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온유한자 모세
본문: 민수기12장
설교자: 최종혁

 

모세와 예수님, 그리고 교회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아브라함, 모세, 다윗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고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였고, 그리고 다윗은 가장 이상적인 왕이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들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온 민족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후손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다윗에게는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셨는데, 그 왕국의 왕이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시는데, 이 언약은 후에 메시아를 통해서 세우실 ‘새 언약’의 그림자였다. 히브리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룬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두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뛰어나심에 대해서 설명한다(3장). 어찌 생각하면 모세는 단지 그림자에 불과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그림자의 실체가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무이한 완전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자로서라도 보여준 사람이 바로 모세였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서 볼 부분은 바로 모세의 성품이다. 모세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이렇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 말씀을 모세가 썼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참 흥미롭다. ‘온유함’에는 겸손함도 포함되어 있는 표현인데,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민수기 자체를 모세가 쓰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이 부분만 후대에 누군가가 추가를 했다고 말한다. 성경이 단지 인간의 창작물이라면 이런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 이런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실 때 그에 대해 내리셨던 평가다.

모세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모세 당시의 모든 사람인지 아니면 그 이전과 이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모세의 온유함이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이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온유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이 하신 일이나 말씀을 통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존재적으로 어떤 분이신지도 알 수 있고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하나 있다.

 

마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특히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 말씀을 하고 계신다. 율법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며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약속하신다. 그러면서 언급하신 성품이 바로 온유함이다. 이 온유하신 예수님을 많이 닮았던 사람이 바로 모세다.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의 궁극적인 중재자로서 오신 예수님 이전에, 그런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모세였고 그는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였다.

예수님 이후에도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모세나 예수님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돌보는 역할에서는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맡긴 자들, 교회의 인도자들이다. 성경은 이들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 자격에 직접적으로 ‘온유’라는 단어는 없지만 온유함이 핵심이 되는 자격 중에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다. 신중하고, 구타하지 않고, 관용하고, 다투지 않는 것,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것, 급히 분내지 않는 것,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온유함에서 나오는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는 직접적으로 주의 종은 온유해야 함을 말하기도 했다(딤후 2:24-25,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권위들에게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 바로 온유함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추구해야할 성품이기도 하다. 성경은 온유함을 성령의 열매로 말한다(갈 5:22-23). 세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참된 온유함은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온유함에는 ‘기준’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는 온유한 모습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온유함은 가질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성령을 소유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온유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수십 년이 지나도 전혀 이런 열매가 없다면 그 안에 성령이 계시다고 말할 수 없다.

마지막 하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온유함을 더욱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유함이 성령의 열매이고, 우리는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면(엡 5:18), 그 성령을 열매인 온유함도 우리가 바라고 애써서 더욱 풍성하게 맺어야 할 열매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온유를 추구하고 온유로 옷을 입으라고 말한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온유함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할 거룩한 성품이다. 단순히 타고 난 사람의 성품이 아니다. 물론 천성적으로 조금 더 온유한 모습을 자주 나타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마음의 태도이고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난 원래 별로 온유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다 원래 별로 온유한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본성, 육신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성품을 입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난 온유함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타고 나기도 그렇고 하고 있는 일도 그렇고. 그냥 이렇게 살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고 성령의 역사를 막는 일이다. “그동안 온유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안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것은 온유함이다.

그럼,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함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온유함이란?

온유함이란 무엇일까?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온순하고 착하게 말하는 사람, 어떤 일에 대해 순응적인 사람.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이고 조용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강한 힘은 온유함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부드럽고 유한 것이 생각날 것이다. 조금 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온유함은 나약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자기 위안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온유함은 오늘날 사회에서 환영 받고 권장 받는 성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리더쉽과는 거리가 먼 성품인 것 같다. 최근은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확신에 찬 사람,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주변에서 리더로서 인정받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싫어하지만 리더의 자질로서는 수긍한다는 말이다. 가끔 리더십과 관련하여 온유함 혹은 겸손함이 언급되지만 그것은 양념 같은 것이지 핵심적인 성품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 약 200만 명 정도 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이끌 지도자로서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셨고, 그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카리스마’가 아닌 ‘온유함’이었다.

