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 시편 133편

설교자: 조정의

3월 1일(주일)부터 가정 예배로 대체하고 오늘은 네 번째 주일이다. 그동안 혼란과 위기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나누었다. 함께 모이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매주 함께 나눴던 교제와 예배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갈수록 더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오늘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함께 연합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키기 원한다. 성도가 함께 연합하는 것의 유익과 즐거움을 한껏 기대하게 하는 말씀을 나누기 원한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멀어질 수 있는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이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마치 자석처럼 우리 마음을 가깝게 끌어당기시기를 기도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은 시편 133편이다. 본문을 통해 성도의 연합을 아름답다고 선포한 다윗의 감탄, 그리고 그 연합을 더욱 아름답게 묘사한 두 가지 그림, 마지막으로 성도의 연합을 아름답게 만드는 근원을 살펴보기 원한다.

1. 감탄: 아름다운 성도의 연합(1절)

1절에서 다윗이 감탄하는 것의 깊은 의미와 감정을 헤아리려면, 우리는 시편 133편의 배경을 조금 더 알 필요가 있다. 시편 133편의 저자는 표제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이다. 또한 이 시는 표제가 말하는 것처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란, 성전에 모여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기대하며 부르는 노래인데, 아마도 매년 세 번의 절기 곧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면서 순례자들(예배자들)이 각지에서 모인 형제들과 더불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기대하며 불렀던 노래였을 것이다(신 16:16). 

다윗은 아마도 이 시편을 오랜 세월 도망자로 살다가 마침내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을 때 한 골육, 형제였던 열두 지파 백성들과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지었을 것이다(삼하 5:1-5).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가장 긴 시편 119편 바로 다음인 시편 120편을 시작으로 오늘 다룰 시편 133편의 다음 시편인 134편까지 총 15편이고, 그중 다윗이 4편, 솔로몬이 1편을 썼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그들의 마음을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갈 수 없는 저 멀리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드릴 예배를 그리워하며 애절하게 이 시편들을 불렀을 것이다.

고레스왕 원년에 5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그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혹 시편 133편을 불렀다면, 어쩌면 그들의 마음은 기쁨이, 눈가엔 눈물이 흘렀을지 모른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여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신 그곳 성전에서 한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성도가 함께 모이는 것,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것은 참 소중하고 아름답고 복된 것이다. 매주 경험하여 어쩌면 그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을, 한 달 정도 누리지 못하게 되니 더 깊이 느낀다. 함께 모여 주를 찬양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언젠가 우리가 다시 모이게 되는 날 교회를 향해 예배자로 나아올 그때, 우리 입술에서 오늘의 말씀이 찬송으로 흘러나오기를 기대한다.

다윗은 시편의 첫 시작을 자기 말에 주목하라고 명령하며 시작한다. 보라! ‘주목하라’, ‘이것을 보아라’ 등의 의미이다. 여기 저기 분산된 생각과 마음을 어떤 대상을 향해 집중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다윗이 이 시편을 통해 예배자의 마음과 생각을 모으려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함께 누리는 연합의 아름다움이다.

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어렸을 땐 “동거”라는 단어는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것’만 의미한다고 생각해서 시편 133편을 읽을 때마다 어색하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합하여 동거함”은 히브리어 야샵(ישׁב)을 번역한 것인데, ‘모두 함께 앉다’, ‘다 같이 함께 머물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남녀 사이에서는 결혼의 의미를 갖기도 하는 이 단어는 시편 133편에서 형제들 사이에 특히 예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온 형제들이 다 같이 함께 누리는 영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다윗은 형제들의 연합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감탄하는데, 원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어찌 그리”가 두 번 반복되어 “어찌 그리 선한가!(טּ֨וֹב)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렇게 연거푸 감탄하는 표현이다.

종종 주일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다윗의 고백에 ‘아멘’이 절로 흘러나온다. 성도가 함께 연합하여 나누는 모든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 사는 곳도, 태어난 고향도, 자라난 배경도, 좋아하는 성향이나 취향도 심지어 정치적 견해도 다른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로 찬양할 때, 기쁨으로 교제할 때, 서로 헌신하여 섬길 때, 다 함께 이곳에서 머물며 누리는 영적 연합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2. 이미지: 성도 연합의 특징(2~3a절) – 1) 보배로운 기름

이어서 다윗은 형제의 연합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노래한다. 히브리 시의 특징은 대구법과 이미지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히브리 시가 아닌 다른 시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문학적 장치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2절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감탄하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두 가지 그림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려 한다. 그 첫 번째 이미지가 바로 2절에 나오는 “보배로운 기름”이다. 성도의 연합이 마치 보배로운(טּ֨וֹב) 기름 같다는 거다.

