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약함의 이유
본문: 고린도후서 4장 7~15절
설교자: 최종혁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확신에 따라 행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자천했다.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사실 바울은 원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을 위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바울이 신뢰를 잃는 것은 곧 그가 전한 복음이 신뢰를 잃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올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그런 하나님의 일꾼들은 왜 낙심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왜 그런 순수한 동기로 신실하게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은 어려움을 당할까?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며 낙심하고 어려운 상황에 넘어지며 복음을 위한 삶의 동기를 잃고 의무감만 남을까? 우리에게 이런 약함이 없다면 복음은 훨씬 더 잘 전파되지 않을까? 내가 이것만 더 잘할 수 있다면, 나에게 이런 상황만 없다면 더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이런 약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약함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절)

참 흥미로운 표현이다. 우리는 귀한 것은 귀한 것에 담는다. 음식을 열심히 준비해서 아무 그릇에나 담아내지 않는다. 비싼 선물을 사서 검은 봉지에 담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어떤 질그릇인가?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잘 구워서 값이 나가는 도자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계속 사용하려는 용도로 만든 용기를 말한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천하게 쓰는 그릇이 질그릇이다. 깨질 수 있고 그래도 괜찮은 용기다. 깨진 것은 재활용하거나 할 수 없다. 그저 다른 용도로 쓰다가 정 쓸 수 없으면 버리고 다른 그릇으로 대체할 뿐이다. 주방에서 매일 식사할 때 나오는 그릇을 생각하면 된다. 그저 평범한 그릇이다. 지금처럼 집집마다 다양한 용기가 많지 않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질그릇에 귀한 보물을 담아 땅에 묻어 두기도 했다. 바울은 아마 그런 모습을 생각하며 참 역설적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런 역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질그릇에 담겨 있어야 할 것은 특별하지 않은 것이다. 귀하지 않은 것이다. 귀한 것이 질그릇에 담겨 있다면, 만약 그 상태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면 우리는 그 보물의 가치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내용물에 맞게 포장이 되어야 하고, 심지어 포장이 더 잘 되어야 내용물의 가치도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물세트들을 보면 포장에 그렇게 공을 들인다. 가끔 포장이 아까워 버리기 힘들 때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은 질그릇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별하지 않은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다. 그럼,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무슨 이유일까? 이유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우리가 어떤 질그릇이고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일차적으로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들 뿐 아니라 “이 직분”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바울은 “질그릇”이었을까? 우리가 볼 때는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예수님 다음이 바울 아닌가?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겸손의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바울은 많이 배우기도 하고 열정도 있었고 유대 사회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좋은 배경도 있었지만, 그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살펴봤던 것처럼 그의 대적들은 바울이 글은 잘 쓰는데 말에는 힘이 없다고 비난했다. 얼토당토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울도 딱히 그것을 반박하지 않았다. 말에 힘이 없다는 것은 특히 당시에 인정받던 그런 웅변술에 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준에서 바울의 설교는 형편없었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서 그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라고 말한다. 바울을 외적으로 봤을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이 될 정도였다. 얼굴이 못생겼다는 의미보다 어떤 질병이 바울에게 있었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힘들어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바울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는 아니었다. 나중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더구나 바울은 그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도 그는 그런 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구원 받은 후에 죄는 전혀 안지었을까? 그렇지도 않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죄를 즐거워하고 그 가운데 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에 넘어지고 좌절하기도 했던 것이다.

바울을 깎아 내리려는 자들은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바울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인정했다. 자신이 질그릇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질그릇에 보물을 담을 수 없으니 바울에게는 참된 보물이 없다고 공격을 했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상식이 그렇다. 질그릇에 보물을 담지 않는다. 그럼 바울은 왜 이런 공격에 자신은 질그릇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질그릇임을 인정했을까?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살펴보자.

바울은 질그릇이었다. 그럼, 우리도 그런가? 딱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도 다들 질그릇이었다. 누구 하나 완벽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인간의 연약함에 그들만의 연약함도 가지고 있었다.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던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이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로 속였던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말을 그렇게 잘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자기 비하에 빠져 하나님의 명에 따르기를 계속 거부했고, 인간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하기도 했다. 기적의 선지자 엘리야는 어떤가? 이세벨의 협박에 도망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외적으로 왕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간음하고 살인한 사람이었다. 사사 시대의 사사들의 연약함은 우리가 사사기의 말씀을 통해 익히 들었다.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는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자 분노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복음서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이런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유혹에 넘어지고 죄를 범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어떤 능력이 빼어났던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이 남보다 뛰어난 능력과 지혜,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기로 선택하셨던 것 뿐이다.

우리도 질그릇인가? 그렇다.

고전 1:27-28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우리도 질그릇이다. 강하지 않고 지혜롭지 않다. 천하고 멸시 받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죄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바울은 이런 질그릇인 우리가 보배를 가졌다고 말한다.

 

이 보배는 무엇인가?

이 보배는 무엇일까? 4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다고 말했다. 즉, 이 보배는 우리가 받은 이 직분이다. 이 직분이 보배인 이유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3:18). 주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4:6). 결국 이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즉 복음의 빛을 전하는 직분이기에 보배다.

