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본문: 누가복음 22장 39절~46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우리는 가장 극심한 시험 앞에 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시험을 따라간 제자들이 시험을 앞두고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항상 시험 앞에 놓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본을 닮아 항상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39절 예수께서 나가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39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다락방을 떠나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1). 제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목숨과 신앙을 위협하는 핍박이 임할 것이니, 이제 전대와 배낭과 칼을 준비하라는 진중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전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다락방은 습관을 따라 지정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그 장소를 미리 알 수 없도록 베드로와 요한을 은밀히 보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됐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마지막 만찬 시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들을 위하여 찢기셔야 했습니다(마 26:28; 고전 11:24). 그래서 가룟 유다가 익히 알고 있던 장소, 제자들과 습관적으로 자주 머무셨던 감람산을 향해 가셨습니다.

감람산은 감람나무(올리브 나무)가 많은 산이었고, 마태는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를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었다고 말하는데(마 26:36),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그 부근에 올리브를 짜서 기름을 만드는 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주일간 예수님은 베다니 숙소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지만, 이날 밤은 달랐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도시 남서쪽 에세네 구역의 개인 주택이었던 다락방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성전 맞은 편 동쪽에 있던 감람산을 향해 30여 분 컴컴한 밤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좁고 불편한 골짜기와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마침내 제자들과 자주 모였던 겟세마네에 이르신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0절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하시고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유다가 무리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고, 유대인의 심문을 받고, 로마인의 판결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이 이제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잡히실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열 한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내가 말한 것과 같이 사탄이 너희를 뒤흔들고 기름을 짜내듯이 너희를 짜내어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넘어져 완전히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리니, 기도하라. 그 유혹에 빠져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고 그분의 뜻대로 허락되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시험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내가 저기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마 26:36), 세 명의 제자, 특별히 더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여주신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41절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누가는 돌 던질 만큼 가셨다고 말하는데, 돌을 던져 닿을 거리를 말합니다. 아무리 멀어도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만큼(6-7미터, 대럴 벅)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심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실 곳까지 나아가시면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고뇌에 빠졌습니다(마 26:37). 그리고 동행하던 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

예수님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큰 고뇌에 빠졌습니다. 심하게 놀랄 뿐만 아니라 극도로 슬퍼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시험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문 앞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 사형 앞에서 커다란 덩치에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마도 덜덜 떨며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육체적 고통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유대인에게 끌려가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가 등이 파이도록 채찍질을 당하는 것, 십자가에 달려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에 이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면 그때야 죽음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 결코 쉬운 일도, 만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으니까요(히 4:15).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임박한 시험에 이토록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는 육체적 고통이 전부가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셔서 홀로 아버지 앞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누가의 말처럼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41절).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워하고 슬퍼하고 고민하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잔을 마시는 것을 고민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잔은 분노의 잔이었습니다(사 51:17; 렘 25:15, “여호와의 진노의 잔”). 하나님의 백성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대신 마셔야 했습니다. 영원 전부터 겟세마네 동산에 이른 그날 밤까지 처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진노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버지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사랑이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고, 아들은 아버지를 인하여 영광을 받는 관계였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자족하시는 분,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만족할 거리를 찾지 않는 분으로 묘사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영원히 만족하고 영원히 기뻐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이 관계는 지속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고(마 3:17; 17:5),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만 말하고 보여주신 대로만 행하였다”고 고백하며 순종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요 5:19). 그런데 이제 그 아버지께서 분노의 잔을 아들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대신 지게 될 많은 사람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고후 5:21; 벧전 2:22).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시 7:11). 그런 거룩하고 정결한 분께서 많은 사람의 오물을 뒤집어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잔이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하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서 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만큼 마시기 힘들고 두렵고 슬픈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만큼 마시는 것이 심히 고민이 되어 죽게 될 만큼 힘겨운 잔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친밀하게, 의심 하나 없이 아버지를 온전히 믿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아빠”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아버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버진 뭐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와 함께, 아버지가 내미시는 잔 앞에서 극도로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확실한 신뢰.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강한 인정.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저는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심히 고민이 되어 죽을 것 같아도, 아버지의 뜻이 거기에 있사오니, 아버지의 뜻을 믿사오니 저는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자기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래전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도 그랬고, 아들 예수님께도 계속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나중에 무리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 휘두르자,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책망하시며,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3-54).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 베다니에 계실 때, 아버지의 뜻대로 임하게 될 일을 생각하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7).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의 마무리처럼 이때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그때, 하늘에서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아버지는 자기의 뜻을 아들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시험이 극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옮겨달라고 구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그 뜻에 따르겠다는 기도로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뜻을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죽음의 고통으로 부르짖는 아들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셨습니다.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셨을 때, 그 모든 시험을 아버지의 뜻을 신뢰함으로,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나서, 예수님께 나타나 수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마귀가 가장 극단적인 고통과 두려움, 슬픔으로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시험을 이기고 아버지의 뜻을 신뢰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압도적인 시험의 무게와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동시에 기도하는 중에 받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적 전쟁과 같았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된 이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계신 예수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거세진 영적 전쟁에 맞서 힘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단순하고 명료한 표현이지만, 그날 밤 겟세마네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면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다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다가, 일어나 동산을 거닐다가 또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시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몸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굵게 흘러나왔고, 전쟁에서 칼에 맞으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이천 년 전 어두운 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심한 통곡을 하며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동산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시 얼굴을 땅에 대고 흐느끼며 기도하기를 반복하셨던 예수님.

