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본문: 사도행전 4장 1-22절

설교자: 조정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 적이 있는가? 가장 최근에 예수님을 말하다가 위협이나 경고를 받은 적이 언제인가? 성경은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다(딤후 3:12).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 경건한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은 박해가 보장된 삶이다.

오늘 우리는 초대 교회가 경험한 첫 번째 박해를 살펴볼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40여 년 동안 앉은뱅이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켰고, 그 놀라운 표적을 보고 모여든 수많은 사람에게 표적이 가리키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 일로 인해 그들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그들처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 원한다.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사도의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하기 원한다.

1. 구속(1-4절)

사도들(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의 행각에서(행 3:11) 모여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말할 때에, 1절), 그 가운데 갑자기 들이닥친(이르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사장들성전 맡은 자사두개인들이었다(1절). 

그들은 두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붙들어 체포하기 위해 기습한 것이다(잡으매, 3절).

불과 몇 주 전에 이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구속하고 심문하고 로마 재판에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한 자들이다. 그걸로 일단락됐다고 생각했을 그들 앞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타나 또 그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치아픈 이름, 예수(요 11:45-53).

특별히 이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싫어했던(짜증나다, 격노하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들은 제사장들로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예식을 집행하는 높은 직책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평민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친다니 참으로 건방진 이들이 아닌가?

가르치는 내용도 문제였다. 제사장직을 독점했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외의 성경을 권위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혼은 몸과 함께 소멸되기 때문에, 부활도 천사도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니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한단 말인가? 구약 성경에 정통한 바리새인 랍비면 논쟁을 하겠지만, 이들은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들은 성전 맡은 자(단수)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성전 보안 책임자로 제사장 바로 밑의 지위를 가지고 성전의 보물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성전의 경비대장들”, 눅 22:52-54).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체포했고(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다(3절). 아마도 안토니아 요새에 가두었을 것인데 유대인 성전 경비와 로마 병력이 함께 지키는 철통같은 감옥이었다(바라바, 강도, 살인). 거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주눅 들고 겁을 먹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감옥에서 제자들은 주님이 체포당하신 밤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20). 제자들은 그 말씀 그대로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을 체포하고 강금했던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증인들을 똑같이 체포하고 강금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박해를 감수하고 담대하게 선포한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생겼다. 그것도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여자 포함 약 만 명)이 구원받는 사람으로 더해졌다(행 2:47).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약 25,000 ~ 85,000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증인과 제자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셨으니 우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박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비방이나 조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4). 그리스도로 인하여 박해를 많이 받은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했다(롬 8:17). 주께서 지금도 우리의 증언을 통해 믿는 자를 날마다 더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2. 재판(5-12절)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5절).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국회+대법원) 산헤드린 공회를 열기 위해서다. 공회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했다(6절). 최고 우두머리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으로 실세였고, 그 사위인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 그리고 그 가족들 모두는 성전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세력이고, 예수님을 처리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요한은 베자 사본에 요나단이라고 나오는데 안나스의 아들로 가야바 이후 대제사장이 됐고, 알렉산더는 알 수 없다.

그들은 몇 주 전 예수님께 했던 대로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반원 모양으로 둘러쌓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흥미롭게도 이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이다(눅 20:2).

몇 주전 예수님께 유죄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던 장소에서 71명의 분노한 고위 관리들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 진실로 성령님은 이 때 베드로에게 할 말을 가르치셨다. 베드로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다(8절).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9절). ① 먼저 베드로는 앞에 있는 자들을 존중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② 그리고 그들의 질문을 조정하여 오해를 바로잡았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9절). ‘우리는 죄가 없다’고 확실히 선언한 것이다. 우리가 행한 일은 착한 일이다. 안식일에 행한 것도 아니고, 율법을 어기면서 한 일도 아니다. 사십여 세나 병 나은 사람을 구원한 참으로 선한 일이 맞지 않은가?(22절).

