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부활논쟁: 믿음과 현실이 다를때
본문: 누가복음 20장 27~40절
설교자: 조정의

 

한 달 만에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주 복음 집회를 빼고 이제 두 달 정도 쉼 없이 누가복음을 이어나가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마지막 일주일 에 일어난 일로, 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월요일 성전의 온갖 장사꾼을 쫓아내시고, 그때부터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찾아와 논쟁을 벌인 사건입니다. 화요일에 일어난 이 논쟁은 총 세 차례 이루어졌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입니다.

논쟁을 걸어온 상대는 다양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바리새인과 그 제자들, 헤롯 당원, 그리고 이번엔 사두개인입니다.

논쟁의 이슈 역시 다양했습니다. 첫 번째 논쟁 때는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았고, 두 번째로는 가이사에게 바칠 세금으로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논쟁에서 사두개인은 “부활”이 정말 사실인지 물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앞의 두 차례 논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셨고, 싸움을 걸어온 대상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입을 닫았고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소수 정예 멤버, 사두개인이 예수님 앞에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부활” 문제로 논쟁을 벌일까요? 예수님은 또 어떻게 그 논쟁을 종결지으실까요? 함께 살펴봅시다.

1.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1~33)

27절에 보면 사두개인이 등장합니다. 누가가 그들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잘 들어 보십시오.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이들이 와서

여러분, 이 표현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사두개인이 누구인지 알면 정말 이상한 표현이란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을 때부터(이 논쟁이 일어나기 약 500년전)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제사장으로 섬겨왔던 사람들입니다. 제사장 사독의 후손들로(아론의 아들 엘르아살까지 올라가는 족보), 오랜 세월 제사장 일을 독점 하면서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지도하는 제사장의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를 장악하는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유대 전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극소수였지만 대단히 부유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 종교 지도자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제사장이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부활이 없다고 믿는 목사,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이고 죽으면 심판도 부활도 없다고 가르치는 목사, “사이비 목사”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사두개인이 바로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 심판도 믿지 않았습니다. 천사나 영혼의 존재도 부정했고, 하나님은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는 방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모세오경만 받아들였습니다. 39권의 책 가운데 5개만(창세기~신명기)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유대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할 사두개인이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불신하고 성경 자체도 선별하여 받아들였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배계급으로서 로마 정부에 협력하여 자기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지위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현실의 유익을 최대한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심각하게 세속화되었고 그들이 마주한 현실만이 참이고 진리이며 그 현실과 차이를 보이는 성경의 가르침은 무시했습니다.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 거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세기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사두개인들은 부유한 자의 신뢰만 받을 뿐 백성은 그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조차 그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만 현실과 믿음의 차이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현실과 믿음의 차이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하지만, “정말 믿는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까?”라고 말하면 머뭇거리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다를 때, 우리는 우리 눈을 어디에 맞춰야 할까요? 우리의 믿음을 두는 곳, 바로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진리에 믿음을 두고 그것을 따라야지 항상 변하는 현실을 따라 살 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믿음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는 바른 방식입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현실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현실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실패하여 현실의 손을 들어준다면, 다시 말해 현실과 타협할 경우 우리는 사두개인과 똑같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성도,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천국 백성,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거룩한 백성, 하나님은 내 삶에 상관하지 않는 방관자라고 보는 그리스도인, 돈, 명예, 권력, 신분, 직위 등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는 예수님의 제자…

모순덩어리 아닙니까? 현실과 타협하면, 믿음과 현실의 차이를 만날 때 계속해서 현실의 손을 들어준다면,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믿음을 부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지, 실제로는 부활도, 심판도, 하나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세속화되면서 마음속 불신이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그러면 사두개인처럼 대놓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활이란 없다!(사실 하나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확신하고 예수님께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신명기 25장 5~10절에 기록된 “수혼제도” 혹은 “레비레이트혼”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 율법을 주셨는데, 사두개인이 설명한대로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 없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에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 아버지에게 속한 재물과 땅을 물려받게 하여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후손 누구도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법이 실제로 지켜졌다고 보긴 어렵지만, 사두개인이 이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은 부활이 얼마나 황당하고 믿기 힘든 것인지 확실히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흘러갑니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잠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물론 일어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마태복음에 따르면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다”고 마치 사두개인의 측근 중 일어난 일처럼 말했지만(마 22:25), 정말 말도 안 되는 예시 아닙니까?

이 정도면 이 여자가 살인범이 아닌지 조사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당시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은 남편을 세 번 연속 잃은 경우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것으로 추정하기 충분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랍비 하 나시는 두 번만 남편을 잃어도 의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곱 번이면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사두개인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예시를 든 이유는 다음의 이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정말 부활이 있다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일이 펼쳐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 여자와 일곱 남편이 부활하여 만나면 누가 진짜 그녀의 남편인것인가? 이 여자는 일곱 중 누구의 아내로 봐야 하느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황당하고 어이없는 문제가 생기는데도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현실 속에서 현실을 따르기 위해 믿음을 버리는 사람은 모두 사두개인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이 있는데 그것을 믿는 것이 합당하냐? 이런 것이 우리가 마주한 사실인데, 여기서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 우리가 믿는 진리보다 현실이 말하는 것이 더 참이라는 것입니다. 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현실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근거인 말씀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첫 아담에게 한 말이면서 동시에 둘째 아담 예수님께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그 시험을 세 번이나 말씀과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하실까요?

