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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선지자들과 개인의 행복

본   문: 에스겔 24장 16-18절

설교자: 조 성 훈

 

 

“인 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구 약성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선지자들의 삶이 참 비극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의 개인적인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던 것은 바로 ‘아내’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의 마음 속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취해가겠다 하시고 결코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아내였습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구약성경 대부분의 선지자들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에 스겔은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은 개인적인 삶도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는데 자녀가 죽고 아내가 아프고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아마 다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들은 개인적인 행복까지도 희생해가면서 하나님을 섬겼을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행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 행복, 유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 나님은 음란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민족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은혜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이후에 다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호세아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음란한 여인을 취했고 아이를 낳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다시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로 갔습니다.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하나님의 반복되는 명령 앞에 그는 다시 순종합니다. 그 여인을 다시 돈을 주고 사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한 사람 호세아의 삶을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일생 단 한 번의 결혼을 음란한 여인과 한 것입니다. 호세아의 개인적인 행복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 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살리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북한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잡혀 굴에서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고 애굽에까지 끌려갑니다. 세례 요한에게 인간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장가도 못가고 집도 없이 광야에서 석청과 메뚜기를 먹고 살아갑니다. 큰 비전을 꿈꾸었던 그들의 부모가 볼 때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벌로 바리새파 중에서 상당히 전망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람이 돌변해서 이제는 헐벗고 굶주리고 두들겨 맞으며 살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은 불행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정반대의 삶이었습니다. 선교를 나가거나 목회를 하면 자식이 잘되고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니 아내를 데려가셨다, 주님을 섬겼더니 헐벗고 정처 없이 살았다는 간증들입니다. 많 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축복받는다고 합니다. 병에도 걸리지 않고 출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에 스겔이나 호세아 등 많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믿음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아내가 죽는 것이나 음란한 여인을 취하는 것 등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믿음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 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따라 살면서 그 약속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의 삶이 다만 이생 뿐이었다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호세아 역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단 한 번의 결혼을 음란한 여인과 했는데,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비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잠깐입니다.

 

히 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호세아도 에스겔도, 세례 요한이나 사도 바울도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꿈대로 자신의 유익에 따라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그들의 삶은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로서 하늘나라에서 상급과 존귀함을 받을 것이고 호세아 역시 영원에 비춰볼 때 결코 헛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름받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 리스도인들은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하나님의 뜻도 이루고 내 뜻도 이루는 것입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다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은 삶을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두고 내 뜻을 들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은 영혼의 닻과 같다고 했습니다(히6:19). 배를 멈추려면 닻을 내려야 합니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믿음이라는 닻을 내려야만 합니다.

 

 

결론

 

구 약과 신약을 통틀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은 어떠했나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다른 한 손에는 내 뜻을 붙잡은 채 씨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 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뤄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내를 잃는 것이 되었든, 음란한 여인을 취하는 것이 되었든, 하나님이 어디든지 가라고 하실 때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나그네로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과 신약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행복과 모든 뜻을 내려놓고 남은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