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왕의 신부에게
본문: 시편 45편
설교자: 최종혁

 

 

<신부>, 진보라

당신의 신부가 된다는 건 흰 드레스를 입고 꽃관을 쓴 신부일거란 생각은 없죠

그 험한 산도 넘고 골짜길 건너 주 계신 곳 따라가

살아도 주와 함께 있고 죽어도 주와 함께

살아도 주와 함께 있고 죽어도 주와 함께

 

이 시에서 신부는 흰 드레스나 꽃관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신랑과 함께하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신랑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험한 산이든 골짜기든 그의 신랑이 있는 곳이라면 가기를 원한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다.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신랑을 가장 원하기 때문이다.

신랑 역시 이 신부를 영원토록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신부를 가장 원한다. 이 사랑의 관계가 두 사람을 하나되게 한다. 정말 아름답고 헌신적이고 자발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혼의 모습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종종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를 이런 결혼 관계로서 묘사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를 주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결혼에 있어 핵심은 앞서 말한 자발적이며 배타적인 사랑의 언약이다. 결혼식에서 신랑은 신부만을, 신부는 신랑만을 평생 사랑하겠다는 서약을 한다. 어찌보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런 서약을 기쁨으로 한다. 다른 어떤 사람이 이 관계에 끼어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길 때 그들이 ‘음행’을 저질렀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신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표현한다.

시편 45편은 “사랑의 노래”로서 내용은 왕의 결혼에 대한 축가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과 다른 이방여인의 결혼으로 추정하고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을 배경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어느 시점에 쓰여진 이 시가 여러 왕의 결혼식에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한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시로만 보기에는 그 표현들이 과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이 왕은 은혜로우며 용사이고 악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매우 이상적인 왕이다. 역사 상 어떤 왕에게 적용해도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들이다. 6절에서는 이 왕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7절에서는 또 하나님과 왕을 구분한다. 3절의 영화와 위엄은 성경에서 거의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는 표현이다. 17절에서 만민이 영원히 찬송한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해결의 열쇠는 히브리서 1:8-9절에 있다.

히 1:8-9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이 말씀은 시편 45편을 어떤 왕의 결혼에 대한 시편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세우실 궁극적인 왕인 메시아에 대한 시편으로 이해해야 함을 알려준다. 즉 메시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모습을 그림자처럼 보여주는 것이 시편 45편이다.

이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림자는 실체의 전부를 보여주지 못한다. 즉 시편 45편의 모든 세부 사항이 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와 관련된 무언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그림자로서 분명히 강조하려는 것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서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크게 3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다. 두번째는 신부인 교회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함께 할 미래의 아름다움이다.

첫째로 우리는 왕의 신부로서 왕의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 그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신랑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두번째로 우리는 왕의 신부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왕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세번째로 우리는 왕과 함께 할 미래의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이 세가지를 차례로 살펴보자. 먼저 시인은 이렇게 시를 시작한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1절)

이 시는 일차적으로 왕을 위한 것이며 또한 그의 신부를 위한 것이다. 시인은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랑을 위하여 토스트를 하는 사람과 같다. 첫 부분은 “내 마음이 아름다운 말로 넘쳐나서”(바른 성경), “내 마음이 흥에 겨워”(쉬운말) 등으로도 번역 되었다. 마음 속에 기쁨이 가득하여 그것이 저절로 흘러 나오고 그것이 뛰어난 작가의 글처럼 말로 잘 표현되었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이 결혼을 축하하며 왕에게, 신부에게 한 마디씩을 하고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을 한다.

 

I. 왕의 아름다움(2-9절)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2절)

모든 사람들보다 아름답다. 외모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뒤에 나오는 여러 성품들, 자질들이 고려된 표현이다.

 

왕의 말(2절)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그 입술에는 은혜로운 말이 가득하다. 왕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가 백성들의 삶에 결정적이다. 이 왕은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왕이 아니라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왕이다. 하나님께서 그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신다. 그의 모든 필요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신다.

예수님은 이런 은혜로운 왕이신가? 그렇다. 요한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기록했다(요 1:14).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지만 은혜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입에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들을 놀랍게 여기기도 했다(눅 4:22). 예수님은 욕하지 않으셨다. 특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맞대어 욕하거나 위협하지 않으셨다(벧전 2:23). 그분이 하신 일들도 그러했다. 그분은 가난한 자, 소외받는 자들과 함께 하셨다. 자신을 위해서는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일도 하지 않으셨지만 남을 위해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는 일도 하셨다. 예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다.

