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본문: 누가복음 21장 5~9절
설교자: 조정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대화를 마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묵었던 베다니로 발걸음을 돌리십니다. 가는 길에 시작된 이야기는 21장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대화의 주제는 다름 아닌 “종말론”이었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의 끝을 내실 것인지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 대화의 첫 시작이 바로 오늘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주 오심을 기다리는 제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무서운 예고(5~6절)

5절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화요일 저녁 “성전에서 나와서” 제자들과 함께 머물고 계셨던 베다니 마을을 향하여 가고자 하셨습니다(마 24:1; 막 13:1).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 떨어져 있는 마을로 약 일주일 전에 이곳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그곳에 살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지 나사로를 살리셨고, 그때로부터 잡히시던 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유숙하셨습니다(요 12:1).

누가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말했는데, 마태와 마가는 그 “사람들”이 다름 아닌 제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마 24:1; 막 13:1).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웅장하고 멋진 곳에 가면 일행을 불러서 “와~ 이것 좀 봐!”라고 말하듯,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전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제자 중 하나”가 이렇게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 13:1)

함께 선 제자들, 다른 사람들도 함께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며 감탄하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예루살렘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본다 한들, 그 성을 지지하고 있던 벽 하나만 남아있을 뿐(통곡의 벽)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멋지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돌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한데, 당시 사람,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직접 보고 기록한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성전 전면의 바깥 표면은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할 뿐이었으니 그 전부가 큰 황금판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불꽃같이 찬란한 광채를 반사하여 흡사 직사광을 받는 느낌이어서 사람들은 두 눈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거리를 두고 서서 볼 때 이 성전은 마치 눈으로 뒤덮인 산과 같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관한 한 그것은 허식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순백이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묘사하듯 성전은 황금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태양을 반사하여 찬란한 광채를 나타냈습니다(입성).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라본 시각이 저녁이었기 때문에 아마 저녁노을이 질 때 그 노을빛을 담은 황금 성전은 참으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성전의 크기 자체가 압도적이었는데요. 예루살렘 도시 전체 면적의 1/6 크기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다시 세웠는데, 작고 초라한 모습에 원래 솔로몬 성전을 봤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던 장면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을 헤롯 대왕이 AD 19년부터 64년까지 약 46년에 거쳐 어마어마한 규모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거의 두 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건축물 중 하나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주요 건축은 약 10년 안에 완성되었다 하니 예수님 당시 그 경이로운 모습에 제자들이 감탄할 만 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을 기념하러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광장, 수백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행각, 수많은 방과 제사가 이루어진 성전, 지성소… 그 건물을 이루고 있는 돌들 자체가 참으로 멋지고 거대했습니다.

당시 성전에 있는 현관 기둥들, 대리석의 기둥 중 어떤 것은 높이가 약 12미터 이르는데, 아파트 1층의 높이가 3m라고 하면, 이 기둥 하나의 높이가 아파트 4층 정도의 높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을 구성하는 대리석 중 어떤 것은 길이가 20m, 높이가 3.7m, 너비가 5.5m인 것이 있었는데,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대한 대리석을 채석하여 거울처럼 반들반들하게 다듬은 것이었습니다. 이 돌들은 예루살렘 안에서 깎은 것이 아니라 성 밖에서 다듬어 가지고 들어와 맞춘 것입니다. 

우리가 고성 예를 들어 경복궁 같은 곳에 가서 커다란 돌로 맞춰진 건물을 보면서 어떻게 그 시대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디에서 돌을 깎아 가져와서 이렇게 맞췄을까? 감탄하는데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또 성전에는 많은 헌물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꾸미기 위해 여기저기서 제공한 귀중한 물품이었습니다. 도금한 문, 거대한 조명기구, 각종 공예품, 장식품이 있었습니다.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정교한 태피스트리인데, 다채로운 실로 짜 넣은 직물, 별걸이, 가리개를 말합니다. 청색, 주홍색, 자주색 실로 수를 놓은 세마포를 성전 출입구에 길게 늘어뜨려 놓았습니다. 또 헤롯이 직접 헌정한 순금으로 만든 큰 포도나무가 걸려 있었는데, 포도송이 하나가 사람만큼 커다란 규모였습니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제자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것을 보소서!”라고 외칠 만큼 성전은 크고 견고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6절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이 말은 부분적인 손상이 아니라 완전한 파괴를 의미합니다. 이 크고 견고한 성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막 13:2)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마 24:2)

