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는 가족입니다
본문: 에베소서2장,로마서8장,요한일서
설교자: 최종혁

 

구원은 일차적으로 개인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에 물으실 질문은 “너희는”으로 시작하지 않고 “너는”으로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믿음 혹은 자녀의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는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생각해도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이 누구든 구원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도 “내가”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개인적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하나님은 ‘나’라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면서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인 교회로서도 구원을 하셨다. 따라서 이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구원의 가족 공동체적 측면(엡 2장)

에베소서 2장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이러한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바울은 2장 1-10절에서 구원의 개인적인 측면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허물과 죄로 죽었다(1절). 전반적으로 그런 상태였고 아닌 사람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런 상태였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2절)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랐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선포되었다(3절).

3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4절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알 것이다. 4절이 “그래서 하나님이”로 시작했다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이 되었겠는가. 진노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에 따라 보상하신다면 오직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약 4절이 “그래서 우리는”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3절까지 말씀이 묘사한 상태에 있는 우리가 어떤 선을 행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4절은 “그러나 하나님이”로 시작한다.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말한다. 그런 하나님이 비참한 상태의 우리를 바라보셨을 때 우리가 바랄 수도 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은혜다(5절).

이것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가 계속해서 선포된다(7절). 또한 이렇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어떠함이나 노력으로 얻어낸 것처럼 자랑할 수 없다(8-9절). 다만 이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한다(10절).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한 무엇을 위해 구원하셨는지까지 말했으니 구원에 대해서는 다 말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1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로 시작하면서 다시 독자들을 과거의 “그 때”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개인이 아니라 좀 더 넓은 공동체 “무리”를 언급한다. – 11절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인들은 이방인들이다. 이것은 단순히 민족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 받기 전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 12절

이들은 약속의 메시아와 관계가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따라서 아무 참된 소망도 가질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그들의 상태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셨을 때 모든 상황은 달라졌다. 4절에서 구원이 개인에게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을 이루었던 것처럼 13절은 구원 받은 무리에게도 놀라운 반전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 13절

12절에서 “밖”에 있었던 것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14절부터 바울은 “너희”가 아닌 “우리”를 사용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15절)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원수된 것이 있었다(14절).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했다.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지옥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고 만드셨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누군가 나를 그 정도로 싫어하면 나도 그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런 관계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하나가 되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거나 유대인이 이방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 둘이 한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진 일이다(15절).

바울은 이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 19절

더 이상 우리는 서로에게 단순히 외인이거나 손님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더 나아가 구원받은 자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단순히 같은 신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족이 된 자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요 1:12)라고 부른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한 아버지의 자녀들인 것이다. 예수님도 이런 영적인 의미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고 말씀하셨다. 구원 받은 자들은 가족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가장인 아버지로 둔 형제 자매들이다.

 

가족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요 1:12)

우리가 가족이라는 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가족은 아니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만 좀 더 직접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단순히 원수에서 원수가 아닌 자로만 바꾸신 것이 아니라 자녀를 삼아 주셨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의 권세, 즉 권리를 주셨다. 다른 말로 하면 입양하셨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입양도 비슷하지만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로마 입양 문화에서 핵심은 완전히 새로운 가족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입양 전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사회적, 법적, 재정적 관계를 끊어야 했다. 그렇게 입양된 자는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믿는 자들도 동일하다. 과거 우리의 아버지는 마귀였다. 그래서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 진노의 자녀였다. 죄와 율법 아래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거짓과 속임, 다툼과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 관계의 끝에는 고통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실 때 이 모든 것들은 우리와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 더 이상 과거의 관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실 과거의 관계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관계에 매여있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다. 즉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받은 자라면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된다.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한 데 딱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거나 이 사람들의 형제 자매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천국에만 가게 해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구원받은 자는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가족의 일원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갈 3:28).

어떠한 차별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한 가족이 된다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큰 감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별 감흥이 없거나 오히려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바울 당시의 상황에서는 유대인들, 자유인들, 남자들이 그런 손해보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굳이 다른 사람들과 가족이 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요즘같이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는 더욱 그렇다. 혼자가 편하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것은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이고 방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구원 계획에 포함하셨다. 구원에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부분만 내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구원의 모든 측면에 우리는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럼 이제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에 누리는 특권(롬 8장)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창조주이시며 왕이시며 자존자이신,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며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른다.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 아버지과 우리 사이에 있던 죄로 인한 분리는 사라졌다. 더 이상 우린 하나님의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다. 그분의 보호 아래 있다. 어떤 것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롬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 놀라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적용된다(28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에게 적용된다(33절).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셨다(32절). 이들을 하나님은 “많은 형제들”이라고도 부르셨다(29절).

