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울의 변호: 나는 부활의 목격자입니다
본문: 사도행전 26장 1~23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로부터 삼 일째인 주일 아침 부활하셨는데, 이를 기념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아무리 말하고 다녀도 예수님이 묻힌 무덤이 그대로 있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무덤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에 거짓 종교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진실로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마 28:11-15).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에 목숨을 내놓은 수많은 순교자의 피는 그들의 말에 진정성을 확증합니다. 누가 거짓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수많은 사람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조롱과 채찍질, 결박, 투옥,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고, 광야, 산, 동굴, 토굴 등에 떠돌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히 11:35-38).

목숨이 끊어지는 극심한 고통을 감수할 만큼 “더 좋은 부활”이 확실하다고 믿었던 사람들, 그것은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신 분” 곧 부활하신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라고 말합니다(고전 15:13). 거꾸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반드시 죽은 자에게 부활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 증거로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의 180도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합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었는데,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고전 15:9). 그리스도인을 잡아다 순교하게 만든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교를 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수를 미워했던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의 삶에 영원한 반전을 가져온 부활의 주님을 우리 모두 만나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혹시라도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다면, 삶에 부활의 확신과 기쁨을 다시 채우고 산 소망 가운데 기뻐 찬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말처럼 우리 모두가 바울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상황]

사도행전 26장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서서 자기변호를 하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 바울은 10여 년간 3차에 걸쳐 지금의 터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행 13-20). 그 지역에 흩어져 있던 정통유대인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은 철저하게 믿었지만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심히 핍박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돌아왔을 때 성령이 증언하신대로(20:23) 결박되어 환난을 당합니다(21:27-36). 체포되기 전까지 바울은 유대인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습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예수에 관해 말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두 차례 자기를 변호한 바울은 신변의 위협으로 가이사랴 지역으로 옮겨졌고(23-26) 그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가이사랴에 구류합니다(행 24:27). 약 2년 동안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바울은 벨릭스와 그 뒤를 이어 부임한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변호할 기회를 얻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11).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에게 상소하고, 가이사가 있는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임명되고 바로 다음날부터 바울의 사건을 재판하였지만, 자기가 짐작한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없고, “오직 바울이 유대인의 종교를 위태롭게 한다”,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는 문제로 고발한 것뿐이었습니다(25:18-19). 베스도는 이 일을 어떻게 심리할지 몰랐습니다. 그 때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들립니다(25:13).

아그립바 왕은 우리에게 익숙한 헤롯 대왕의 증손자로 레바논과 요단강 동편 일부지역을 다스리는 왕이었고 절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종교와 풍속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아그립바가 자기와 함께 바울을 심문하면서 가이사에게 전달할 죄수의 죄목을 합당하게 적어 보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버니게, 가이사랴 총독 베스도, 그리고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이 바울의 변호를 듣기 위해 모였고, 바울을 그 접견 장소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말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바울의 자기변호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마디는 항상 “왕이여”로 시작됩니다(2, 13, 19). 저는 이것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 만났을 때, 만난 후로 구분하여 전하겠습니다. 이제 바울의 변호,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1.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2~12절)

먼저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높여줍니다. 그의 앞에서 변호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긴다고 말하고(2절), 특히 그가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있으니 자기 말을 더 잘 이해하고 “너그러이” 들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합니다(3절). 그러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개를 합니다.

4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는 자기 민족 유대인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생활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유대인친구들을 불러 조사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증언을 한다면 5절 말씀처럼 “바울은 유대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습니다”라고 증언할 것이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로마 시민권을 취득했지만(행 21:39), 바리새인의 아들이었고(행 23:6), 정통 유대인으로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았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행 22:3). 다른 신실한 정통유대인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행 22:3).

바울은 사실 지금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 받는 이유도 이 정통 유대교를 파괴하거나 조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당시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벨릭스 총동 앞에서 바울을 가리켜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한다”고 고발했습니다(행 24:5-6).

하지만 바울은 지금 자기를 변호하면서 그 고발이 사실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들 안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것뿐이다. 그 때문에 여기서 심문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것은 “우리 열두 지파 모두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섬기며 얻기를 바라는 그 소망”이며 그것을 소망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거짓 고소를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변호합니다. 바울의 강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왕이여!”라고 호소합니다. “왕이여! 저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소망을 간절히 바란 죄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곧 부활의 소망입니다(8절). 실제로 바리새인은 구약성경이 약속하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믿었습니다(행 23:7-9). 그 소망을 믿는 다는 이유로 바울은 지금 감금된 것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릿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베스도나 로마 천부장들, 사두개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는 것은 미련한 신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소망에 관해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 왕은 죽은 자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저주를 받아 못 박힌 그리스도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철저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을 섬겨 부활의 소망을 받는 것이 정통유대교의 구원인데, 예수는 그렇게 살지도 않았고 나무에 달려 죽었으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예수를 믿고 따르라니 이는 하나님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 예수를 그렇게 거리끼는 존재로 바라봤습니다. “나도 그랬다”(9절).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사렛 이단 예수파를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정통 유대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전염병 같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에게 요청하여 그들의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을 죽일 때 찬성 투표를 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사울의 발 앞에 두었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행 7:58). 그는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행 8:1).