그들은 이 큰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보고 있었고 그래서 그 건물이 영원할 것처럼 여겼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모든 것”, 즉 이 건물이 완전히 박살 날 것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틀 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이 성을 보고 이미 아셨습니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이 성을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이스라엘 자손들, 남녀노소를 땅에 메어치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할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눅 19:41~44).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대성통곡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충격적이고 무서운 예고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단지 큰 건물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파괴된다는 것이 충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절대로 무너질 수 없는,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 여호와를 만나는 곳, 여호와가 임재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예배를 드리려면 반드시 이 성전에 와서 이 성전을 통하여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니…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곳,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마도 두려운 마음에 많은 궁금증이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베다니로 넘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감람산 위에 이르렀고, 거기에 앉아 예수님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자들은 기회를 얻어 조용히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마 24:3; 막 13:3). 

7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의 질문은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첫째, 때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징조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8절과 9절은 각각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정확했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왜 그런지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겠습니다.

2. 때(8)

8절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먼저, 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보통 우리가 기대하는 대답은 정확한 때, 정확한 연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약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수원시 인구, 117만), 10만 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성전은 예수님 말씀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의 통곡의 벽, 성전을 받치고 있던 구조물만 남겨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승천하고 나서 40년 후’, 혹은 ‘AD 70년 정도’라고 대답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입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속일까요? 뭐라고 유혹할까요?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내가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혹하기를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거짓 정보에 속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뭔가 질문과 대답이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단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때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무너질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잘 맞아떨어지는 대답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 당시 제자들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제자들에게도 확실하게 적용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제자들이 감람산에서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마 24:3)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와 주가 임하시는 세상 끝을 기다리는 각각의 제자들에게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으로 지금 대답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때와 징조를 바라보는 제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공통된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때에 대한 교훈이 무엇이었지요?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 예수에 속지 말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거짓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이 유대인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행 5:36,37-“드다, 유다”; 행 8:9 “마술사 시몬”). 사도 요한은 서신서에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라고 경고했습니다(요일 2:18). 예수님은 그들을 따르지도, 그들의 말에 현혹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거짓 예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약 50명의 재림 예수가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약 17만 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는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신도 수 270만을(국내 20만) 자랑하는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교주(이미 죽음)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종말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때가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신천지는 계시록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가르치면서 계속해서 “때가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91년, 2000년 두 번의 날짜 추측이 실패하고, 신도 10만이 되면 종말이 온다고 가르쳤다가 또 실패하여 144,000으로 숫자를 늘렸지만, 최근에 17만 명의 신도를 등록하면서 이 또한 실패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교주 역시 1988년, 1999년, 2012년 각각 종말을 예고했다가 실패했고, 이런 거짓에 속은 많은 부녀자가 가출하고 이혼하고 아이를 방치하고 양육을 포기하고, 학생과 직장인이 각각 학업과 직장을 포기하면서 사회적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자칭 예수라 주장하지는 않지만, 창시자 러셀이라는 사람이 시작할 때부터 1874년 종말론, 1914년 아마겟돈 전쟁에 의한 종말론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실패로 드러났지요. 2대 교주 러더 퍼드가 1925년 종말론, 1975년 10월 아마겟돈 전쟁 종말론을 주장하였지만,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날짜를 정하진 않았지만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면 여호와 증인 14만 4천 신도가 다스릴 천년왕국이 이 땅에 건립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신도는 한국 10만, 전 세계 800만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역시 이런 거짓 예수와 거짓 종말론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절대 그런 거짓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또 “때와 시기”에 관해 물었는데요,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으셨습니다(행 1:7).

