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울의 간증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3절-24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간증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 때문에 익숙한 말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간증은 교회 용어, 교회 사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증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증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에게 제일 친숙한 간증은 처음 주님을 만난 일, 구원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구원간증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침례식을 하기 전에 구원 간증을 듣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성도들 각자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를 생각하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도 자신의 구원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간증할 때처럼 자세한 이야기를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 간증을 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나누며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 왔다는 것과 자신의 사도직분, 복음을 전하는 사명 역시 하나님께 왔다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간증을 나누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의 간증이 갈라디아서에 나온 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간증은 본문뿐만 아니라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씀들을 참고하면 좀 더 입체적으로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간증이든 그 간증에는 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의 상황이나 자라온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간증에는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 차원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구원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그를 구원하시는 이야기, 간증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기에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간증에는 그것보다 큰 놀라움이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극적이고 놀라운 사건이 있기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바울이 자신의 간증을 통해 어떻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변호하는지 살펴보고 바울의 간증을 통한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복음의 진실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에는 지금 우리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도 했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바울이 꾸며낸 것은 아닌지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에 넘어가기도 했고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간증을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행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양한 방법으로 단락을 구분할 수 있는데 저는 예루살렘 방문을 기준으로 두 단락으로 구분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단락 13절에서 17절까지는 예루살렘 방문 이전의 간증이고, 둘째 단락 18절에서 24절까지는 예루살렘 방문 이후의 간증입니다. 첫째 단락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에 있었던 이야기이고 둘째 단락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만난 것과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저는 이렇게 두 단락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첫째 단락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이고 둘째 단락은 베드로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럼 첫째 단락인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할 때 무엇을 먼저 말하게 될까요? 먼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도 그러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13-14)

여기서 바울이 반복해서 말하는 흥미로운 말이 있습니다. “유대교”입니다. 신약에서 딱 두 번, 13절과 14절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현재와 이전을 구분하는데 자신의 이전을 말할 때 “유대교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전과 이후를 ‘유대교’와 ‘기독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간증은 단순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며 소망했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유대교에 있을 때를 말하면서 바울이 했던 일들과 바울 자신이 어떤 자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전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 갈라디아 교회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13)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행한 일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교회를 핍박하며 없애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엄청난 열심과 충성심으로 그 전통을 따랐던 자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자신이 했던 일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22:4)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열정 때문에 유대교의 광신도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부르며 없애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세등등했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5) 15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간증에서 등장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입니다. 바울의 간증에도 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열심으로 어떻게든 교회를 없애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았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의 인생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하나님이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바울이 예수님을 믿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셨고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그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살면서 배운 것들, 영향을 받은 것들, 경험한 것들,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셨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을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르신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그럼 하나님이 바울에 대해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16) 바울의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은 예수님을 이방에게 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바울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이 사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바울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일까요? 그는 유대인이었고 엄격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서 이방인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자였고 이방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세상에서 쓰레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제는 그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울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냥 겉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와 같은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분에 대해서 어떤 변호가 될까요? 첫째 단락의 남은 말씀을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6-17)

여기서 바울이 하는 말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어떤 혈육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혈육이라는 것은 친척이나 혈연관계를 말하기보다는 단순히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혈육이라는 말은 인간적 연약함과 한계를 부각시키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복음과 사도직분은 ‘혈육’, 곧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분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에 대해서 확인이나 승인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 복음에 대해서 상의하거나 도움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조언의 말이나 복음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과 사도직분에 대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있는 먼저 된 사도들에게도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도 친숙한 자신의 행적을 되새기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자신의 놀라운 변화는 사람의 설득이나 배움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바울의 장래는 누구보다 밝았고 그의 지식과 열정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울이 유대교에서 떠나 복음을 전하는 위험과 고생을 자처한다는 것,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뿐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과 사도직분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복음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만남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변호합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둘째 단락은 베드로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18-19)

바울은 삼 년이 지난 후에 게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15일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첫째 단락에서 예루살렘에 가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둘째 단락에서는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을 중요하게 말할까요?

바울이 받은 복음과 사도직분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복음이 사도들의 복음과 별개의 것이 되거나 바울의 사명이 다른 사도들의 사명과 관계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복음과 사명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물론 그 어떤 사람과도 관계가 없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계시하신 분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복음의 내용 역시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다른 사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바울 역시 교회의 한 지체이고 그가 세우는 이방인의 교회들 역시 교회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방문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방문한 것은 3년 후의 일입니다. 3년이라는 시간은 바울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과 베드로가 만납니다. 그리고 15일 동안 함께 지냅니다. 그 두 사람이 무엇을 했을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서로의 경험과 지식들을 나누며 정말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울보다 먼저 사도 된 자요 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복음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방문에서 만났던 사람은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뿐이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사도들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는 것은 바울의 복음이 사도들의 복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바울과 베드로와의 만남은 바울의 복음에 대한 사도의 인정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이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잠깐 맹세를 덧붙이고 나서 예루살렘 방문 이후의 행적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말에 거짓이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20) 바울이 지금 하는 간증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의 진실함을 엄숙하게 맹세하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와의 만남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줄곧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 바울의 얼굴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변화, 바울이 예전에 그가 없애려고 했던 믿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 교회들이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통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 그의 사도직분이 하나님께 왔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사람에게 왔을 거라는 추측이나 가능성을 제거합니다. 그럴 수 없는 겁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 받은 참된 복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외면하고 다른 복음을 따른 갈라디아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복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와 달리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야고보는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갈라디아 교회와 달리 유대 교회들은 바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간증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바울의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바울이 어떤 자에서 어떤 자가 되었습니까? 그 변화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심히 박해했던 자에게 무엇이 합당할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바울의 변화는 단순히 종교를 바꾼 변화가 아닙니다. 유대교였던 바울이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로 바꾼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마치 교회 안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교회 다니는 정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바울의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변화입니다. 삶의 한 영역, 종교라는 부분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 전체가 바뀐 것입니다. 그의 생각, 가치관, 삶의 목표, 삶의 전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한 걸까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변화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바울이 간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간증할 수 있습니다.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던 바울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찾아오셨고, “그러나”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간증할 수 있습니다. 간증은 곧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변화된 삶, 그리고 변화되어 가는 삶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변화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변화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바울의 간증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그 뜻에 따라 역사하셨습니다. 스스로도 자격 없음을 아는 그를 은혜로 품으셨고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셨습니다. 결국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것을 간증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간증하고 계십니까? 지금 어떤 고백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시기에 하나님이 내 삶의 주체로서 나를 변화시키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움직이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있습니까?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연약함과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십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종이 위에 나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어떤 간증을 써내려가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훗날 내 삶이 기록한 간증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내 삶이 하나님에 대한 나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을 믿는 자로서 변화된 삶으로 더 주님을 닮아가며 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