사실 온유함은 힘과 관련 있는 성품이다. 힘은 꼭 육체적인 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나 특권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의 존재 자체로서 생기는 힘이 있고 우리의 신분 때문에 생기는 힘도 있다. 우리의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 위치 등으로 생기는 힘도 있다. 교회의 인도자들의 성품에서 특별히 온유함과 관련된 부분들이 강조되는 것은 그들만 온유할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교회 내에서 가지고 있는 ‘권위’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온유함은 그 힘(권리, 특권 등)을 올바르게 사용하게 하는 마음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온유함에 대해서 ‘통제된 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비유로 많이 사용하는 것은 ‘길들인 야생마’다. 야생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그 야생마가 길들여지면 그 강력한 힘을 유익이 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온유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저 힘이 없고 나약해서 순응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온유다.

온유와 비슷한 말에는 ‘겸손’과 ‘관용’이 있다. 조금씩 강조하는 바가 다르지만 어떤 문맥에서는 이 표현들이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온유는 특별히 앞서 언급한 힘과 관련해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관용’,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평안’, 이 세 성품의 교차점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온유함의 대표적인 결과물은 오래 참음, 인내, 열린 마음, 사려 깊음, 배려, 양보 등이 있다. 온유하지 못한 것의 결과물은 포악, 냉정, 사나움, 잔인함, 거칠음, 분노, 시기, 다툼 등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남편과 아내가 어떤 일을 가지고 말다툼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 남자가 육체적인 힘이 세다. 그래서 맘만 먹으면 그 힘으로 싸움을 종료 시킬 수도 있다. 자신이 가진 힘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온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남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당신이 내 말에 복종해야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온유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가진 힘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해야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할 수 있냐’라고 한다면 그 역시 온유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더 논리적이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코너로 몰아세우는 것도 온유하지 못한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서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는 것들은 결국 자신의 힘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유하지 못한 모습이다.

상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계속해서 내 생각을 관철하려 하는 것도 온유하지 못한 태도다. ‘내가 이 정도 양보 했으면 너도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라고 요구하는 것도 온유하지 못한 태도다. 내 자존심을 세우려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을 내는 것도 온유하지 못한 태도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듣기만 하고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서 속으로 분노를 쌓아간다면 그것은 겉으로는 온유함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온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 마음에 평안이 깨졌기 때문이다. 자기 밥 그릇을 지키려는 강아지처럼 옆에서 조금만 듣기 불편한 말을 하면 그것이 옳든 그르든 일단 분을 내고 싸우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 뭐 나는 만날 당하고만 있으라고?’라는 생각 역시 온유함에서 나오는 생각은 아니다. 그 생각 안에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면, 온유함은 자신이 가진 힘을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게 하는 마음의 태도로서 겸손, 관용, 평안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은 이런 온유함을 특별히 더 많은 힘(권위,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요구하시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온유함을 보이기를 원하신다. 모두가 각자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크든 작든 우리 모두가 가진 힘을 통제하여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 온유함에 대해서 민수기 12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 원하는데, 민수기 12장은 특별히 모세의 온유함과 그의 형, 누나의 온유하지 않음이 드러난 장이다. 먼저 반면교사인 미리암과 아론부터 생각해 보자.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서 가데스 바네아로 가는 도중에 생긴 일이다. 이 사건 바로 전에 기록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며 울며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먹이신 사건이다. 그 중간에 모세는 자신의 짐이 중해서 혼자 감당할 수가 없고, 계속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까지 하나님께 구한다. 이에 하나님은 장로 70명을 세워 그들이 모세의 짐을 나눌 수 있게 하신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그들도 예언의 말씀을 할 수 있게 되었다(민 11:25).

그 70명 중에 두 명이 장막에 가지 않고 진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들도 예언을 하게 되자 그 상황을 한 소년이 모세에게 전달했다(민 11:27). 정상적인 상황으로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여호수아도 그들이 예언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모세는 이 일을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할 수만 있다면 선지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12장에 벌어지는 사건의 배경이 된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민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구스 여자”가 정확이 누구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설명이 있다. 하나는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다. 구스가 때로는 미디안을 의미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설명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죽어서 모세가 구스 즉 이디오피아 혹은 누비아(수단) 여인과 결혼을 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시기적으로 생각하면 두 번째 견해가 조금 더 설득력은 있다. 출애굽 후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지금 갑자기 십보라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문제 삼았다기 보다는 이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이들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럽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구스 여자가 누구였냐 보다는 모세가 결혼한 여자가 구스 여자였다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율법에서 금하는 죄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곳의 사람들과 혼인하지 말 것을 명하셨는데 그들의 종교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명령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와 결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개종한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아마 미리암과 아론이 이것을 문제 삼은 이유는 모세가 지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지도자로서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모세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그것이 율법에 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백성들에게 좋은 본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자신이 그런 결혼을 했다면 그 말에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분명 미리암과 아론이 할 수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 그들이 원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구스 여자 문제는 단지 그들 내면에 있는 본심을 감추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 모세의 지도력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모세가 지도자로서 합당하지 않다가 아니라 모세만이 가지고 있는 지도자로서의 특권에 불만을 표한다.

