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령한 몸의 신비
본문 : 고린도전서 15:35-44
설교자 :  조 성 훈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가 앞으로 입게 될 새롭고 신령한 몸은 생각할수록 신비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 왔을 때, 주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 역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는지 정확한 답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매미가 성충이 되기 전에 굼벵이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 땅에서 사는 삶이 있고 다른 곳에서 사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생명체입니다.

우리가 장차 살아갈 영역에 적합한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진 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주가 얼마나 넓은 지 정확하게 아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빛으로 200억년을 가야 우주의 끝에 도달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지구가 속한 은하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까지는 150만 광년을 가야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인간이 어떻게 오래 살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이 육체로는 오래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면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 부활이 지나갔다고 말했습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8).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부활에 대해 자연의 비유를 듭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36절). 우리가 옥수수를 심으면 옥수수 열매를 기대합니다. 심는 모양은 알맹이지만 나오는 모양은 전혀 다릅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37-38절). 많은 종자가 있고 저마다 모양도 다르듯이 우리의 부활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39절). 이것은 참 신비로운 것입니다.

주님은 무덤에 묻히시고 새롭게 부활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몸은 과거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본질은 그대로 있지만 주님이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이것을 추측할 뿐이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다녀온 거리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몸으로 우주를 여행한다면 광속이 얼마나 될까요. 이 은하와 저 은하 사이를 오간다면 빛의 속도로 150만 광년 이상을 가야 하는데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움직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입게 될 신령한 몸과 비교할 때 현재 우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아무리 가꾸어도 늙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입게 될 몸은 썩지 않을 몸,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몸,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절). 천사 하나가 많은 군대를 무찌르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런 천사들보다 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2-44절).

현재의 육체와 앞으로 입게 될 육체를 비교하면 현재의 이 몸은 욕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시기심과 욕심, 탐욕, 악한 정욕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욕된 육체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 교육에서는 어떤 치료나 교육을 통해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사람에게서는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이 드러납니다.

현재 우리 안에는 욕된 것이 있지만,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때는 많은 하나님의 속성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육체 안에는 영원한 즐거움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을 이루거나 가지게 되었을 때 만족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선한 것과 하나님의 속성들이 우리 안에 거하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몸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니고데모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굼벵이가 땅 속에 있을 때 장차 자신들에게 이뤄질 일들을 안다면 땅 위로 올라가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고 하는데 빨리 죽고 싶지 않겠습니까. 만일 믿는 자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우리 안에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 참다운 안식, 평안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 자리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이 계셔서 그대로 세상을 떠난다면, 그는 영원한 몸으로 불타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허무함과 비참함을 느낀다는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로 돌아가기 보다는 주님께로 가고 싶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영원한 세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 4:18).

성경에서 부활에 대해 말하기를, 복된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온 우주를 장차 예수님이 상속하실 것인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뵈며 경배할 수 있는 몸, 하나님 가까이에서 교제할 수 있는 몸, 영원히 행복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천주교 교황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는 근본주의자들로 과격하고 옳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믿는 것,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수많은 종교인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부활의 소망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지 모릅니다. 진리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오늘날은 진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