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형 선고받은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 Part I
본문: 누가복음 23장 1절~12절
설교자: 조정의

목요일 밤에서 금요일 새벽까지, 예수님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세 차례 심문을 당하시고 아무 증인도 증거도 없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급히 열린 산헤드린 공회의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 모여 함께 의논한 결과, 그들이 사전에 모의한 대로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결정적인 증거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고 답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으니 신성모독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눅 22:70~71).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진정한 신성모독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거룩한 하나님이셨고 그들은 그 하나님을 죽이려고 한 악독한 죄인이었습니다.

1. 빌라도의 판결: 무죄(1~7절)

1절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그들은 유대인의 종교법을 가지고 신성모독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지만, 사형을 실행할 권리가 없었습니다(요 18:31). 그래서 곧바로 예수님을 결박하여(마 27:2; 막 15:1) 당시 로마 황제가 유대를 통치하라고 임명한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마 27:2; 눅 23:1). 빌라도는 원래 지중해에 있는 가이사랴에 관저를 두고 있었지만,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기 때문에(평소의 10배)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군사와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끌고 온 것은 새벽 5시쯤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시간이 6시쯤이니(요 19:14), 약 한 시간 동안 예수님은 빌라도에게서 헤롯으로, 헤롯에게서 다시 빌라도에게로 끌려다니며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받았던 재판처럼 아주 신속하게 또 부당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직전에 일어난 일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돈을 도로 가져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며 죄 없는 예수님을 판 것을 후회한 일입니다(마 27:3-10). 유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마 27:4). 

하지만 그들은 돈을 돌려받지 않았고, “(네가 한 일에 대해) 네가 당하라”고 말했으며, 유다는 성소에 돈을 던져 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마 27:5).

유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처럼 예수님은 참으로 “무죄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유대인의 재판에 넘겨진 것은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그분이 로마의 총독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된 것은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끌고 온 무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고발하는지 들어보면 이를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절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먼저, 이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이들은 아주 교만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이 작자)이라고 경멸하며 낮춰 부릅니다. 예수님을 더러운 범죄자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요 18:30). 예수님이 행악자라는 것이 이처럼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가식이 가득했습니다. 계속해서 요한의 기록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와서는 빌라도 관정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서 빌라도가 나오길 기다렸습니다(요 18:28-29). 그 이유는 참으로 가식적입니다.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으려 했던 것입니다(요 18:28). 유월절에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에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하는 건 깨끗한 일입니까? 참으로 가식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죽이려는 예수님은 참 유월절 어린양이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악한지요. 그 죄가 예수님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고발한 내용을 살펴봅시다. 진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지 말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했다.” 백성을 가르쳐 선동하여 로마를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요구하셨지 로마에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 역시 유대인의 종교나 관습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일주일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 관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아무런 문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눅 20:25). 만일 사실이었다면 세금에 민감한 로마 정부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역시 빌라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이 사람이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 어떻습니까? 사실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시고 보내신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다스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백성의 죄를 사하여 백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왕”이라는 것을 몇 차례 밝히셨습니다(마 16:16-20; 눅 20:44; 요 4:25-26).

하지만 지금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것 같은 “자칭 왕”은 아닙니다. 로마를 전복시키고 혁명을 일으킬 반역군 우두머리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고발 내용 중 아무것도 예수님께 해당하는 것이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죽이기 위해 최대한 로마 정부를 자극할 만한 죄목을 가지고 거짓으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눅 18:20). 얼마나 외식적이고 가식적인지요.

빌라도는 앞의 두 가지 고발 내용은 가볍게 넘어갔지만, 마지막 세 번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로마는 황제에 대항하는 모든 반역행위를 아주 신중하게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리를 떠나 관정으로 들어갔고 예수님을 자기 앞으로 불러 세웠습니다(요 18:33).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3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말이 옳도다”

아주 직접적인 질문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에 반해 예수님은 수수께끼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의 대답 “네 말이 옳도다”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네가 말하고 있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밖으로 나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도다” 하니

빌라도 눈에는 예수님이 왕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로마에 딱히 위협이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네 말이 옳도다”라는 대답을 듣고 어떻게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일까요? 우리에겐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사도 요한은 관정 안에서 빌라도와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요 18:33~38).

