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난 이후에 비슷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육체의 정욕과의 싸움입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 사도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장막 가운데 살면서 이 세상을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정욕 때문에 이 나그네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본국에 두고 이곳에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되도록 이곳에서는 검소하게 살면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본국에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좋은 집들과 아름다운 아가씨들, 즐길 거리들이 눈앞에 있어 많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싸움입니다. 나그네로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체의 욕구를 적당히 채우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거듭나면 성령님께서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거룩하게 살고 싶은 욕구,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며 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에 맞서는 육체의 소욕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됩니다. 주를 위해 살고자하는 욕구가 강할수록 육체의 정욕이 강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여러분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께 마음이 사로잡혀 예배를 드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어 반쪽 예배만 드리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이 참 괴롭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늘 싸웁니다. 그러한 싸움이 없다면 뭔가 양심이 무뎌져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무시되는데도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무뎌져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장애물은 아마도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일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 성령의 가치관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령은 “너희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지만 육체의 소욕은 이 땅에 쌓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무뎌지게 하고 자신을 남과 비교하여 더 많이 가지고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부추깁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통제해야 하는데 강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것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그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던 이유는 그들이 하늘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살면 세상과는 결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버리기가 참 힘듭니다. 
남자들이 키 크고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이유는 안목의 정욕 때문입니다. 아마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조건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자식자랑, 자기자랑, 집안자랑 등을 참 좋아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벗어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내와 시장에 가본 남편들은 알 것입니다. 여자들은 시장에 가면 사려고 적어간 것과는 상관없이 마치 시장에 처음 온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버리려니 아깝고 소유욕 때문에 자꾸 물건을 사들이니 점점 창고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든 육체의 정욕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환경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이와 같은 어려움에서 건져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욕구는 무엇입니까? 성도들을 사랑하고 싶은 욕구,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많은 핑계거리들이 생겨납니다.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늘 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정욕이 우리의 거룩을 무너트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정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육체의 정욕을 통제한다고 마음을 먹으면 될까요? 수도 없이 맹세하고 작정하고 약속하지만 안 됩니다. 오직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히 거하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웠을 때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늘 손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요즘은 성경도 잘 들고 다니지 않는데 핸드폰 안에 성경읽기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핸드폰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성경을 보기보다는 다른 것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면서도 핸드폰 게임에 빠져 손님이 와도 잘 모릅니다. 여러분의 손에 핸드폰이 들려있는 만큼 성경이 들려 있지 않으면 절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