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본문 말씀은 한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해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인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외지에 나가있던 여러분의 아들이 와서 저녁밥을 먹여야 하는데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릇을 들고 이웃집에 가서 밥을 좀 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내 자녀를 위해 준비한 밥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다름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셨고 먼저 자녀로 배부르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구원의 첫째 대상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과 저는 주님이 보실 때 ‘개’인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을 고치고 축복할 수 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축복하시고 요셉 이후에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가나안 사람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들의 죄악이 아직 심판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이르기 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모세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진멸하라고 명하십니다. 당시 가나안 민족도 그러하고, 노아 홍수 이전 상태와 소돔과 고모라 등을 보면 인간들의 타락상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날도 그때와 비슷합니다.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정부가 있고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 목사가 동성애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옛 가나안 땅에서 행해지던 온갖 죄악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계속해서 관여하십니다. 그들의 정욕대로 살도록 그냥 두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거나 재앙을 내리시는 등 그들을 도우십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청했는데 어떤 이는 장가가야 한다고 어떤 이는 밭을 사야한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 때 주인은 산과 들로 다니며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저는 자, 앞 못 보는 자 등,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을 불러 자리를 채우게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메시야를 보내셨는데, 잔치에 초청한 사람들 중 더러가 오지 않았고 그 자리를 이방인들로 채우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방인 고넬료가 하나님을 섬기고 경건하게 살 때에 하나님은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상종치 않았고 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 받은 이유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습니다.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각종 더러운 네 발 달린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혐오하는 짐승들을 하나님께서 잡아 먹으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남아에서 음식으로 먹는 귀뚜라미, 굼벵이 등의 짐승들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그와 같이 혐오스러운 짐승들이 다름아닌 우리들입니다. 베드로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갔을 때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주님의 족보를 보면 이방인들이 드물게 등장합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대다수가 유대인들이고 이방인의 수는 매우 적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아갔던 이방인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한 이후 “주님 옳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이 먹다가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주인이 먹다가 떨어트린 부스러기를 얻어먹게 된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마음은 참 높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구원에 가까이 왔다가 영원히 그 기회를 잃어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종교로 빠져 참된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이 여인처럼 은혜를 입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행운아 중에 행운아가 아닙니까? 내가 이방인으로서 구원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쁨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원받지 않았다면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지옥으로 향해 가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부귀와 권세를 가지던 사람도 지옥에 가서 과거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고 더 이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3:1)”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처참해질까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죄악 가운데 자신의 삶을 망가트리며 살아갔습니까(롬1:28-32)?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내려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내 삶에 관여하시고 우리를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 것,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감사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이방인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가나안 여인의 삶은 처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녀와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눈을 떠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보고 영접하게 하시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구원받기 전,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약속도 없는 자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소망 가운데서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