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여호와 이레
본 문: 창세기 22장 13,14절
설교자: 조 성 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노년에 귀한 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가 어느 정도 자라자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가서 아들을 묶고 막 잡으려고 할 때 “이삭에게 손 대지 말라” 하시고 준비된 양을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 나서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양이 보였다면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이라는 것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데서 옵니다. 제한된 시간에 갇혀서 살고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미래를 알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용한 점쟁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정말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모두 갑부로 살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알 수 없어 매우 불안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갈라지고 있는 홍해가 보였다면, 광야에 샘물이 흐르고 있고 나무들에서 과일이 열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들은 불안해 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널 것, 광야에 샘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 신발과 의복이 닳지 않을 것이 모두 예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과거를 고칠 수도 미래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늘 지금입니다. 인간도 타임머신을 타면 과거와 미래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미래에 계시기도 하고 과거에 계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아브라함과 야곱, 요셉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는지 과정과 결과를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현재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가 애굽으로 팔려갈 때 콧노래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거둘 때 이틀치를 거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있는 것을 다 걷어왔고 고스란히 썩어버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매일의 삶을 살지 못하고 미래를 염려합니다. 2차 대전 때 고아원의 아이들이 잠을 자지 않아서 왜 그런가 하고 연구를 하는 중에, 아이들에게 손에 빵을 쥐어주니 잠을 잘 잤다고 합니다. 내일 먹을 것이 준비되니 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양식이 오늘 저녁 먹을 것 밖에 없다면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4)” 이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내가 몇 살에 어디에 사는 누구와 결혼할 지를 안다면 청년들은 결혼을 두고 염려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갈 때 이삭이 물었습니다. “나무도 있고 다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나요?” 그때 아브라함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셔서 아들로 입양하셨고, 나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필요를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이 보이지 않아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염려합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거의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조금 나은 듯 보여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미래를 보았습니다. 주님 역시 십자가에서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마음 속에 불신과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나와 홍해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시는 구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군대를 몰살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도 말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지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늘에서 쌀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고 내일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왔을 때 하나님은 아무 계획 없이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를 여행하도록, 먹을 물과 음식, 입을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계획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믿음의 눈이 없기에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길 때문에 고기가 먹고 싶어서 등) 늘 불평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선히 인도하시고 공급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우시고 필요를 공급하신 분은 어느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나를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면 앞으로는 염려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왜 한 번에 다 주시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주시는 걸까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가르치실 때 평생 사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현재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감사하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발 한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과거와 미래가 늘 현재이신, 영원에 계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실 계획을 창세전부터 가지고 계시던 분입니다. 다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4: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지금까지의 삶과 남은 삶을 통 털어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와 ‘여호와 이레’입니다. 직장이나 자녀문제, 결혼 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하는 것은 신앙인에게는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35년이나 한 집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아침밥을 의심해 아내에게 먼저 먹어보라고 해야 할까요? 수십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하지 않나요?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의 고백 뿐 아니라 우리의 고백도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고 늘 준비자로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준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 한 쌍을 키우려고 사왔다고 합시다. 새를 키우려고 할 때 새만 사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장도 사오고 먹이도 잔뜩 사올 것입니다. 어느 날 새에게 먹이를 주고 나서 보니 새가 고개를 푹 숙이고 내일 양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걱정도 팔자다. 너를 사온 사람이 누구냐?”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부터 모든 필요한 환경을 준비하기로 작정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분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