 깊고 물살도 강하네요. 제가 지금 발이 땅에 안닿는데 수영도 못해요. 어떻게 좀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이런 식으로 도움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눈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보인다면 일단 부르고 볼 것이다. 다윗이 1-2절에서 하나님께 그렇게 한다. 

 시 54:1–2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다윗은 자신의 정황이나 왜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일단 하나님을 부른다. 

 “구원하시고” –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함 

“변호하소서” – ‘판단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다윗의 입장에서 정의를 구함. 

 2절은 좀 더 포괄적이다. 기도를 듣고 입의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구한다. 다윗이 지금 처한 상황을 보면 다윗이 딱 한 번 이 기도를 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을 것이고 이 시편보다 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한 기도들도 많았을 것이다. 딱히 기도라고 하기 어려운 그런 부르짖음이나 눈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많은 말들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여기를 봐달라고.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보고 도와달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해달라는 기도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지금 다윗이 구하는 ‘정의’는 하나님께서 힘으로 구원해 주실 때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 아브라함, 이스라엘, 예수, 임마누엘 등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 여호와, 엘로힘,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샬롬 등의 여러 이름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고 각각이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표현한다. 

 이렇듯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본성, 성품, 속성을 드러내고 그래서 하나님의 명성,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 자체를 의미한다. 이렇기 때문에 시편 52편 9절과 같은 경우는 “주의 이름”을 그냥 “주”로 읽어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시편 등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름”이란 표현을 쓸 때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에 따라 이루시는 역사에 대한 확신이 문맥인 경우가 많은데, 1절 말씀도 그러한 경우다. 다윗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따라 행해 주시기를 구한다. 여기서 다윗이 염두에 두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1절 후반절에서는 ‘힘’이고 5절에서는 ‘성실하심(진리)’, 6절에서는 ‘선하심’이다.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시어 그를 돕고 생명을 붙드시고(4절) 원수를 갚으시고 원수를 멸하실 수 있으심을(5절) 확신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먼저 이렇게 자신을 도울 수 있는 하나님을 부른다. 그리고 이제 그 이유를 말한다. 그가 처한 객관적인 상황은 이미 앞에서 살펴봤고, 다윗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3절에서 볼 수 있다. 

 

이유(3절) 

시 54: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다윗은 뒤에서는 “내 원수”(5절)라고 표현한 자신의 대적들을 여기서는 “낯선 자들”, “포악한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낯선 자는 주로 이방인을 가리키고 포악한 자는 두렵게 하는 자들이란 의미다. 십 사람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이고 사울도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은 낯선 자들처럼, 즉 이방인들처럼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났고 그의 생명을 찾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기”때문이다. 

 52편에서 다윗은 도엑에 대해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은 자”라고 말했고(7절), 53편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백성들을 먹고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고 말했다(1, 4절). 결국 하나님을 부정한 결과가 이런 악한 일들로 드러난다.  

 다윗을 찾아 죽이려던 사울과 그의 편에 서서 그를 도왔던 십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는 않았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울은 자신의 왕위와 인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십 사람들은 왕의 환심을 사기위해 행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제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 다윗을 대적하는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다. 

 (셀라)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 배신 당한 상황, 앞으로 어떻게 될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도움이 필요한 상황, 피할 곳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 때 다윗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불렀다. 어린아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엄마 아빠를 찾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한다. 그 이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에 자신이 어떻게 화답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다윗은 두 가지로 화답한다. 첫째는 확신이고 둘째는 감사다. 그래서 그는 확신의 기도를 드리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 

 

II. 주의 이름을 생각하다(4-7절) 

확신(4-5절) 

4절의 시작은 “보라”다. 다윗을 죽이려는 대적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다윗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며 그 의미를 언급한다. 

 시 54: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은 나를 치고 내 생명을 찾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고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럼 결과는 어떨까? 두 팀이 각각의 방향으로 줄을 당기는 줄다리기를 하면 어느 팀이 이길까? 센 팀이 이긴다. 이기는 팀이 센 팀이다. 그런데 줄다리기를 하다보면 해보기도 전에 누가 이길지 뻔히 보일 때가 있다. 만약 내기를 하는 상황이면 전부를 걸어도 모자른 것 같은 그런 상황이 있다. 