 

왕의 용맹(3-5절)

3-5절은 왕의 용맹함을 말한다. 명령문의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실제적으로 왕이 하지 않는 일을 하라는 명령은 아니다. 오히려 노래를 잘 하는 사람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는 요청에 가깝다. 이미 가지고 있는 그것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3절)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4절)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5절)

왕은 용사다. 왕은 은혜로우면서 또한 용맹하여 자기 백성의 평안과 안정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은혜로운 왕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연약한 왕을 원하지는 않는다. 칼과 활을 들고 적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왕은 단순히 전쟁을 좋아하거나 이기적인 유익을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싸운다. 명분이 분명한 전쟁이라는 말이다. 거짓을 위해 교만한 자를 위해 불의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이 왕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진리, 온유, 공의를 위해 싸우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런 왕이다. 특히 영화와 위엄은 구약에서 거의 배타적으로 하나님께만 사용된 표현이다. 그는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으로서 이런 싸움을 한다.

성경에서는 다윗이 이런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겠지만 그 역시 온전하지 못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신가? 그분이야 말로 영화와 위엄의 옷을 입은 용사시다. 그분은 언제나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해 싸우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영적으로 사탄의 권세를 멸하셨다. 십자가는 표면적으로 예수님이 패배한 것 같이 보였지만 사실 십자가는 놀라운 승리였다.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은 이기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러했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천사 군대를 보내여 자신을 잡으려는 자들을 멸할 수 있는 힘이 그분에게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싸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인의 말처럼 만민이 왕이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러지는 그날이 올 것이다. 권능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다스리실 것이고 모든 무릎이 그 발 아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승리자, 용사시다.

 

왕의 통치(6-7절)

다음 6-7절은 왕이 통치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6절)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7절)

6절 말씀은 좀 갑작스럽다. 그동안 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왕이 하나님인가? 그럼 왕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대답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말씀이 그대로 예수님께 적용된다고 보면 전혀 의아하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보좌는 영원하다.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신다. 예수님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주의 주이며 모든 왕의 왕이시다(계 17:14).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왕들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그렇게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영원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왕이시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보고 있는 많은 불의, 억울함은 그날에 모두 바로 잡힐 것이다.

 

8-9절은 현재 결혼을 앞둔 왕의 모습을 묘사한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8절)

왕의 옷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고 그가 거하는 상아로 장식된 궁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결혼을 위해 특별히 더 아름답게 꾸민 것이지만, 왕은 항상 이런 것을 누리기에 합당한 존재다. 예수님도 그렇다. 예수님은 모든 아름다움 속에 거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영원히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며 모든 피조물의 찬송을 받으며 영광 가운데 거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교훈

이런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시다. 정말이지 완벽한 남편이다. 은혜롭고 강하고 공의롭다. 이기적이기 않고 온유하지만 승리자다.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다.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위엄이 가득한 분이시다. 이 왕을 바라보라. 이 왕을 알라. 당신의 신랑을 제대로 알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누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은 알다보면 부족함이 보이고 단점이 보여서 사랑에 빠지다가도 빠져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분이시다. 아름다운 신랑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것이 신부인 우리에게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일이다.

 

이제 시인의 시선은 왕비가 될 신부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9절)

많은 여인들이 있지만 왕의 곁에는 신부가 금으로 단장하고 서있다. 시인은 신부가 외적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말을 낭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부가 왕인 신랑에게 어떻게 합당한 신부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II. 신부의 아름다움(10-11절)

10-15절은 신부가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편에 서기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 왕의 옆에 서기 전에 신부는 준비되어야 한다. 핵심은 마음이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10절)

신부를 “딸이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시인이 아버지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나이와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는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권고하면서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첫째는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친정에 가면 안되고 그 사람들도 만나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그녀가 새로운 관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의 관계가 현재의 새로운 관계에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우선 순위가 바로 서야 한다는 말이다.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 신부는 아마 타국에서 왔을 것이다. 그 나라에서 자라면서 그곳의 모든 풍습, 규율, 가치관 등을 배웠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따라서는 안된다. 심지어 아버지도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있어 최우선의 권위에 있지 않다. 그것에 계속해서 매여있으면 안된다. 잊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11절)

그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이 될 것이고 왕은 그것을 바란다. 과거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뿐 아니라 새로운 관계에 온전히 충성할 것도 요구된다. 이것이 두번째 권고다. “경배하라”는 말은 엎드려 절한다는 의미다. 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며 복종의 표현이다. 여기서 시인은 신부에게 신랑에 대하여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그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즉, 종이 주인에게 온전히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굴욕적으로도 들릴 수도 있지만 경배한다는 말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포함된 헌신과 봉사다. 강제로 무릎을 꿇고 굴욕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왕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신부에게 요구되는 것은 과거의 관계를 버리고 현재의 관계에 들어오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다.

