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로 사랑하라
본문: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에 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며, 또한 모든 제자가 반드시 따라야 할 필수적인 부르심, “하나 됨”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구하셨습니다(요 17:11). 동시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 13:34). 이렇게 하나 됨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엡 4:3).

특별히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 참석하면, 이 교회는 ‘참 사랑이 많은 것 같다’는 말을 해주시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더 사랑하기를, 그리고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명령하신 의미대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 새 계명(34절)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켜 “새 계명”이라고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었을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레 19:18).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약의 아주 오래된 이 계명을 몰라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 되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9).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구약 계명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40).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새 계명”으로 소개하셨을까요? 어떤 면에서 새롭다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사랑과 비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기독교 안에서만 하는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자”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자고 독려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이 말하고 행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세상 사람들도 어떤 관계에서는 서로 끔직이 사랑합니다. 따뜻하게 품고 이해하고 배려합니다. 잘못을 덮어주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깁니다. 너그럽게 대합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깊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대상에 따라 각각 사랑의 정도가 정해져 있습니다. “됐어,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아” 이렇게 사랑의 깊이를 정해놓고 그 선을 유지 또는 조정합니다.

 사랑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면 이런 생각을 품습니다. “내가 이거까지 사랑해야 돼?” “내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겠어?” 그러고는 그 사람을 더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한계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랑의 한계를 많이 발견합니다. 모든 성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편하고 좋고 가까운 상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자꾸 부딪히고 껄끄럽고 불편한 사람은 피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사랑하기 힘든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런 사람까지 사랑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더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행하는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은 세상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그래서 “새 계명”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34절)

34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가 서로 나눠야 할 사랑의 특징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1) 차별 없이 끝까지 사랑(원수까지도)

13장 1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자기 사람들을. 자기 사람 중 가깝고 좋아하는 사람을요? 아닙니다. 자기 사람들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얼마큼 사랑하셨습니까? 적당히요?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2절부터 나오는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을 직접 보여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어떻게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계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함께 드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몇 시간 후면 곧 잡혀 그들을 위해 참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내어주실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3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고자 자리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노예의 차림이었습니다.

5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노예의 차림으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하루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쓴 더러운 발을 물로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닦아 주셨는데, 그중에는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어떻게 제 발을 씻깁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로서 감히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의가 바른 제자였죠. 반면 그들 중에는 마귀 같은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마귀의 생각에 사로잡혀 예수를 팔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습니다(11절). 그런데 어떻게 하셨나요? 유다의 발도 차별하지 않고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모든 자기의 사람들, 심지어 원수에게도 차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사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32).

여러분,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굉장히 천한 일로 여겨져 노예가 유대인인 경우는 아무리 노예라도 그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제자들이 서로의 발을 씻기지 않았고, 예수님의 발도 씻겨드리지 않은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서로를 섬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님이자 선생이었던 예수님이 상상할 수 없던 그 일로 그들을 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적당한 사랑이 아니라 끝까지 베푸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기록을 남긴 요한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들의 발을 다 씻으신 후, 옷을 입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왜 내가 발을 씻겼는지 아느냐고 물으신 거죠.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2~15)

이 가운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분이 계십니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본이 바로 이것입니다. 노예처럼 낮아져서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까? 발이 아니라 목욕이라도 시켜주고 싶은 형제, 자매가 있는가 하면, 그 더러운 발을 치우라고 말하고 싶은 형제, 자매가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세상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여러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 15:13). 그 큰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됐는데, 여러분이 형제자매에게 주는 사랑의 크기는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35절로 넘어가기 전에,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사랑의 특징 하나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2) 서로 사랑(먼저 사랑)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차별이 없고 끝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서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고 하셨고,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서로”로 시작하는 명령이 많습니다(롬 12:10, 16; 14:13; 갈 5:13, 26; 엡 4:32; 골 3:9, 13; 살전 4:18; 5:11). 많은 경우 교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서로 ~하라”는 명령이 제대로 순종 되려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각자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명령어가 제대로 작동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먼저 그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이신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너 하는 거 봐서 나도 사랑할게. 당신이 먼저 하면 그때 나도 하겠다…이런 자세로는 예수님의 의도하신 서로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상대방이 하든 하지 않든 먼저 섬기는 것, 먼저 사랑하는 것, 모두가 그렇게 사랑하려고 할 때, 예수님이 의도하신 서로 사랑이 제대로 실현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0절에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먼저 사랑하는 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우리 옛 자아가 좋아하지 않는 일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말씀 마치고 강대상 옮기려고 하니 몇 분 남아주세요” 이렇게 요구하면, “아! 내가 먼저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기 쉬울까요? 아니면 “누군가 하겠지, 없으면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하기 쉬울까요? 후자입니다.

이런 육신의 본성은 오늘날 교회 안에 커다란 풍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소비자 중심주의”라고 부르는데, 교회를 식당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오는 것이죠. 섬긴다는 생각보다는 섬김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온다는 얘깁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선 평가와 비판이 많이 흘러나옵니다. 손님이니까 이 집 맛이 어떻고 서비스가 어떻고 이런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렇게 말 못 합니다. 오히려 어떻게 좋은 맛을 낼까? 어떻게 손님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팽배한 “소비자 중심주의”는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서비스 받는 곳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음악이 어떻고 애찬은 어떻고, 사랑이 없다느니, 주일학교 프로그램이 어떻다느니…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내가 먼저 가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왜 섬기지 않는지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다니는 소비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절대 “먼저” 사랑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먼저 하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은 절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27).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그래도 나는 섬김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땅히 먼저 섬기는 자로 교회 중에 있어야 합니다.

3.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35절)

이제 마지막으로 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교회가 사랑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사랑이 온전히 발휘될 때, 즉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 차별이 없는 사랑, 끝까지 하는 사랑, 먼저 하는 사랑, 예수님께 속한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발견될 때, 세상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하면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를 갖추고 멋진 시설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사랑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바울은 천사의 말을 하거나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거나 모든 지식과 모든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13:1~3). 

사랑에 실패한 성도는 무서운 책망을 받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형제를(자매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성도 각 사람을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이 얼마나 귀합니까? 보배롭습니까? 그런데 형제자매 사이의 화목을 깬다는 건 십자가의 원수, 마귀의 졸개로 행동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유오디아, 순두게-빌립보 교회).

또한 사랑에 실패한 교회는 무서운 징계를 받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요한을 통해 계시록 말씀으로 에베소 교회 이런 편지를 쓰셨습니다.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교회의 섬김, 수고, 인내, 가르침 등이 모두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가지 그들을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그들이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렸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요한은 서신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데서 멀어진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도 멀어진 것입니다. 성도 사랑을 버리면 주님 사랑도 버린 것입니다. 그런 에베소 교회에게 예수님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할 교회로서 역할을 빼앗아 다른 곳에 넘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역할을 다른 곳에 주고 너희는 떠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서로 사랑하자는 말은 그저 교회 안에서 더 행복하려고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의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로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이고,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교회는 사랑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세상은 대상에 따라 차별하여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형제자매를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적당한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맞게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자매를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먼저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봐서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뜻이고, 오늘날 주님의 제자인 우리가 순종해야 할 계명의 의미입니다. 차별 없이, 끝까지,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