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가 담대히 바라는 바

본문 : 고린도후서 5장 1~10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은 환난 중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되새길 필요가 있는 사실, 또한 우리가 사모해야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한다. 이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의 목적을 가지고 확신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길 원한다.

1.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되새기라(1, 6-7)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하나의 사실을 다시 한번 그들에게 확실히 알려준다. 이 사실은 바울을 통해 그들이 배운 것이고, 알고 있는 것이며, 믿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하기 원한다. 

1절의 마지막을 보면 “있는 줄 아느니라”, 6절의 마지막도 “있는 줄을 아노니”라고 나와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온전히 붙들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흔드는 환경 때문이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를 물 위를 걷도록 하실 것을 알고 믿고 실제로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진 것처럼(마 14:30), 고린도 성도들 역시 그들에게 닥친 환난 때문에 알고 있던 사실을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역시 그러하다.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는 질병, 가정이나 교회 안에 일어나는 갈등 등 개인의 삶, 가정과 교회에 불어닥치는 바람에 우리는 한 없이 흔들리고 알고 있던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고린도 성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사실을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1절에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

바울은 비유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우리의 집”을 비교한다. 또한 하늘에 있는 집은 우리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집이라고 설명한다. 각각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 먼저 두 집의 소위 클래스가 얼마나 다를지 상상해 보라. 하나는 땅에 있다. 또 하나는 하늘에 있다(메이드 인 땅/하늘, 그것도 수제). 

땅의 장막 집은 일시적이다.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수리할 곳도 많아지고 낡아진다. 하늘의 집은 영원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셨다. 낡거나 가치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상 새롭다. 그렇다면 바울이 비유로 설명한 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절을 보면 그 대답이 나온다. “몸으로 있을 때.” 집은 몸을 의미한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바로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이다. 이 몸, 겉사람은 낡아진다(고후 4:16). 하지만 이 몸이 무너지면, 다른 말로 이 몸을 벗어버리면, 몸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영구적인 몸을 얻는다. 바로 이 사실을 고린도 성도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좋은 몸을 입고 영원한 삶을 산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현재 힘든 환경 속에 있는 우리에게 어떤 확신을 주는가?

우리는 현재 우리 몸을 괴롭히거나 두렵게 하는 일, 나아가 죽음의 공포를 가져오는 무서운 대상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육체적 환난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코로나, 혹은 건강이나 가정, 직장, 사회에서 겪는 괴로움이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맞이할 최악의 사건이 죽음이라고 해도, 이 육신의 장막을 무너뜨리면, 그것으로 우리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좋은 영구적인 몸을 입고 계속해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뿐이다.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라고 말한다.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항상, 어떤 환경에서도, 담대할 수 있다.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확신을 가질만한 환경이 못 된다. 베드로처럼 바다 위로 부는 심한 바람을 보면 가슴이 왜 떨리지 않겠는가?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라보면 정말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릴 것 같은 상황 속에 소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공포와 두려움이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육체가 겪는 고통 또한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다(참고. 고후 4:17). 베드로는 육신을 입으신 주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러했는데, 주님이 보이지 않는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러겠는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없다. 6절 말씀처럼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바닷속에 빠져들어 가는 베드로에게 즉시 손을 내민 주님은 그를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0-31).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고, 문제를 바라보면 믿음이 점점 약해지고 작아진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미 잘 알고 믿고 확신했던 진리를 의심한다. 그 진리는 우리 삶에 큰 위로를 주지 못한다. 아무런 확신도 주지 못한다.

참 서글픈 일이다. 더 좋은 육신을 입고 영원히 살 사람들이 죽으면 마치 다 끝날 것처럼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란. 이런 모습을 마귀는 너무도 사랑한다. 욥을 초주검까지 몰아붙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뽑으려 했던 것처럼 마귀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환경과 사람과 상황을 우리 눈앞에 갖다 대고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죽으면 끝날 사람들이 아니다. 더 좋은 육신을 입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사람들이다. 바람을 생각하지 말라. 파도를 생각하지 마라. 오직 주님만, 주님 주신 약속만 생각하라.

2.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사모하라(2-4, 8)

환난 중에 우리는 앞서 말한 사실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2절과 4절을 거의 비슷한 의미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2절은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로 시작하고, 4절은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으로 시작한다. 둘 다 “참으로”로 시작하는 것은 바울이 앞으로 이야기할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다.

바울은 우리가 여기 이 땅에 있는 동안, 이 장막 곧 우리 몸을 입고 있는 동안 탄식한다고 말한다. 4절에선 짐진 것 같이 탄식한다고 말했다. 둘 다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반복하여 탄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가 “탄식”이라는 말을 쓸 땐, 거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기 때문에, 바울이 마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사는 삶이 힘들고 괴로워서 탄식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쉽다. 하지만 2절과 4절이 말하는 탄식은 괴로운 탄식이 아니다. 고통스럽고 힘든 탄식이 아니다.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이 “탄식”은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탄식이다. 그러면 무엇을 간절히 사모하는가?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의 집, 처소를 입기를 진실로 사모한다.

4절에서도 바울은 똑같은 말을 한다. “짐진 것 같은 탄식”은 그 짐을 벗고 싶어서 하는 탄식이 아니다. 덧입고 싶어서 하는 탄식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원하는 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는 것이다. 죽을 몸을 생명의 몸이 삼키는 것, 같은 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 이사야 25장 8절을 인용하여 비슷한 설명을 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이것은 앞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확인한 사실이다. 신자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그리고 영속적인 몸을 입고 영원한 삶을 산다.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그 사실을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탄식하며 사모한다고 말한다.

