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입다는 믿음의 영웅일까?

본문: 사사기 12장 1절 ~ 15절

설교자: 이병권

 

지난 시간에 입다의 비극적인 사건을 살펴봤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경솔하게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고, 서원의 결과로 하나뿐인 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뿐인 딸을 전쟁에서의 승리와 바꾼 것과 같습니다. 이방민족들이 했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따라 한 것입니다.

너무도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비극적인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살펴볼 입다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또다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딸을 바친 일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일입니다. 입다의 가정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파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입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입다를 과연 믿음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 각자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본문의 사건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에 그 소식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두루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 입다를 만나러 옵니다. 그냥 입다에게 인사하려고 방문한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에브라임 사람들이 싸우기 위해 무장을 하고 왔습니다. 전쟁은 이미 끝이 났는데 전쟁을 앞둔 것 같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와서 입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1)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은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도 불렀어야지 그럼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식의 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불만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지금 전쟁이 끝난 후에 와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정작 전쟁 중에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을 때, 위험을 무릅써야 했을 때는 모른척하고 있다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위험이 없어지고 나니까 그제야 나타나 괜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걸까요?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그렇게 싸우고 싶었으면 미리 올 것이지, 고생한 사람에게 와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입다의 대답을 참고하면 암몬과 싸울 때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었습니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승리를 확신할 수 없어서 전쟁에서 한 발 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니까 뒤늦게 나타나 입다를 견제하며 이스라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입다는 그동안 암몬의 압제에서 건져준 은인과도 같은데, 지난 18년 압제기간동안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생떼를 부리는 겁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에 기드온이 미디안을 크게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후에도 뒤늦게 와서 뒷북을 치며 이와 같은 일을 했었습니다.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냐고!’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만났습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화를 풀어주며 달래주었지만 입다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사람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지금은 기드온 때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엇이 다를까요? 세 가지 정도, 다른 상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기드온과 입다는 서로 다릅니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기드온과 입다의 인물됨을 살펴볼 때, 기드온은 소심하고 의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반면에 입다는 거침이 없고 저돌적인 인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했던 말이 기드온에게는 통할 수 있지만, 입다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군사적인 상황이 서로 다릅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따르는 군사들이 3백 명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에브라임 사람들과 싸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다릅니다. 입다는 따르는 사람들, 잡류들이 있었고, 많은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를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지도자로 인정받은 입다에게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셋째로 에브라임이 했던 말이 다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는 ‘우리를 이렇게 대접한 것이 어찌된 일이냐!’ 정도의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입다에게는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에브라임 사람들이 한 말을 보면 도가 지나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입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요? 여기 에브라임 사람들이 말한 집이라는 것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너의 집에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너에게 속한 사람, 가족을 불태우겠다는 말입니다. 입다는 이미 하나뿐인 딸을 불에 태워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 입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그 상처와 아픔을 들추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지, 경솔한 말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픈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입다의 이야기는 반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입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참을 수 없을 만큼 속에서 불이 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입다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3)

입다에게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시비를 받아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에브라임의 위선을 비난하며 길르앗 사람들을 모읍니다. 협상가인 입다가 어떤 협상의 노력도 보이지 않은 채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을 설득하기보다 그냥 그들과 싸우기로 합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평소에 에브라임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다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며 싸우기 위해 모여듭니다. 이번 기회에 에브라임을 굴복시켜서 그동안의 빚을 갚겠다는 생각입니다. 4절에 에브라임이 길르앗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4)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을 비꼬는 말입니다. 길르앗 사람은 도망한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던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강 동쪽에 자리 잡은 것을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전쟁에서 길르앗 사람들이 도망을 갔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이스라엘에도 지역감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역감정으로 더 사기가 오른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을 쳐서 무찌릅니다.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승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기록만으로 생각하면 정말 싱겁게 그것도 간단하게 끝이 납니다. 마치 사사기의 저자가 이럴 거면 왜 시비를 걸었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싸움의 결과가 한 절도 안 되는 분량으로 그냥 끝나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한 길르앗 사람들은 도망가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추격합니다. 앞서가서 요단강 나루를 지키며 에브라임 사람들을 빠짐없이 죽이려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들 중에서 에브라임 사람들만 골라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신분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에브라임 사람을 구분했을까요?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구분했던 방법은 간단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에게 “쉽볼렛”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리고 ‘쉽볼렛’이라고 발음을 제대로 하면 통과시킵니다. 하지만 ‘쉽볼렛’이 아니라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면 에브라임 사람으로 알고 잡아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4만2천명입니다. 엄청난 비극입니다. 이 사건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심각한 타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4만 2천명의 사람이 죽었는데 그 피해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어떤 가정에서는 아들이 사라졌고, 어떤 가정에서는 남편이, 어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4만 2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적이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부터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입다는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에브라임 사람들이 먼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도망간 사람들까지 쫓아가서 잡아 죽이는 것은 정말 악한 일입니다. 이 사건은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연합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 때에 볼 수 있었던 지파들 간의 갈등은 이렇게 더 발전되었고, 후에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더욱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을 잊고 엉뚱한 대상과 싸우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시대든지, 어떤 장소든지, 어떤 대상이든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은 그 공동체 내부에 있습니다. 외부의 적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길 때는 적과 싸우기 위해 힘을 모으고 공동체가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같은 편끼리 서로 적이 되어 싸울 경우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럴 경우는 더 크고 심각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진짜 어려운 일은 강한 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이 적이 되는 일입니다.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교회라는 영적인 공동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에 왜 문제가 생기고, 왜 갈라지고, 왜 다툼이 생길까요?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왜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길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핍박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대다수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입니다. 함께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함께 주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막상 이해관계가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면 달라집니다. 때로 성도의 실수나 무심코 던진 말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마음상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적대적인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을 닮아가는 중에 있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서로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약점도 있습니다. 함께 지내다보면 부딪히는 부분도 있고 서로 모난 부분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한 가족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주님을 위해 수고함으로 서로를 세워주는 한 지체입니다. 한 몸입니다. 적이 아닙니다.