 

“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12절)

여기서 두로의 딸은 두로의 백성들을 의미하며 뒤에 나오는 부한 자와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유한 자들이 아무에게나 예물을 가져오고 은혜 입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보다 더 힘 있고 능력있는 자에게 그렇게 한다. 신부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왕과 결혼하여 그와 하나되기 때문에 그 모든 복과 영광이 그의 것이 된다. 하나됨의 축복인 것이다.

 

교훈

이것은 결혼 생활의 핵심도 되지만 신앙 생활의 핵심도 된다.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다. 우리 신랑이 왕인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왕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을 보라.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부모를 미워하고 내가 살아있는 것을 저주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하고 그것에 방해되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소극적인 모습은 신랑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다. 신랑을 사랑하고 싶지 않은데 사랑해야해서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신랑을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것이 죄는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기쁨을 주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괴로울 수 있다. 아니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랑을 가장 원하는 신부의 모습이다. 과거를 잊고 신랑을 경배하는 것, 그렇게 신랑과 하나되는 것이 신부인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제 시인은 이 신부가 왕에게로 나아가는 장면과 함께 앞날을 축복한다.

 

III. 미래의 아름다움

“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13절)

“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14절)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15절)

왕이 아름다운 옷을 입은 것처럼 신부도 금으로 수 놓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왕에게로 나아간다. 가기 싫은 곳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왕에게로 나아간다. 여러 여인들이 왕 앞에 가지만 9절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오직 금으로 단장한 신부가 왕의 오른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마지막으로 앞날을 축복한다.

 

“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16절)

미래의 후손의 출생과 그들로 인해 왕국이 지속될 뿐 아니라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을 예견한다. 하나님은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고(히 2:10) 이 땅에서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때 이 모든 것이 온전히 성취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17절)

왕의 이름, 명성, 성품, 인격이 영원히 기억되고 찬송을 받을 것을 말한다. 현재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신랑인 그리스도를 만나 혼인 잔치를 갖고 영원한 나라에서 그분을 찬양하며 함께 할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날에 우리의 모든 눈물이 씻어질 것이다. 우리의 눈이 밝히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내가 놓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었던 것들, 예수님께 순종하지 못했던 것들이 한심하게 느껴질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겨우 그런 것들을 두고 비교하고 했던 것들이 참 허무하게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 내려놓은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 앞에 있는 미래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지금의 삶이 조금은 쉬워질 것이다. 짐진 자처럼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 있는 자처럼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도전

우리는 왕의 신부다. 우리 왕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분을 더 사랑할 수 있다. 신부로서 우리가 어떤 아름다움을 갖춰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미래의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기쁨과 소망 중에 우리 신랑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버리고 주께 순종하는 것이 짐으로 생각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그래도 크게 나쁘지는 않잖아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주님을 닮아가기를 멈추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의 신랑이신 왕께서 어떻게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셨느지 생각해 보라. 시편 45편은 순전히 왕은 높이기만 하고 신부에게는 뭔가 요구하는 것만 같다. 신부가 잘하면 왕의 총애를 얻고 뭔가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릴 수 있다. 어떻게 그 왕과 신부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이란 찬양은 시편 45편 8절의 말씀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우리 주님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상아궁에서 즐겁게 거하시는 것이 합당한 왕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그 상아궁을 떠나셨고 이 천한 세상으로 오셨다. 신부인 우리를 찾아 오신 것이다. 그리고 죄인의 옷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가 걷는 험한 산, 골짜기를 그분이 먼저 걸어 오셨다. 신부인 우리를 당신이 계신 아름다운 곳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이 예수님을 이미 신랑으로 만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이 아름다운 신랑을 바라보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보라. 그가 어떤 사랑을 베풀었는지를 보라. 이만큼 우리를 사랑한 분이라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과거를 내려놓고 우리의 주 되신 예수님을 경배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정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