한 사람을 과실로 죽여도 그 죄책감은 평생을 갑니다. 바울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성도를 가두고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그래서 후에 그는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울은 또한 고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잡힌 자를 고문하여 강제로 예수를 모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정통유대교의 소망과 믿음에 사로잡힌 만큼 그 반역자 그룹인 예수의 추종자들을 미워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성 밖에 있는 외국에 사는 추종자까지 가서 잡아올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불량배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고발된 것처럼 유대교를 무너뜨리거나 혼란을 가져다주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유대교를 사랑하고 정통유대교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유대교에 방해가 되는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인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모든 장로가 증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소망은 간절히 믿지만 부활하신 예수는 절대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예수는 아주 증오했습니다.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바울은 평소와 같이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얻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갑니다.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약 250km(유평-광주, 노새를 타고 5일 길) 정도의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는 길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을 만납니다.

2.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을 때(13~18절)

왕이여! 바울이 다시 한 번 아그립바 왕을 부릅니다.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정오가 되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는데(9:3) 길에서 보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과 그 동행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정오니까 햇빛이 아주 밝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둘러 비췄다”고 말합니다. 빛이 하늘에서 직선으로 바울과 그 무리를 비춘 것이 아니라 빛이 그들을 둘러 싼 것입니다(행 9:3).

그 결과 모든 사람이 땅에 엎드러집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 일어났던 일과 같습니다(마 17:1-8).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에서 광채가 나며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날 때 제자들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17:6).

지금 그런 영광의 광채가 바울과 그 동행들을 둘러쌌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립니다. 같은 간증이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 나오는데, 9장에서는 바울과 “같이 갔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고 말하고(9:7), 22장에서는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22:9).

종합해 보면 바울과 그 동행들은 똑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영광스럽고 찬란한 광채에 둘러싸였고 천둥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요 12:29). 하지만 동행들은 그 빛을 내고 계신 이를 보지 못했고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분을 봤고 그 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울에게 들린 말은 히브리말이었습니다(아람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가시채는 가축들을 올바른 길로 몰 때 쓰는 끝이 뾰족하고 가느다란 작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는데 그것을 반항하는 가축처럼 뒷발질하며 거스르면 너만 고생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하는 일, 즉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는 일이 사실은 하나님의 올바른 길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광스러운 광채와 음성이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의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15절).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등의 대답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뒤따른 대답은 바울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5절)

지금 바울에게 나타난 분, 바울이 보고 그 광채로 인해 볼 수 없게 된 분, 그분은 바로 바울이 그토록 증오하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그 사람 예수가 진정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모든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능력을 가지신 부활의 주님이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 나서야 바울은 이제 그가 바라고 소망하던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사명을 맡깁니다. 16-18절입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전달해야 할 복음의 중심내용은 바울이 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중 어둠 가운데 있는 자,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를 빛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 그것이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그렇습니다. 바울이 받은 소명이 곧 지금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내일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19~23절)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바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을 한 차례 더 부른 후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를 잡아 죽이러 갔던 다메섹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 유대 온 땅, 이방인까지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야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일은 예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구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옛적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의 소망을 가져다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여러 번 강, 강도, 동족, 이방인, 시내, 광야, 바다,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4-27).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어떻게 사울이 바울이 됐을까요? 예수를 증오하던 자가 예수를 위해 자기 생명조자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을까요? 세상의 부귀, 영화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평안과 안정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를 증언하는 자, 예수를 위해 위험과 핍박과 죽음을 감수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19-22)

그는 부활의 삶을 소망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확신했습니다. 죽음 그 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그 부활의 삶을 얻는 다고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어떻게요?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를 본 그는 다시는 예전처럼 살 수 없었습니다.

[결론]

여러분 바울의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 고백은 정말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이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기 목숨조차 조금도 아끼지 않고 헌신하며 사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땅을 치면서 이렇게 말할 사람입니다. “아이고! 망했다! 나는 부활이 있다고 믿고 모든 것을 거기에 걸고 살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 세상이 전부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처럼 살고 있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정말 망해버릴 삶을 살고 계십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만일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지금 내 삶에 어떤 타격이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참 부끄럽게도 타격을 입을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부활의 소망때문에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느라 핍박 받는 것도 없고, 부활을 외치느라 직장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도 없습니다.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남들 보기에 손해처럼 보일만큼 많은 물질을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사탄의 권세 아래 빠져있는 이웃에게 빛을 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내지도 않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이 세상의 삶 뿐이어도 지금 살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부활을 그만큼 소망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만큼 사랑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선을 그으려 할 때,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만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만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부활의 삶을 허락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바울에게만 자기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 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같은 구세주, 같은 부활의 주, 같은 사령관 밑에서 우리 모두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빛가운데 우리 각 사람을 찾아와 자기의 종으로 불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증언하는 일에 우리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