요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요 18:34). “다른 사람 말고 네가 볼 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냉소적이고 완악한 빌라도는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내가 유대인이냐? 나는 이방인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든 아니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네 나라 사람, 네 나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너를 고발하고 있지 않느냐?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요 18:35절)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예수님은 이 대답을 통해 두 번이나 반복하여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존재하는 다른 나라를 파괴하고 자기 나라를 세우기 위해 태어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진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다면 유대인들에게 넘겨져서 지금 로마 관리 앞에 서서 재판받을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 능력과 권세로 수많은 하늘 군대와 함께 자기 나라를 반드시 세우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러나 이 세상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길을 보여주러 오셨습니다. 천국의 진리를 가르치러 오셨고, 세상에 속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이미 그 나라 백성이 되신 분들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두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이해한 것이 하나 있는데,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는 대답은 예수님이 자기 나라를 소유하고 계신 왕이란 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묻습니다(요 18:37). “그렇다면 네가 왕이긴 한 것 아니냐?”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참 놀라운 부분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순간에도, 한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걸어가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주어진 그 시간에 빌라도에게 천국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의 흐름을 놀랍게 그 방향으로 전환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예수님은 여러 동네에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 복음”(눅 4:43)을 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38). 빌라도 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빌라도에게 진리를 듣고 믿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셨습니다. 냉소적이고 완악한 빌라도에게 은혜와 진리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줄 원수같은 자에게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를 통해서 여러분에게도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썩어질 세상 백성으로 살다가 영원히 멸망당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라고 그 나라 왕이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길에 대해 알기 원하십니까?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여기까지 들은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더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 18:38).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왕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듣기에 예수님은 종교적으로 지나친 면이 있어 보일지언정 로마 정부를 위협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던 무리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 것입니다(요 18:38).

빌라도의 판결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이 사람은 무죄다! 아무 죄도 없다!” 하지만 무리는 절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죽이려 했는데 무죄라니요. 그들은 없는 증거라도 가져와서 더 일을 크게 만들어서라도 빌라도를 압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5절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단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온 유대를 소동하게 만든 심각한 문제가 있는 범죄자라고 강력하게 고발했습니다. 마가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발했다고 말합니다(막 15:3). 온갖 거짓 증언을 가지고 예수님을 쉴 새 없이 공격했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항상 가르치던 유대인의 스승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내용을 가지고 고발하던지 빌라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보라,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마 27:13; 막 15:4). 예수님은 그들의 빗발치는 수많은 거짓 고발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잠잠히 참아내셨습니다(마 27:14; 막 15:5). 온갖 거짓과 악이 예수님 앞에 쏟아져 나왔고, 예수님은 그것을 선으로 묵묵히 갚으셨습니다.

옛 선지자 이사야는 이 일을 두고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빌라도는 크게 놀랐습니다. 보통 억울한 죄인은 그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크게 호소하고 어떻게든지 부당한 판결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런 장면을 수없이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처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 쏟아지는 모든 거짓 고소를 묵묵히 다 받으셨습니다. 

이제, 빌라도의 고민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아무리 판단해도 이 예수는 죄가 없는 사람이었고, 하지만 성난 무리를 잠재우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을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막중한 책임감을 한 번에 덜어줄 비책이 생각났으니, 바로 조금 전 그들이 언급한 “갈릴리”라는 말이 떠오른 것입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했다고?” 빌라도는 재차 예수님의 소속을 묻습니다.

6절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절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냐? 그러면 갈릴리를 관할하는 헤롯이 해결하면 되겠구나…” 헤롯은 직급 상 빌라도의 아래 있었지만, 분봉왕(지역 통치자)으로서 갈릴리, 베뢰아를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2. 헤롯의 판결: 무죄(8~12절)

예수님은 헤롯이 머물던 궁전으로 끌려갔습니다. 빌라도 관정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였고, 고발하던 무리가 함께 따라갔습니다.

헤롯은 집안 대대로 예수님과 악연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만날 헤롯 안디바의 아버지는 헤롯 대왕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왕이었습니다(마 2). 혹시라도 자기 권력에 해가 될 것 같으면 모조리 죽였던 미친 왕이었습니다. 나중에 베들레헴 근방에 두 살 아래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그 아들들이 아버지가 다스리던 이스라엘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들을 가리켜 “분봉왕”이라고 부릅니다(왕보다는 낮은 지역 통치자).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던 갈릴리는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던 지역이었고, 그래서 빌라도는 헤롯에게 이 문제를 떠넘긴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 역시 예수님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강제로 이혼했고, 이것이 죄라고 지적한 선지자의 목을 잘라 쟁반위에 얹어 아내에게 바쳤는데,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을 백성에게 소개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막 6:22~28; 눅 3:19~20).

