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의 승리

본문 :  사도행전 19장

설교자 : 조정의

2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수개월 뒤(“얼마 있다가 떠나”, 18:23) 3차 전도 여행이 시작됐다. 갈라디아, 브루기아를 시작으로 세워진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마침내 에베소에 도착했다. 전에 잠시 들렸다가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곳이다(18:21). 거기서 바울은 전도사역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서방 본문에 따르면 바울은 거의 3년 가까이 에베소에 머물며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전까지 가죽 장사를 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 다들 일하지 않고 낮잠을 자는 시간에(오전 11시~오후 4시) 매일 제자를 모아 복음을 전했다. 한 주석가는 계산하기를 1주일에 6일, 하루 다섯 시간, 약 3,120시간 동안 복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유대 회당에서 비방을 받고 우상 숭배자들에게 곤욕을 치렀지만, 끝까지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한 바울이 복음이 마침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 아닌가?(10-20절).

하지만 본문의 주인공은 성령님이시다. 사람이 승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다. 승리의 능력은 성령님께 있다. 성령께서 충성된 일꾼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승리를 거두게 하신다. 우리도 성령을 받았다. 참 복음을 알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이 복음을 통해 거두시는 참 승리를 삶에서 기대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승리가 무엇인지 알고, 구하길 바란다. 복음의 충성된 일꾼—성령의 도구가 되어 성령이 주신 승리를 맛보길 원한다.

1.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참 신자를 낳으신다(1-7)

현대 교회는 복음의 승리를 교인 수 증가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지만 참 승리는 교인이 아니라 신자를 낳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열심히) 종교 생활 하는 많은 가라지를 교회 심는 게 아니라 알곡을 심는 것이다. 성령은 복음을 통해 참 신자를 낳으신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어떤 제자들”(열두 사람쯤, 7절)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한 이들이었다(1, 2절).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들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추측한다(3절). 그들은 아직 거듭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는 종교인으로 볼 때 매우 신실하고 훌륭한 자들이다. 스승인 요한은 청빈한 삶을 살았고(낙타털 옷, 메뚜기와 석청, 마 3:4) 대쪽같이 회개를 촉구했으며(마 3:6-7), 그의 제자들은 금식과 기도에 헌신했다(마 9:14; 눅 11:1). 교리상으로도 부족하지만 잘못된 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회복하실 나라를 기대했고(마 3:2-3), 요한을 신처럼 숭배한 것이 아니라 요한이 가리키는 메시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한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것과 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야 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4-6절).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4절),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5절). 그 결과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방언과 예언으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었음을 보이셨다(6절). 처음에 오순절에 유대인에게, 그 후에 사마리아인과 이방인 고넬료에게 행하신 성령의 역사가 똑같이 일어났다(행 2:1-4; 8:14-17; 10:44-47).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이루시는 승리가 참 신자를 낳는 거라면, 우리도 복음을 통해 그것을 기대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종교인이 늘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공예배 참석과 헌금, 기도에 헌신하기만 하면 그 사람이 정말 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삶을 살든지 살지 않는지 아무 상관 안 하는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적은 무리일지라도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주시길 기뻐하시는 참 신자의 모임이 되길 원한다(눅 12:32).

교회에 새로 온 사람의 흥미를 끌고 구도자의 구미를 당길 이벤트, 등록된 성도를 잘 관리하는 시스템,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않도록 잘 붙잡아 주기 위한 소그룹 등을 통해 교회의 부흥을 꿈꾸는 것, 어떤 면에서 좋지만 다 부차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잘못되기 쉽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 시스템, 소그룹 등은 구도자가 구원받고, 참 신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야 한다.

유평교회에 성령님께서 복음 듣기 원하는 이들을 불러모아 달라고 기도하되, 그들이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사랑하는 가족이 교회 다니기 시작한 것에 감사하지만, 진짜 복음이 일으키는 승리,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승리를 성령님께서 일으켜 달라고 간절히 구하자.

2.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참 능력을 보이신다(8-20)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두 장소에서 이뤄졌다. 첫 번째로 회당이다. 인구 25만의 큰 도시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유대인 회당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약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강론(토론식 설명)하고 권면(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8절). 

두 번째 장소는 두란노 서원이다. 두란노라 하는 사람이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한 강당이나 그가 소유한 건물을 가리킨다. 회당에서 석 달간 가르치면서 서서히 시작된 유대인들의 거부와 비방 때문에 결국 바울은 이곳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9절). 여기서 두 해 동안(2년) 매일 하나님 말씀을 강론했다(9-10절). 결과적으로 복음은 아시아 전역에 사는 유대인, 헬라인 모두에게 들려졌다(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 교회도 이때 설립).

이런 엄청난 부흥은 성령께서 복음에 능력을 더하심으로 일어났다. 성령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11절). 얼굴을 닦거나 덮는 손수건, 몸을 가리는 앞치마 등 바울의 몸에 걸친 것들을 가져다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에게 얹으면 치유와 축귀 역사가 일어났다(12절; 베드로 그림자, 행 5:15).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능력을 더하신 것이다.

그러자 가짜가 나타났다. 유대인 중 순회 마술사로 밥벌이하는 이들이 성령이 바울을 통해 하시는 일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13절). 대표적으로 유대 제사장 가문의 스게와일곱 아들이 있었는데(14절), 악귀 들린 사람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말하며 엄청난 힘으로 그들을 제압했고, 결국 그들은 발가벗겨져 몸에 멍이 들도록 맞았다(16절). 그 소식을 들은 에베소의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은 무얼 알게 됐을까?

① 바울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난다. ② 복음의 능력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특별한 ‘주문’에 있는 게 아니다.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있다.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면 사람의 말이나 물건엔 아무런 효력이 없다. 