사람의 병중에는 자가면역질환 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몸에 있는 면역세포가 자신의 세포와 자신의 세포가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세포를 공격하는 병입니다.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몸을 공격하니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로서 우리는 같은 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주님의 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와 다투는 일은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 그 이상의 일이 됩니다. 내가 내 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형제와 자매와 서로 다투지 마십시오. 지체와 싸우지 마십시오. 내 몸입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여러 일을 겪게 되고 안 좋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돌이키는 일입니다. 이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마음을 다잡으시기 바랍니다. 내 손과 내 발이 서로 싸우고 있다면 누구 손해일까요? 누구에게 그 피해가 돌아갈까요? 결국은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툼이 생기기 전에 그만!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입다는 어떻게 했습니까? 입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입다의 이야기는 이 사건 후에 갑자기 끝이 납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다스린 기간은 육 년입니다. 그동안의 사사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통치기간이 언급되면서 함께 나오는 말이 입다에게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사가 통치하는 동안 그 땅이 평온했다는 말입니다. 입다가 한 일이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죽인 일인데, 그것도 4만2천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 땅이 평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땅에 원망과 분노가 오래도록 계속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입다의 이야기가 끝나고 세 명의 사사들이 짧게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중에 아무도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어떤 민족에게 압제를 받았는지, 사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자격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사사였음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사기의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라엘은 점점 더 타락해가고 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진 사사들도 점점 더 그 자질이 의심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사사 중에서 기드온이 전환점이 되었는데, 기드온 때부터 사사로서의 자질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의 경우는 기드온보다 더 흠이 많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다음에 살펴볼 삼손입니다. 기드온이나 입다는 그래도 조심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욕심을 추구했다면 삼손은 대놓고 그러한 일을 합니다. 자기 욕심에 따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사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자기 욕심대로 살았던 인물입니다.

이런 사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이들을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영웅들이 기록되면서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히11:32).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입다의 삶을 보면 그를 믿음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딸을 번제로 바치고,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명을 죽였는데 괜찮을까요? 아무리 암몬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믿음의 영웅으로 말하기에는 그가 했던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의 무게가 훨씬 더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마치 위인전에 읽는 것처럼 사사기를 보는 겁니다. 사사가 했던 좋은 일을 크게 부각시키고 그 일에 집중하고 그 외의 일은 최대한 좋게 포장하며 대충 넘어가는 겁니다. 기드온의 경우 삼백 명의 군사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마치 삼백 명의 군사가 기드온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의 의외의 모습을 보면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그럴만한 믿음의 영웅일까요? 사사기를 보면 어떻습니까? 반복해서 의심하며 주저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계속 함께 하셨습니다. 기드온이 대단한 게 아니라 기드온을 사용하신 하나님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입다의 경우는 어떨까요? 입다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합니다. 입다는 딸을 번제로 바칠 정도로 하나님과의 서원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딸을 아끼지 않을 만큼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모르고,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모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보는 그들의 모습은 믿음의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의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히브리서의 인물들이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특정한 일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 인물들의 삶,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두가 우리가 본받을 만한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믿음의 영웅으로 라합이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의 영웅인 라합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몸을 파는 일을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녀의 믿음을 기념하며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입다도 그러합니다. 입다가 히브리서에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입다의 삶이 우리가 본받을 만한 믿음의 삶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입다를 두고 믿음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은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흠이 있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사용하셨고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자격 없어 보이는 기드온이나 입다나 삼손 같은 자도 믿음의 영웅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그 인물들의 뛰어남 보다는 그 인물들의 부족함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격이 없는 자들인지,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자들인지, 계속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볼 때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은 부족한 그들에게 능력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은 거듭 불순종하는 그들에게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 하나님은 그 엉망인 재료들을 택하셨고 그 엉망인 재료를 가지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내세울 것이 있을까요?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한 게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받아주셨습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믿음의 영웅으로 불러주셨고 믿음의 영웅들이 갔던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지 못할 때가 많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불순종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주님이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것은, 계속 주님의 영광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믿음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은혜를 바라며, 그 은혜를 기대하고, 주님의 은혜에 푸욱 젖어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