그러면 때를 몰라도, 그 징조 정도는 알려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3. 징조(9)

9절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난리, 소요는 전쟁, 환난, 재앙 같은 큰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난리와 난리 소문”-마 24:6), 그와 같은 소문을 들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상의 끝이 오는구나…’이런 마음으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죠?이런 일이 먼저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끝은 곧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끝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막 13:7).

더 정확하고 확실한 징조를 기대했다면 아마 예수님의 이 대답에 실망했을 것입니다. 전쟁, 지진, 환난, 분쟁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계속 있어왔던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는 계속해서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64년에는 로마에 엄청난 규모의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지진, 화산 폭발 등 수많은 자연재해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끝이 오기 전에 당연히 일어나지만 아직 끝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징조를 많이 봅니다. LA에 매년 끊임없이 화재가 일어납니다. 일본이나 아이티 같은 나라에는 심각한 지진이 일어납니다(심지어 한국에도). 하와이 화산이 폭발합니다. 세계 전역에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고 난민이 생기고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난리와 소요의 소문이 매일 아침 신문 기사를 장식합니다. 이런 일이 주님 오시는 그날 전에 있어야 하지만, 아직 그날은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부터 마침내 오시는 그날까지를 여인이 잉태하여 아기를 낳는 과정으로 본다면, 난리와 난리 소문이 일어나는 것은 통증과 같습니다. 통증이 일어나면 “아, 아기가 나올 때가 가까이 오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병원에 가서 나을 준비를 하지는 않습니다. 곧 아기가 나올 진통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일어나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은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끝을 알려주는 신호이지만, 그것이 곧 끝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아, 주님이 오실 때가 점점 가까이 오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곧 끝이 올 것처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군대들에 에워싸일 때를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파괴되는 일도 ‘주가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분명한 “난리” 곧 징조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을 알리는 난리였습니다(눅 21:22).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끝은 아니었”지요.

언젠가 25절부터 기록된 말씀처럼 일월 성신의 징조, 마태의 설명에 따르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일”(마 24:29)이 일어날 것입니다. 25절 말씀처럼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 중에 곤고”하게 될 것입니다(25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며 기절”할 것입니다(26절). 예수님은 마태복음에 이때의 징조를 가리켜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앞으로도 없을 환난” 이라고 부릅니다(마 24:21). 

그때야 비로소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눅 21:27). 그때야 비로소 끝이 오는 것입니다. 진통의 주기가 아주 짧아져 이제 아기가 나올 것이 분명해지는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어나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뚜렷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첫째로, 그 징조를 가지고 곧 주님이 오신다는 선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정반대의 행동입니다. 주님은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 징조를 보며 주가 오신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짓에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되 진실, 곧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용

우리는 참 이상하게도 반대로 하려고만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짜를 추측하고 두려움을 조장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입니다. 다니엘이나 계시록을 가지고 시기를 추측하려고 합니다. 제3 성전 준비 과정을 주목하며 날짜를 계산하려고 합니다. 베리 칩이 만들어지면, 중동의 평화가 형성되면, 2020년이 되면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혹되지 마십시오. 그런 소리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생각하지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16:15).

동시에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에 둔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 오심을 기억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오늘날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눅 21:34)고 경고하셨습니다.

언제 주가 오실지 모르는 이때,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이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쾌락에 빠져있다는 것, 방탕함에 잠겨 있다는 것, 세상에 이 사실을 경고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산다는 것, 생활의 염려에 마음이 둔하여져 세상의 멸망에 신경 쓰지 못한다는 것…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언젠가 실제로 이 땅에 최후의 심판을 내리실 왕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받는 우리에게 소망의 메시지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고통을 받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임할 최악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비상구를 알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외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생활의 염려와 방탕함에 빠져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다가올 종말을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 덫과 같이 그들을 덮칠 끝을 예비할 수 있겠습니까? 징조를 알아차리고 그 후에 다가올 끝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징조를 보는 사람, 그리고 그 징조를 통해 끝이 올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우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깨어있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을 통하여 세상이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 생활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쾌락과 술취함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심판의 때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참된 구원과 영원한 소망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 아닙니까? 

“가서 제자로 삼아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각자 여러분이 처한 그곳에서 여러분은 이 명령에 어떻게 순종하며 살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