③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물었던 질문에 답을 한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으로 이 선한 일을 행했는지 설명한다. 이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헬: 소조), 육체의 질병에서 치유됐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새롭게 된 구원은 바로 다음에 제시한 분의 권세, 그분의 이름으로 된 일이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

그들이 그토록 짜증 내고 혐오했던 이름,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름, 나사렛 예수. 하지만 그들이 도무지 믿지 않았던 부활을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루셨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그분이 참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바로 그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된 것이다. 절대로 거부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증거 1호가 그들 눈앞에 서 있었다.

베드로는 이어서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그들이 절대로 그리스도를 거절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선포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이 말씀은 불과 몇 주 전 예수님께서 그들과 성전에서 논쟁하실 때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셨던 구절이다(눅 20:17-18).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는 다음과 같다(눅 20:9-18). 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에 있으면서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계속 그들을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다. 세 번이나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냈다. 그는 존대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악한 농부들은 도리어 독생자를 죽였다. 예수님은 이야기를 듣던 그들에게 물으셨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침묵).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그들은 놀랍게도 “결코 그리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흠정역).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았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와 같은 심판을 내리지 않겠는가?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뻔뻔하게 주장했다(눅 20:19).

그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이 베드로가 다시 언급한 시편 118편 22절이다.“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 20:17-18).

건축자들이 모퉁이의 머릿돌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쉽게 버리는 돌처럼 그들은 예수를 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터와 반석, 기초석이 되게 하셨다. 누구든지 그분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절). 예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복음의 핵심이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교회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으며 악한 일로 고난을 받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배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만일 선한 일로 천국에 간다면, 각자 자기 신앙의 진실성을 인정받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면, 여러 예식이나 봉사나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면, 종교는 각자 다른 모양이지만 결국 종착점은 같다면,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유일한 길이다. 좁고 편협하다고 비난받아도 이 진리는 굽힐 수 없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로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나님 아버지께는 그분의 영광을 충만하게 보여주실 독생자 예수 외에 다른 자녀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 참 진리, 고귀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3. 판결(13-22절)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자들은 당황했다. 베드로와 요한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그들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13절). 유대인으로서 기본 교육(히브리어 읽기, 쓰기, 유대 역사, 경전 암송)을 받았지만 유명한 랍비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니 대학자들 앞에서 주눅 들고 자신감 없이 말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담대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 알아챘지만,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다(14절). 거의 만 명이 되는 사람이 이 일을 통해 예수를 믿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 16, 21절)이 놀라운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1절). 도저히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6절). 예수님처럼 몰래 잡아다 죽이지 않는 한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21절). 그래서 일단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15절).

16-17절은 그들이 공회에서 의논한 내용이다. 사도들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인데,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가말리엘을 통해 누가에게 알려진 내용일 것이다. 표적이 분명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데 달리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위협하여 더 이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자고 결의했다(17절).

흥미롭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들었을 때 똑같은 일을 했다. 부활의 표적이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도리어 돈을 주어 거짓을 민간에 퍼지게 했다(마 28:11-15).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대부분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서 혹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거부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거부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공회 앞으로 불려왔고, 그들은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 그들은 담대히 대답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절). 그들은 유대 최고의 법원 앞에서도 담대했다. 그들의 위협과 경고에 겁먹지 않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이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는가? 그들이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 역시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께서 “내 증인이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행 1:8; 마 28:20).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보고 들은 그 이름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과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핍박과 경고와 위협이 있어도 결코 그럴 수 없다.

2020년 1월 16일 선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작년에 하루 평균 8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매일 26개의 교회가 공격당했다고 한다. 세 시간에 한 명꼴로 순교하고, 한 시간에 한 개 이상의 교회가 공격을 당한 셈이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고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한다. 하지만 정작 그만큼 편안한 환경에서 우리는 복음을 얼마나 담대히 전하고 있을까? 어쩌면 조금의 불편함이나 거절, 비방이나 조롱이 두렵고 싫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게으름을 버리고, 두려움을 내어쫓고 담대하게 바울처럼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