하나님은 이런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롬 8:32). 자녀로서 우리는 이것을 기대할 수 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가장 좋을 것을 주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은 아낌없이 최고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이 약속되어 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

골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놀랍지 않은가! 원수인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되었을까!

살후 2:13-14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해주신 일에 감사하며 기업을 이어받을 날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애초에 각 사람을 자녀로 입양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하시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부르셨다.

 

우리가 가족임이 가지는 의미(요한일서)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이런 관계의 원리를 잘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요한일서에서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로 인해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요한은 “사귐”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관계, 교제가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회복되는 것이 구원에 있어 중요한 목적이다.

이 관계는 영적인 가족의 관계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 아비들, 아이들, 형제들, 사랑하는 자들, 하나님께로 난 자들과 같은 표현을 계속 사용한다.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를 가족 안에 있는 사랑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이 사랑의 관계의 시작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함께 자녀된 형제 자매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요한의 단순 명료한 논리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9-21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족 공동체다.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가 받은 사랑을, 그리고 그 사랑을 베푸신 아버지 하나님을 세상 속에서 선포하는 일을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족으로서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한 가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봐야 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관계를 만들고 우리의 관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성경이라는 책을 공부하는 독서 토론 모임이거나, 음악 밴드거나, 청소년/대학생 동아리거나, 사회 봉사 단체 혹은 동호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모여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족이란 개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어떤 일을 목적으로 모인 것이 가족이 아니다. 사랑의 관계이고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그 사랑을 닮아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하기를 힘써야 한다. 예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모습이 많이 달라진 현재에도 여전히 가족은 함께 하기를 추구한다. 그렇게 함께하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면 구원 받은 자는 다른 형제 자매와 함께 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는 부르는데 그분의 다른 자녀들과는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고, 사실 정말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신지를 고민해봐야할 문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혼자서도 충분히 신앙 생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지역 교회에 속하지 않고도 충분히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초기의 교회는 모이기에 힘썼다(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한 세대가 지날 때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격려했다.

히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함께 모여 사랑과 선행을 행하고 그것을 격려하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서로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주일에 한번 모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과 선행을 행하고 서로 격려하는 것은 주일에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언제나 계속해서 우리가 힘써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일에, 그리고 수요일에, 그리도 더 자주 우리는 함께 모여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다. 모두가 함께 모여 떡과 잔을 나누며 주와 교회가 하나됨을 선포한다. 설교를 통해 아버지를 더 알 수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깨닫게 된다. 함께 찬양과 기도로 우리의 감사를 표하고 동시에 복음을 선포하기도 한다. 우리가 가족으로서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면 이런 유익들을 누릴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에 하나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실 가족이라고 다 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어려움을 주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한다. 갈등이 있으면 해결하려고 하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같으면 안보고 말 일도 가족이기 때문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영적인 가족도 비슷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아직은 죄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 자들이기에 우리 사이에도 관계의 어려움은 생길 수 밖에 없다. 이런 어려움이 바른 것이거나 추구해야할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우리의 연약함으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때로는 누군가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순히 성향의 차이가 관계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것이 죄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다. 내가 누구보다 더 인정을 받아야 하거나 더 높은 곳에 올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잠깐 캠프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잠깐만 참으면 서로 앞으로 안볼 사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나된 가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관계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계속해서 하나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평화롭고 원만하며 따뜻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죄는 여전히 우리 관계에 문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멀어지는 것도 성경적인 해결은 아니다. 성경적인 해결은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엡 4:2). 그 핵심에는 그리스도 예수님 마음 곧 권리를 당연히 내가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있다(빌 2:5-6). 서로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뜻을 같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다.

 

우리는 가족이다

당신이 구원받은 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이다. 하나님 아버지만 계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또한 함께 형제요 자매된 많은 믿음의 가족들이 있다. 서로 다르지만, 마음으로 하나 되어 한 아버지를 위해 살아간다. 그러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