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제는 싸울 준비 하라
본문: 누가복음 22장 35절~38절
설교자: 조정의

3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절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나누신 마지막 대화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어 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 마가, 요한은 이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고, 오직 누가만 예수님의 다락방 마지막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슨 교훈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낭, 전대, 검 잘 챙겨라”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네, 여기 검이 두 개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시며 네 구절로 이루어진 누가의 기록이 끝이 납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제자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왜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그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의 손끝을 통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같은 교훈을 남기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남기기 원하셨던 그 교훈을 확실히 받으시기 원합니다.

1. 예수에 대한 세상의 반응(35절)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겪었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3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이 말은 과거 어떤 시점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셨던 일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 일은 일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로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9:1-6).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고 전도하러 갈릴리 각 마을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셨는데,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기억나게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이들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접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그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만일 영접하면 그 집에서 머물면서 환대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제자들을 받아준 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환대하고 영접할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지팡이나 배낭, 양식, 돈, 여분의 옷을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기쁨으로 영접할 이들을 기대하며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상기시키며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때 부족한 게 있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배낭도, 전대도, 지팡이도, 여분의 옷도 챙겨가지 않았지만 하나도 부족함 없이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을 영접했던 이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비슷한 훈련이 칠십 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 또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보내져,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전대나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열두 제자처럼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그 집에서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0:1-16).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접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는 동네에서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셨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전하라고 보내신 제자들 역시 같은 배척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때는 제자들을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낭도, 전대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이 공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일을 떠올리게 하신 것일까요? 바로 다음 말씀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맞설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에 대한 달라진 반응(36-37절)

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예수님은 “이제는”이라고 때를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뭔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에 지시하신 말씀이 이제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전대(지갑)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전대를 가지라고 하셨고, 과거엔 배낭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검에 대한 명령이 나오는데, 이제는 검이 꼭 필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검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겉옷은 단지 몸을 보호하거나 따뜻하게 하는 많은 의복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패션 아이템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유대인에게 겉옷은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여러 겉옷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고, 대부분 한 벌의 겉옷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고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는 등 겉옷은 그들의 생필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저당잡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겉옷을 빼앗는 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이 유대인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눅 6:29). 그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며 이제는 그 귀중한 생필품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전대, 배낭, 칼 이제 모두 직접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칼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대, 배낭과 함께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제 그들에게 닥칠 위협과 공격에서 그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일까요?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예수님의 손에 왜 못을 박으려 할까요? 다른 이를 부요케 하려고 가난한 삶을 택하여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희생적인 섬김을 보이신 그분의 머리에 왜 가시관을 씌우려 할까요? 왜 겸손과 온유를 옷 입으신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때리며 침 뱉고 조롱하려는 것일까요? 왜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런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하신 뜻에 따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인용한 부분입니다.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 “그가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희생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사야 53장 말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백성의 허물을 대신하여 찔리고, 백성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징계를 받고, 백성이 낫게 하려고 채찍에 맞고, 백성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는 하나님의 택한 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가 유대인의 손에 잡혀 심문당하고 로마 법정의 불합리한 판정에 의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불법을 했거나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의 손을 통해 700년 전에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잔을 함께 마시며 분명하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 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뜻대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이 핍박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 나가는 또 한 사람의 죄인, 강도나 살인자 같은 범죄자에 불과했습니다.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사 53:3). 그가 당하는 고난과 징벌은 예수 본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맞는 마땅한 형벌이었습니다(사 53:4).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심문과 곤욕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에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하고 핍박하고 비웃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여기고 거칠고 혹독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같은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거칠고 혹독한 핍박과 거절이 제자들을 향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대와 배낭 그리고 검을 준비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엔 예수님의 분명한 경고와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그는 주님이 먼저 당하신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렇게 거절을 당하셨다면, 그 제자들 역시 거부를 당하고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오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18-20)

여러분,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편에 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이 곱게 바라볼 리 없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직장 회식 자리에서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술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할 때 핍박이 있습니다. 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절제하며 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의 비웃음을 당합니다. 힘듭니까? 괴롭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각오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칼을 가지고 미리 대비하고 맞설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말세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살다가는 욕먹고 업신여김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외롭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대비하라. 각오하라.

여러분,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삶이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해서 아무런 그늘도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사형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7).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실제로 예수님 당시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기도 하고, 본인이 잔인무도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열 한 제자 역시 모두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순교 당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기독교의 참모습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말하는 기독교가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좋은 일만 가득 일어날 것이라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뭐든 긍정의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다 잘된다고 축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해 핍박받을 각오를 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한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그분과 함께 왕으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내 안전과 평안, 안락과 쾌락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값진 분이신가? 내 가족보다 친척보다 더 그리스도가 귀한 분이신가? 정말 내 목숨보다 그리스도가 더 존귀한 분인가? 예수님은 망대를 세울 때 비용을 계산하는 것처럼, 적국과 싸울 때 일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처럼, 계산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3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보배로운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세상 무엇과, 이 세상 누구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연 다락방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3. 예수에 대한 제자의 반응(38절)

38절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38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예수님이 지금 사람들을 찌르고 죽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입성하신 것, 성전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 그리고 성전을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메시아, 왕으로서 지금의 권세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부흥기로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 좌편과 우편에 앉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는데(요 11:16), 예수님이 진짜 죽으러 가는지 생각도 못 하고 한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싸우실 때 같은 편으로 끝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준비하라고 하니, 곧 메시아의 왕국 탈환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두 개의 칼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잘랐으나, 곧바로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요 18:10-11).

기대했던 왕이 순순히 잡히는 걸 본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수년을 가르쳤지만,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제자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칼 두 개면 충분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귀한 일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따라오는 고난과 박해를 각오하고 감수할 만큼 충분히 가치 있고 남는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내게 영생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 하나로 만족하며 영원히 감사할 수 있었던 우리가 점점 그분이 주시는 것, 주시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그분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계산하며 마지못해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박해에 놀라며 그리스도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교훈이 필요합니다.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삶에 박해가 있을 것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3:17). 그가 따르던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벧전 4:12).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벧전 4:13). 주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가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여러분, 우리에게도 영원한 가치를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현재 받는 고난보다 장차 받을 영광이 지극히 큼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즐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알 때 그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들었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아직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 채찍질을 당하고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행 5:41). 드디어 그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교훈을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고, 핍박받을 때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당하는 모든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가 계시는 그곳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을 기쁨으로 가시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