세례 요한만 죽이면 끝인 줄 알았던 헤롯은 그 이후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기적과 가르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매우 놀랍니다. ‘내가 요한을 죽였는데,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눅 9:7~9). 그 후 예루살렘에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이 이를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은 헤롯을 “저 여우”라고 부르셨습니다(눅 13:31~32). 예수님에게 헤롯의 위협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자처럼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여우처럼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그 예수를 눈 앞에서 보게 된 것이니 헤롯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한 번 보자!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아마도 여러 말로 예수님을 시험했을 것입니다. 천천히 교묘한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떤 일을 행했는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모든 불합리한 질문에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정반대로 예수님을 좇아 헤롯 궁전까지 찾아 들어온 무리는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습니다.

9절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죄인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침묵은 그분의 죄 없으심을 똑똑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셨습니다(벧전 2:15). 예수님께 죄가 있어 이런 수모를 당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칭찬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선을 행하신 것입니다(벧전 2:18-20). 시끄러운 그들의 악독한 목소리보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침묵이 훨씬 더 큰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한 장면은 오직 누가만 기록하고 있어 우리는 더 자세한 장면을 알 수 없습니다. 방탕하고 경박했던 안디바는 이제 예수에 대해 흥미를 잃었습니다. 아무런 이적도 반항도 변명도 없는 이 죄수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보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일을 행했습니다.

11절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을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네가 우리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른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요한이 살아돌아온 줄 알고 내가 크게 놀랐던 바로 그 선지자냐? 내가 죽이려 했던 그 사람이냐? 근데 이 꼴이 뭐냐? 네 능력은 어디로 간거냐? 빌라도가 그러기를 네가 왕이라지? 그럼 어디 한 번 왕처럼 입어봐라”

만왕의 왕께서 백성에게 손가락질당했던 방탕하고 몹쓸 죄인의 희롱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왕께서 로마의 작은 변두리를 다스리는 지역 통치자의 업신여김을 당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시늉을 하며 놀려댔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왕이 입을법한 빛나는 옷을 입힌 채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가는 길 걸어서 10분,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예수님은 수치와 모욕을 입고 한 걸음 한 걸음 끌려가셨습니다.

빌라도는 헤롯이 보낸 선물, 빛나는 옷을 입고 돌아온 예수님을 보면서 헤롯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도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도 그래서 도로 보내었다”(23:15)고 말합니다. 헤롯의 판결 역시 무죄였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12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로마에서 세운 통치자 빌라도와 직급상 그 밑에서 다스리고 있는 지역통치자 헤롯 안디바,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 힘든 관계였습니다. 특히 빌라도는 황제가 부여한 권력을 남용하여 헤롯이 다스리는 지역을 종종 간섭하고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서로 좋아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훗날 사도들이 말한 것처럼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렀습니다(행 4:27). 그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예수님은 무죄였습니다. 그분을 판 유다가 그분을 무죄라고 말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역시 그분이 죄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말했고, 헤롯의 판결 역시 무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의 죄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팔렸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며, 빌라도와 헤롯의 죄 때문에 심문당하며 희롱과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8)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형벌 받을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은 다름이 아닌 그 나라 백성이 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이토록 낮아지게, 수치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시는지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며 살고 계시는지요. 빛난 옷을 입고 결박당한 채로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걸어갔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수많은 백성의 거짓 고소를 묵묵히 들으셨던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그분이 당하신 고통의 깊이 만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그분이 받으신 모욕의 크기만큼, 우리 삶에서 나오는 주님을 향한 찬양 소리가 더욱 커지기 원합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닌 분들께, 예수님은 이 자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에게 그 나라 백성이 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을 그 나라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묻기만 하지 마시고, 정말 그 진리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새벽 6시가 되기 전,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빌라도 앞에 다시 서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또다시 충격적인 사건과 그 사건을 겪어내신 예수님의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 이야기를 계속 나누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