참고로 나는 머리에 바르는 걸 싫어한다. 끈적거리고 뻣뻣해서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어렸을 땐 시편 133편에서 다윗이 묘사하는 그림이 왜 아름다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보배로운 기름이라도 왜 그것이 머리에 있는지, 그리고 수염과 옷깃까지 그 기름이 흘러내리는지, 이것이 형제의 아름다운 연합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다윗은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까지 흘러내리고 나아가 입고 있는 옷의 끝부분까지 흠뻑 적시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흘러내리다”(ירד)를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머리, 수염, 옷깃까지 하나의 기름이 덮는 것처럼 형제가 하나로 연합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기름은 아무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의 머리에 부어진 것이 아니다. 2절에 보면 기름 부음을 받는 자의 이름이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 “아론.” 아론은 누구인가? 모세의 형이다. 그리고 아론은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세워진 대제사장이다.

출애굽기 30장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상등 향품(고귀한 향수)을 직접 제조하라고 하셨다. 몰약, 향기로운 육계(계수나무 껍질), 향기로운 창포, 계피, 감람 기름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어 성막과 기구들뿐만 아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명하셨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출 30:30).

다윗은 왜 이스라엘 백성의 아름다운 연합을 노래하면서 아론의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일까?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세우셔서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를 세우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연합의 즐거움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보배로운 기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연합의 특징을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연합은 단지 공통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둔 한 민족으로서 누리는 연합이 아니었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흘러나온 민족이었지만, 그들의 연합은 단지 혈연관계, 친척 관계로 누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의 연합은 영적 연합이었다. 왜 예루살렘에 모이는가? 성전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성전에 모여 무얼 하는가?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 예배를 누가 집행하는가? 대제사장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야곱의 열두 아들로 구성된 지극히 작고 연약한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과 죄 많은 백성 사이에 중보자로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두고 하나님이 명하신 희생제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수직적인 연합, 화목을 이루셨다(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출 6:7; 레 26:12).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누리는 연합, 그 수평적 연합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축복을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과 제사 제도를 통해 동일하게 누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 백성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의 복을 누린 것은 하나님이 성막과 제사장을 통해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의 복을 그들에게 흘러내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래서 아론의 머리와 수염 그리고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기름을 생생한 이미지로 노래하는 것이다. 형제들의 연합이 선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옛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이 부어주신 영적 축복 안에 연합의 즐거움을 누렸다면,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왜 서로 보고 싶어 하는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우리의 연합이 선하고 사랑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혈연관계이거나 지연 관계여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단지 오래 봐왔고 많은 경험을 같이했기 때문에 느끼는 정이나 친밀감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아론이 있다. 아론보다 더 위대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신다. 주일 아침 우리는 떡과 잔을 앞에 두고 예배한다. 누구를 기념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세우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기념하며 연합의 즐거움을 누린다. 참고로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우리가 얼마나 죄가 크고 허물이 많은지 아신다.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친히 경험하심으로 공감하신다. 

아론은 보배로운 기름으로 부음 받았지만, 우리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아론은 희생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백성의 죄를 씻었지만, 우리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직접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단번에 씻으셨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우리 부활의 소망이 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다(딤전 2:5; 히 7:25; 8: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화목을 누린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9).

우리의 연합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 그분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분과 연합했다는 놀라운 축복을 흘러넘치게 하시기 때문이다. 때로 우린 먼저 하늘나라에 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과 앞으로 연합할 즐거움을 슬픔을 넘어선 기쁨으로 누린다. 우리의 연합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그분과 연합한 모든 성도가 함께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는 매주 만날 때마다 천국의 기쁨을 맛본다. 그래서 연합을 그리워한다. 갈망한다.

비유2: 이미지: 성도 연합의 특징(3절a) – 2) 헐몬의 이슬

다윗이 사용한 두 번째 이미지헐몬의 이슬이다. 

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헐몬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해발 2,769m에 이른다. 헐몬 산 꼭대기엔 만년설이 있으며 비와 눈, 이슬 등이 헐몬산에 내리기 시작하여 갈릴리 호수, 요단강 등 남부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전역에 필요한 물을 제공한다. 