 지금 다윗이 보고 있는 상황이 딱 그렇다. 3절에서 말하는 상황, 그리고 우리가 살펴봤던 상황만 보면 다윗이 큰 위기에 처해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편에서 줄을 당기고 있는 하나님을 주목한다면 불안보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보는 것을 넘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있느냐다. 바로 본다고 해도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여전히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아이가 어쩔줄 몰라할 때가 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맹목적인 믿음이라도 있어서 부모의 말에 그냥 따르는데, 조금 자라면서 세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보고 이해하기 시작하면 부모의 말을 신뢰하는게 어렵기도 하고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뛰어”하면 뛰었던 아이가 이제는 “안돼. 무서워”라고 반응하면 “괜찮아”라고 하며 왜 괜찮은지를 설명해서 상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하는 때가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불렀지만 그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면 문제는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돕는 분이시고 그의 생명을 붙들고 계시며, 그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찾는 자들보다 강한 분이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다윗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두 편이 있는데 누가 이길지가 뻔하게 보이는 그런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의 확신은 확신의 기도로 이어진다. 

 시 54: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악으로 갚으시리니”는 하나님께서 악한 일을 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문자적으로는 “그 악으로 갚으시리니”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다윗의 대적들이 다윗에게 행하려던 그 악한 일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로 되돌리실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진리로,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기도다.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할 때 다윗은 먼저 확신의 기도로 화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감사의 예배로 화답한다.  

 감사(6-7절) 

시 54:6–7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7절은 마치 3절의 모든 어려움이 끝난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이 시를 기록한 시점에서는 아직 그렇지는 않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많은 일들을 되돌아 보면서 다시 한번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앞의 줄다리기 예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줄다리기에서 항상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으로 행하셨던 모든 일들, 또한 행하실 일들을 생각할 때 다윗은 자연스럽게 6처럼 화답한다. 

 “낙헌제” – 즐겁게 드리는 제사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베푸실 때 즐겁게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의 시작에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주시기를 구했던 것처럼 여기서는 “주의 이름”에 감사할 것을 다짐한다. 다윗이 그에게 선을 행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고 예배할 때, 그 즐거움은 다윗 뿐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예배의 의미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에게도 큰 유익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즐거워하게 하시고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신다.  

 다윗이 즐거움으로 드를 감사의 제목은 이것이다. “주의 이름이 선하시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생각할 때 많은 것들이 생각날 것이고 각각이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감사는 이것 하나로 모인다. “주의 이름이 선하시다”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당연한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당연한 듯 누리고 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마치 나에게 당연한 것을 빼앗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그런 상황이 끝나도 감사할 것이 없다. 그저 마땅히 내가 누릴 것을 다시 누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우리는 여기 다윗처럼 고백해야 할 것이다.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실제로 십 사람과 관련된 두 번의 사건의 결말은 이랬다. 1) 다윗을 찾던 사울이 블레셋의 침공으로 돌아감 2) 다윗을 찾던 사울을 오히려 다윗이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생김.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사울을 죽이지 말것을 강력하게 명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도전 

때로는 성경의 가르침들이 오늘날의 나와는 좀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가르침에 반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어려움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니 하나님도 침묵하시는 같을 때가 있다. 

 시편을 읽으면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이 시편의 저자들이 참 우리와 같다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어려움을 당했다. 그들만 당하는 것 같은 어려움, 하나님께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시지 않는 것 같은 당혹스러움을 겪었다. 아마 우리가 시편을 쓰고 시편을 기록한 사람들이 그 시편을 읽으면 우리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가르침이 나와 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냥 “하나님”이라고만 하지 말고 그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아버지”라고 부를 때도 그렇다. 하나님은 그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래서 그 이름은 하나의 약속이기도 하다.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이름들, 성품들을 배우고 그 안에 있는 약속을 믿고 사는 것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든 반드시 필요하다. 

 마음이 무너질만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생각했다. 그것이 그에게 확신을 주었고 감사할 수 있게 했다. 그 마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에 따라 살 수 있게 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어떻게 그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와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이 땅에 보내셨다. 아들 예수님도 기꺼이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셨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자. 그리고 확신 중에 예배하는 삶을 살자.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을 선포하는 삶이고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