8절을 보면 바울이 확신을 가지고 간절히 원한것이 무엇인지 나온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바울의 이 담대한 선언은 우리의 생각을 뒤흔든다. 정말 우리도 차라리 몸을 떠나는 것을 원하는가?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탄식할 정도로 사모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주 오래오래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얼마나 살다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담부터 노아의 아버지 라멕까지 대부분 구백세 이상을 살았다. 그런데도 우리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에녹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창 5:24).

그런데 에녹은 365세를 살다가 이 땅을 떠났다. 그의 아들 므두셀라보다 604년을 덜 산 것이다. 지금 나이로 계산하면 다들 90세까지 사는데, (아무리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하지만) 30세에 이 땅을 떠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원하는가? 에녹인가? 므두셀라인가?

30년을 살다가 가도 좋으니 이 몸을 떠나 차라리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을 당신은 확실히 원하는가?

이런 질문은 이 땅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내 마음이 있는 곳, 바라보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준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심이나 여러 가지 환난 속에 우리가 탄식하는 이유는 어쩌면 할수만 있으면 이 몸을 떠나지 않고 되도록 나중에 주와 함께 있기 원하는 우리 마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주님과 함께 하기 원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하게 혹은 더 많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가 짐처럼 지고 있는 많은 것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오직 주님만 원하고 주님으로 채워지기를(실제로) 사모하도록 우리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당신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 환난 앞에서 당신 마음을 진지하게 점검해보고 삶의 방향을 다시 한 번 조정하라.

3. 우리를 사랑 하는 주님을 위해 살라(5, 9-10)

마지막으로 환난 앞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위해 살려는 분명한 목적을 다잡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살펴보자. 5절 말씀이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신 분,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모두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5절에 “우리에게 이루게 하신” 이것이 무엇인가? 먼저 이것은 4절 마지막에 나오는 덧입는 것,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우리가 알고 믿는 사실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가 입을 하늘에 있는 집, 생명의 집을 지으셨다. 그것을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또한 그렇게 하시겠다는 확실한 보증, 약속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런데 바울이 5절에서 말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이루실 일을 사모하게 하는 일도 하신다. 그것이 5절에서 우리에게 이루게 하신다는 “이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했다(8:26). 여기서 성령이 구하시는 것은 우리 몸의 속량(23절)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몸의 속량을 일으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약속을 탄식하며 사모하도록 만드시는 분이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안에 성령이 계시는 참된 신자라면 당신은 바울처럼 진심으로 담대히 원하는 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크기는 달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이유, 이 몸을 떠나 차라리 주를 보기 원하는 이유는 이처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먼저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크게 확증된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롬 5:8). 그 사건은 오늘 본문과 흥미롭게 닮아있다. 죄인은 죄 있는 육신을 입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이룰 수 없다. 그런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에게 육신의 장막을 입히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스러운 집을 버리고 육신의 장막을 입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 입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 죄를 다 씻으셨고, 대신 그분의 거룩한 의를 우리에게 옷입혀 주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새로운 몸을 입게 하셨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자기 영을 주시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나눈 영적 진리, 육신의 몸을 벗을 때, 새 몸을 입게 하셨다(롬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 사랑을 받은 자는 삶의 목적이 매우 단순해 진다. 바울이 하는 마지막 결론을 보자. 9절.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다. 몸으로 있느냐 떠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주신 삶이고 주님때문에 얻은 삶이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것, 사모하는 것은 오직 주님때문이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다.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시는 주님,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다.

참 단순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원래 이렇게 단순하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다. 바울도 말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또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삶의 목적을 놓지 않고 충성스럽게 살았는지 평가받을 심판대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10절을 보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우리 중 예외가 없고, 필연적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새로운 몸을 입고 나서 맞이할 장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심판대(시상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한 것에 대한 상,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이 있는 심판대이다. 물론 여기서 벌은 구원의 상실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나무, 풀, 짚 같은 공적은 불에 다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헛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받게 될 부끄러움의 벌이다.

모든 상황 속에서, 환난 속에서 우리는 더욱더 명료하고 단순한 삶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 바로 주를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살아야 한다.

결론

만일 내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고, 치료할 곳이 부족하여 진짜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할까? 

만일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있다면 우리가 그동안 들었던 그래서 잘 알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저기 분산된 생각, 쓸데없는 곳에 머물렀던 생각을 훌훌 털어버리고 단순해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 이제 이 몸을 벗고 새 몸을 입겠구나.

우리의 감정 또한 단순해질 것이다. 그동안 알고 있던 그 사실이 나에게 실제로 와 닿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진심으로 사모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세상 여기저기 빼앗겼던 마음을 도로 찾아, 진심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그것을 담대하게 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바뀌면. 정말 빨리 이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고백이 나올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삶의 목적이 아주 단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내가 살아온 삶을 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내가 늘 보고 들었던 것들이 천국에 가서는 불에 타버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었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정말 단순한 거구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거였구나. 그런 후회가 밀려올 수도 있다.

다행이도, 우리는 아직 확진자가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장막을 벗어버리라고 아직 부르지 않으셨다. 당신은 어떻게 살기 원하는가? 당신의 생각을 단순하게 주님을 향하도록 정리하라. 당신의 감정을 단순하게 주와 함께 하는 것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채우라. 당신 삶의 목적을 단순하게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재조정하라. 이것이 모든 환난 속에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이고, 주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담대히 요구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