이 직분은 단순히 어떤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다. 사실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관계적으로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직분을 받은 자로서 우리의 말과 삶으로 그 영광의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선포한다. 그래서 이 직분은 하나님을 전하는 직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누군가를 소개하는 일의 가치는 소개하는 사람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이 직분의 가치는 하나님의 가치와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한다. 그리고 ‘거룩’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와 얼마나 다르신지를 말한다. 그리고 ‘영광’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분의 거룩이 위대하고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 위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보배로운 일을 하나님은 질그릇인 우리를 통해 하시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왜 보배가 질그릇에 있을까? – 약함의 이유

이제 미뤄뒀던 질문들을 다시 꺼내보자. 왜 하나님은 질그릇에 보배를 두셨을까? 이제 일의 효율이나 효과를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더 강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래야 일하기가 더 쉽고 결과도 좋지 않은가? 또 바울은 왜 자신의 약함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했을까? 자신을 공격하는 그들보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고 왜 주장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당한 고난보다 거둔 열매가 더 많다는 논리는 왜 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약한 이유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통해 한 사람이 구원 받고 그의 삶이 변화된다. 그 삶의 변화는 우리가 ‘기적’이라고 불러야하는 변화다.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들이 그 섬기던 신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 죄를 기뻐하고 죄에 물들어 죄에 종이 되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죄를 미워하고 선을 추구한다.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자들이 생명을 얻는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고 정말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말 특별한 어떤 힘이 이런 일을 만들어 낸다. 바울은 그것을 “심히 큰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이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취게 하는 능력이다. 이 놀라운 능력이 이루는 일들을 볼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능력의 원천, 근원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저들이 말하는 하나님에게서 그 능력이 오는가, 아니면 저들 자체에서 오는가?

바울의 대적들이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런 힘은 질그릇인 바울에게서 나올 수 없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런 영향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한 복음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 일은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바울의 자기 변호였다. 자신의 약함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실제로 자신이 약함을 인정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오직 하나님만 이 놀라운 구원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 그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약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증명했다. 그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했다.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해서 그 부족함을 채워줄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사람을 구원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다. 하나님은 질그릇에 보배를 두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보이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울의 약함을 사용하셨고 다른 믿음의 선진들을 사용하셨고 오늘날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능력의 예

바울은 8절부터 실제로 어떻게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8-9절)

계속되는 고난이 우리에게 있다. 그런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다. 우리를 짓누르는 상황들이 있다. 고민들이 있다. 걱정이 많다. 답을 알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비난도 있다. 넘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연약함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망하지 않는다. 홀로 남겨지지 않는다. 낙심하여 멈추지 않는다. 참된 복음의 일꾼이라면 그런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무엇이 나타나는가? 내가 얼마나 신실하고 충성스럽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믿을만한 사람인지가 드러나는가? 아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절)

우리는 계속해서 연약함 가운데 거한다. 죽음에 넘겨진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죽을 몸을 통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울의 대적들은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고 그가 하나님의 사도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그의 고난과 연약함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짊어진 것이었고 그를 통해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났다. 지금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난의 삶을 통해 나타난다. 그 생명의 능력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절)

어찌보면 비꼬는 것처럼도 들릴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질그릇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그 결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이 전해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열매들이었다.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변호하면서 너희가 바로 그 증거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정리

다시 한번 약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차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보배와 비교할 때 그 보배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 질그릇이다.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도 하나님에 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들이다. 그런 우리를 통해 일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이 오로지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임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신다.

한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약함’은 죄나 그것과 관련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시니까 인격적 결함이나 부도덕도 어느 정도 용납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은 직분을 받은 자로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버렸다고 말했다. 성경은 단 한번도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서도 일하시니 우리가 악에 거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악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함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연약함, 한계, 부족함을 말한다. 당연히 죄에 넘어지는 것도 우리의 연약함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은혜다. 하지만 그것으로 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직분을 받은 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보며 낙심하고 어려운 상황에 넘어지며 복음을 위한 삶의 동기를 잃고 의무감만 남을 때가 있다. 내가 이것만 더 잘해도 좋겠고 저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 상황이 복음을 전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낙심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이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런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를 두셨다. 그런 우리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이다.

 

도전

그래서, 우리가 영광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을 전하는 직분을 받은 자들로서 반드시 마음에 새겨 둬야할 세 가지가 있다.

 

  1. 우리 모두는 동일한 영광의 직분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13절)

바울은 시편 116편 10절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기 역시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같은 믿음을 가졌고 그래서 말한다고 한다. 우리도 믿은 자들로서 또한 말해야 할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복음의 직분을 받았다.

 

  1. 우리 모두는 동일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14절)

우리의 약함은 이 땅에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난의 끝에 있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우리의 직분에 따르는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주님과 같은 부활의 소망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은 사실 죽음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더 나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 뿐이고, 그곳에 우리가 기다리고 또한 우리를 기다리신 주님이 계신다. 이 소망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1. 우리 모두는 동일한 삶의 목적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5절)

질그릇인 우리의 목적이 이것이다. 우리 삶을 통해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목적이다. 그러니 약함에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 12:9). 소망 가운데 맡겨진 일에 충성하라. 그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우리는 보배가 아니라 질그릇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