이 일을 통해 결국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졌고(17절), 많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자백했으며(18절), 이전에 행하던 악한 일들, 마술로 사람을 미혹하며 돈을 벌던 과오를 청산했다. 19절에 그들이 불사른 책값이 은 오만이라 하는데, 5만 명의 하루 품삯, 환산하면 약 25억에 이른다. 이처럼 놀라운 복음의 승리는 주의 말씀 곧 복음 말씀에 성령께서 힘을 더하시고 세력을 더하셨기 때문이다(20절).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이런 능력을 더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가시적으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높이고 회개하고 믿게 되지 않을까?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날 많은 은사 주의 교회와 이단에서 가짜 성령 쇼를 벌인다. 치유과 축귀를 흉내 내며 거짓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자기 배를 불리려고 가짜 복음을 선포한다. 셀 수 없이 많은 피해자를 낳고 물질적, 정신적, 영적 폐해를 끼친다. 결국 예수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조금의 회개도 일으키지 않으며, 짜릿한 흥분과 열기가 사라지면 참회심과 구원의 열매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오늘날 성령의 능력은 주로 어떻게 보여질까? 성령께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의 삶 속에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보여진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절제(갈 5:22-23). 참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런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와 같은 열매를 맺는다(갈 5:25). 

우리가 전달하는 복음이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함에 틀림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 복음을 전달하는 우리의 삶을 먼저 보고 듣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성령님께서 당신 삶에 심겨진 복음을 통해 참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길, 그래서 당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높아지시고,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구하라. 성령님은 지금도 복음을 통해 능력을 보이신다.

3.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이 세상을 이기신다(21-41)

성령께선 바울에게 로마 그리고 스페인(서바나, 롬 15:24, 28)에 이르는 선교 여행의 큰 그림을 보여주셨다. 21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그리고 로마도 보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 전에 복음 동역자들을(디모데, 에라스도)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보내 예루살렘 구제에 필요한 물질을 마련하게 했고(고후 9:3, 4), 자신은 에베소에 조금 더(얼마 동안 더) 머물게 됐다(22절).

바로 그때 복음 때문에 에베소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23절). 에베소는 아데미 신을 모시는 특별한 신전을 소유했고, 그 신전은 220년간 온 아시아가 재건에 힘써 완공한 고대 7대 불가사의 건물 중 하나였다. 아덴에 있던 파르테논 신전의 네 배 크기로 축구 경기장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신을 자신들이 수호하고 있다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신의 형상을 새겨 두둑이 돈을 챙기는 상인들은 그들의 신앙심과 상관없이 이를 매우 좋게 여겼다(24-25절, “적지 않은 벌이, 풍족한 생활”).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계속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라고 하니(26절), 자기들 사업에 지장을 줄 게 뻔하고, 그러면 풍족한 생활을 잃게 될 것이며, 핑계지만, 아데미 신에 대한 종교심까지 상실될까 염려가 되었다(27절). 분노로 가득 찼다(28절). 그래서 조합장쯤 되는 더메드리오가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을 모아다 대규모 집회를 벌인 것이다(24절). 

그들은 바울의 측근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연극장으로 끌고 들어갔다(29절, 2만 5천 명 수용 가능). 소식을 들은 바울도 연극장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바울의 여러 친구들이 말렸다(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30-31절). 연극장엔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정작 왜 모였는지 모르는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32절).

상황은 심각했다. 유대인 대표 알렉산더의 말도 묵살하고(33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두 시간 동안 크게 외칠 만큼(34절).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종료됐다. 서기장(시장)이 아주 차분하고 냉정하게 설득했기 때문이다(35-40절). 

① 우리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 아데미의 신전지기란 걸 모두가 안다. ② 그리스도인이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여신을 비방한 적이 없다. ③ 정식으로 총독 앞에서 재판하도록 고소하거나 민회에서 결정하면 된다(달에 세 번). ④ 그런데도 정당한 이유 없이 소동을 일으키면 로마 주 정부가 오히려 우리를 책망하고 불법 집회로 소동을 일으킨 죄목으로 자치권을 빼앗아 갈 수 있으니 주의하라. 이 말에 모임은 흩어졌다(41절).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서기장이 그들의 법을 통해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에게서 책잡을 것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복음의 열정이란 핑계로 신전을 훼손하거나 우상을 모욕했다면 은장색의 집회가 정당해졌을 것이고, 이후에 정식 고소나 재판이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기독교는 쓸데없는 박해를 받고 복음 전파도 강력한 제지를 당했을 것이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교회는 마땅히 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법 단체가 아니라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생활하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딤전 2:1-2). 이 땅에 시민권이 있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누구보다 선량하고 신실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구약의 다니엘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고발할 수 없을 정도로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이나 허물을 찾을 수 없었다(단 6:4-5).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이긴다는 표현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성령께서 복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견고하게 지키실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투표권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전복시키고 군림하는 것도 성령이 일으키는 승리가 아니다. 

성령이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믿음’에 있다(요일 5:4). 우리의 믿음이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굽히지 않는 복음의 진리 위에 있을 때, 그리고 그 믿음이 삶에서 성령에 따른 행함으로 풍성히 열매 맺을 때, 그때 우리는 세상을 이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복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복음 사역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젹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7-19).

복음의 승리가 당신 삶에서 선포되길 바란다. 성령께서 참 신자를 낳으시고, 능력을 보이시고, 세상을 이기는 역사를 당신이 전파하는 복음을 통해, 당신이 행하는 복음적인 삶을 통해 일으키시길, 그래서 그것을 기쁨으로 자랑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