여러분, 우리의 죄의 깊이가 이 정도란 걸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싸우고 때론 넘어지는 죄가 이 정도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 알고 싶으십니까? 겟세마네로 가보십시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예수님도 모르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떨어진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받은 축복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요일 3:1).

마지막으로 극심한 시험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순종할 수 있을지 잘 모르시겠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도 마실 수 없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진노의 잔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시험 대상자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온 이상, 이제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사탄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함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45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가끔은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아무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기도를 부탁하셨는데도, 어떻게 잠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둘째치고, 그들에게 닥칠 시험에 대해 예수님이 경고하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천하 태평하게 대비를 안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어찌하여 자느냐?”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의 뉘앙스가 “아니! 어떻게 자고 있느냐?”라고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줄 모르느냐? 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이들이 잠든 것은 이번 한 번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총 세 번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고, 세 번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올 때마다 어김없이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43, 45; 막 14:37, 40, 41-42). 

왜 잠이 들었을까요? 누가는 45절에 “슬픔으로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다”고 말합니다(마 26:43; 막 14:40).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신 죽음에 대한 말씀과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며 슬픔에 압도되어 육신이 지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일주일 주님과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심신이 지쳤을 것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정말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그 때에, 어쩌면 그들은 기도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육신은 연약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41; 막 14:38).

여러분, 우리도 연약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시험, 특별히 영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탄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진지하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인데(엡 6:12), 혈과 육에만 매여 수많은 시험에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제자들처럼 시험이 닥쳤을 때, 주를 버리고, 주를 부인하고, 죄에 넘어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왜 이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직접 보여주십니다. 극심한 시험 앞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며 그것에 순종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이 어떻게 더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쉬지 말고 기도하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우리의 믿음의 주, 믿음의 본이 되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하시는 길 중에 예수님이 하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을 앞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2).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그 기도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십시오(176-8pp). 18장 1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는 길에 하신 기도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고, 그 뜻대로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6절부터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즉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구하시고 나서(11절) 15절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시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제자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셨습니다. 악에서 그들을 건져주시고, 17절을 보면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구하셨습니다. 죄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고, 죄를 벗고 거룩에 이르도록 진리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보전해달라고 구하신 것입니다(11절).

그래서, 연약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심지어 부인하고, 믿음도 흔들렸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온전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본, 믿음의 주뿐만 아니라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는 길에 열한 사도의 연약함만 중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열한 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열한 사도로에게서 흘러나온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해서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입니다(요일 5:4).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인정하고 시험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간절히, 힘써,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에 위로와 힘을 얻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데 실패하고 수많은 시험에 넘어지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는 그날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주요 곧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히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