다윗이 아론의 머리에 흐른 기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영적 축복을 가져다 주었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노래했다면, 이제 멀리 떨어져 이스라엘 전체 땅을 바라본다. 그리고 헐몬 산에 내려진 이슬이 이스라엘 전체 특히 시온의 여러 산들에 내려지는 장면을 이미지로 묘사한다. 시온에 있는 산들은 해발 800m 정도로 헐몬에 비하면 매우 낮은 산들이었다.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는 말에서 ‘내려오다’라는 단어는 아론의 머리와 수염, 옷깃까지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ירד). 이것이 시편 133편의 아름다운 시적 운율인데, 다윗은 마치 하나님이 부어주신 영적 축복이 아론의 머리에서 흘러내려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임한 것처럼, 헐몬 산에 하나님이 내리신 이슬이 흘러내려 이스라엘 모든 땅을 흡족하게 적시는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살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흘러넘치는 젖과 꿀을 내려 주시는 분이었다(신 26:9,15).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적 축복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복을 주셨다. 높은 곳부터 낮은 곳까지 그 복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여러 산들 가운데 시온의 산들을 언급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 시온의 산들 가운데 있는 성전에 지금 이스라엘 백성, 언약의 백성이 모든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여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단지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만 주시는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이렇게 성도들에게 물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함께 모여 우리에게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 그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을 흘러넘치게 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연합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마 6:8), 우리가 구할 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우리에게 안겨 주실’ 하나님(눅 6:38). 그 하나님을 예배한다. 우리의 연합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물질적 필요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풍성하게 넘치도록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여 누리는 연합의 기쁨, 우리가 함께 모여 누리는 연합의 기쁨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하나님과 함께 연합하여 누리는 축복이다. 그래서 다윗은 마침내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께서 복의 근원이심을 노래한다.

3. 근거: 복된 연합의 근거(3절b)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거기서는 곧 이스라엘 백성이 연합한 그곳을 의미한다. 그들의 연합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 그들과 언약을 맺으사 그 언약에 신실한 사랑을 베푸시는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께서 그들의 연합 가운데 복을 명령하셨다. 그복은 영생이다.

영생은 죽어도 존재가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영생은 하나님의 백성이든 하나님의 원수든 똑같이 누릴 것이다. 영생은 삶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에 있다. 

시편의 서론에 해당하는 시편 1편이 노래하는 형통한 삶,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삶이 바로 영생이다(시 1:3, 6). 영생의 반대는 망하는 삶, 여호와의 심판을 받는 삶이다(시 1:5, 6). 결국 영생을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다. 선하고 사랑 많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영생의 삶이고, 그 하나님을 거부한 삶은 멸망의 삶이다. 신약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생명, 하나님을 거부한 삶은 죽음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는다(요일 5:12).

예수님은 영생을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셨다(요 17:3). 하나님이 명령하신 복,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시편 133편이 노래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a).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망과 심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은사로 주신 것이 있다. 은혜로운 선물로 주신 것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b).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 그리스도인 누리는 연합의 선하고 아름다운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이 복된 연합으로 당신을 초대하신다. 그 일을 위해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하나님과 영원한 연합,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원한 연합을 풍성히 누리기 원한다면,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은혜로 주시는 영생을 믿음으로 받으라.

영생의 복을 누리고 사는 형제자매들이여. 어쩌면 전례가 없는 이 특별한 시기에 우리는 영생의 복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것인지 깊이 보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바벨론 성벽에 갇혀 멀리 예루살렘 성전을 마음에 그리며 성도가 함께 누리는 축복을 꿈꿨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가 여러 가지 우리 마음을 빼앗았던 크고 작은 것들에게서 돌이켜 오직 우리가 누리는 영생의 복, 하나님께 온전히 머물기를 바란다. 더욱더 명료하게 영생의 복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기 원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복이다!

또한 다시 모여 같은 영생의 복을 얻은 우리가 기뻐하며 주를 한목소리로 높이고 찬양할 날을 기다리기 원한다. 그 간절한 기대를 담아 가정에서, 개인의 삶 속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이 당신 삶에 흘러내리게 하신 모든 영적인 복과 물질적 복에 감사하고 그분을 예배하기 원한다. 그럴 때 우리가 모이면 함께 드리는 예배가 진정으로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언젠가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각자 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서 주일에 교회를 향해 순례의 길에 오를 때, 우리 입술에서 교회에 올라가는 노래가 진정으로 흘러나오길 원한다. 보라!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