 

민 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모세만 특별한 게 뭐가 있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말씀하시지만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왜 모세가 우리 위에 있느냐고 불평하는 것이다. 이들이 말이 거짓은 아니다. 미리암은 여선지자였고 아론은 대제사장이었다. 이들도 분명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이었다(미가 6: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심지어 미리암은 모세를 업어 키운 누나였고,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으며 언변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지도자로서 모세가 더 특별한 위치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도 모세와 같은 위치 혹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 바로 전에 70명의 장로들이 예언을 했던 사건(민 11:25)이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예언을 하니, 자신들의 특별함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위기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자신들의 특별함을 주장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온유하지 못한 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온유한 마음의 특징인 자신이 가진 힘과 관련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 주장하지 않는 관용,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이들에게 없다. 이들은 현재의 역할에 만족하기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기 위해 자신들의 동생을 비방했다.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지금 자신들이 가진 힘을 사용하고 있다.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은 보기에 따라서 분명 좋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고, 미리암과 아론은 그런 모세에게 충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올바른 동기로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걸렸다’는 듯이, 꼬투리라도 잡은 듯 달려들어 모세를 비방했다. 그들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서 자신들의 특별함과 그에 따른 특권이 평범한 것처럼 되자 그들은 다른 특권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죄악 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들의 온유하지 않음이 시기와 불평,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력에 대한 도전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이 민수기 16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레위 자손인 고라를 중심으로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민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참 좋은 말이다.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유익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모세와 아론, 너희만 거룩하냐. 너희에게만 하나님이 계시냐.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너희만 특별한 듯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느냐고 이들은 반문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자신을 다른 자들보다 높임으로써 “분수에 지나쳤다”고 결론 내린다. 모세와 아론이 그렇게 스스로를 높였다면, 혹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충분히 해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민 16:9-10 [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결국 이들의 본심은 모세와 아론이 겸손한 리더들이 되기를 원했다거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더 크고 귀한 자리를 얻는 것이었다. 미리암과 아론이 구스 여인을 구실로 더 높은 위치를 원했던 것처럼, 이들도 단지 더 높은 위치와 특권을 바라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도 이미 큰 특권인데, 그들은 더 큰 것을 바라고 있었다.

온유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들이 했던 말들은 사실이다. 모세와 아론만 거룩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만 하나님이 계셨던 것도 아니다. 그들이 볼 때 모세와 아론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지적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권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없다. 오히려 더 크고 높은 자리를 원한다. 그들에게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관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분수에 지나치다’며 비방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당을 만들고 반역을 일으켰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섬뜩한 사실이 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된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땅을 열어 이 온유하지 못했던 반역자들을 삼키게 하셨다.

 

도전

성경이 우리에게 ‘온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온유하기 힘들까?

위의 두 사건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들은 온유하지 못했고, 그 중심에는 ‘내’가 있다.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원했다. 더 높은 자리, 명성, 사람들의 인정, 권력, 그에 따르는 부 등을 내가 지금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원했던 것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원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했다. 온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기, 질투, 다툼, 반역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죄의 본성이다. 우리의 옛 사람은 계속해서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해. 이것이 아니면 안 돼. 넌 이것을 가질 자격이 있어. 그 정도 권리는 너한테 있어.’ 그러한 말들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이런 말들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키운다. 우리가 가진 작은 권리, 힘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온유함으로 가는 첫걸음은 그런 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 말이 사실 나와 상관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이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사람, 죄의 성품이 계속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맞다.

온유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이 우리 죄의 본성을 매우 강하게 거스른다는 데 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말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의지하고, 이들의 실패를 통해서 배우라고 말한다. 온유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온유한 자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복이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