2.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는 예수님(34~38)

1) “너희가 오해하였다”(34~36)

먼저 예수님은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동일한 논쟁을 기록한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막 12:24)

그들은 사실 부활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이 부활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부활 후 우리 삶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부활 후에 우리에게 어떤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실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부활한 후에도 결혼하고 부부로 살아가고 그럴 것이라는 착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각이 잘못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예수님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에 따라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아이도 낳지만, 저 세상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저 세상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천사들처럼 완전히 새롭게 된 존재로(먹지 않고, 죽지 않고,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살아가는 존재인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활 후 저 세상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우리는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며, 늙지 않고 썩지 않고 고통받지 않고 슬픔과 죽음, 불행, 죄가 전혀 없는 상태로 영원히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 속에서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부부간에 금실이 좋은 분들은 어쩌면 속상해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큰 기쁨을 누리는 그날에 우리는 그 아쉬움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부활의 삶이 이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고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사두개인은 이것을 단단히 오해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생각해낸 “부활”을 가정하고 그런 부활은 없다고 따진 것입니다.

2) “성경은 부활을 증명한다”(37~38)

둘째로 예수님은 성경이 부활을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의 글을 사용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부활을 입증하는 많은 구절이 있지만(욥 19:25~27; 시 16:9~11; 사 26:19; 단 12:2), 그들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말씀, 모세 오경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마 22:32; 막 12:26). 말씀에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으냐? 너희가 이것을 본 적이 없느냐? 이렇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당연히 알아야 했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출애굽기 3장 6절은 떨기나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만나셨을 때,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당시 유대인이 읽었던 성경은 70인 역(LXX)으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었는데, 여기서 출애굽기 3장 6절은 현재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과거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었다”라고 소개하지 않으시고 현재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모세에게 자기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가리켜 “참 좋은 할아버지셨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 살아계신다면 “참 좋은 할아버지시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기를 드러내실 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언급하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장면이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현재 살아있다는 것으로,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부활하여 살아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시는지, 동사 하나의 시제까지 분명하고 중요하게 보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희는 이 성경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부활을 확증하고 있지 않으냐? 마가는 이렇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덧붙입니다.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막 12:27).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었다면,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했다면, 그들은 오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성경도 그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무궁한 능력도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삶 가운데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두고 있던 성경에서 멀어지고 그 성경이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까지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현실과 타협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믿음이 부딪힐 때, 자신이 생각하는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역시 성경은 현실과 맞지 않아’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고 성경을 크게 오해해서 생긴 문제라는 것을 모릅니다. 

막연히 성경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핵심은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성경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삶을 1mm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데이비드 고든이 지적한 대로 성경을 읽더라도 자기의 기존 생각을 확인하는 수준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도 잘못된 것을 전혀 고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의 생각을 교정하고 바른 교훈으로 예리하게 우리 마음을 다듬어가며 우리 인생길의 등불과 빛으로 우리 삶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게 되어 되어 있는데, 그 성경을 멀리하고 알고 있다고 착각한 상태로 성경을 대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삶 속에 발휘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니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현실과 타협하고 세속화된 삶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두개인처럼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심판도 부활도 없는 것처럼,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은 개인적, 국가적 재난을 만났을 때, 극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에게 실망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어? 그리고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합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 방관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합니다. 딱히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지만, 실질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또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쉽게 진리를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불법다운로드나 포르노그래피를 즐기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것을 분명히 멀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현실의 유익, 만족, 즐거움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이긴 것입니다. 

비슷한 문제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이를 금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서로 잘 만나서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말씀을 무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하고 육체의 정욕이 강해서 실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현실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진리를 무시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그 삶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현실 타협 이야기는 조금도 없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권리를 모두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 5:24).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1). 현실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 그래서 현실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기보다 기록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부활에 참여하는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도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을까요?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여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현실을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고 무섭고 불만족스럽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사람, 그 사람이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말씀 예수님이 선포하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3. 반응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40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성경을 필사하고 율법을 연구했던 학자들,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참되게 대답하셨다고 인정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님께 질문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 대제사장, 바리새인, 헤롯 당원 모든 그룹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정확하고 분명한 이해와 설명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명에 따라 부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수용했을까요? 자신들이 크게 오해한 것을 성경의 진리로 교정했을까요? 그들이 “옳다”고 인정한 그 말씀에 순종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참 안타깝고도 슬픈 사실입니다. 죄인은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이 싫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의 특징입니다. 알면서도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고,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롬 1:18).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 이미 판결은 내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은 영혼이 있다면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기 전에 생명의 부활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거부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들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미 참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 중에 영적으로 병든 분들이 이 가운데 계실지 모릅니다. 오늘 나온 사두개인처럼 성경보다는 현실이 더 피부에 와 닿고 말씀의 약속과 진리보다는 현실에 맞춰 살아가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 이제 그 패턴을 깨고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실까?” 시험하는 사탄의 목소리에 이제 그만 귀를 막으십시오. 어떻게 하면 거짓을 말하여 이 세상 삶을 망쳐놓고 저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할까 고민하는 사탄을 청종하지 마십시오.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사탄의 먹잇감이 되지 마십시오. 다윗처럼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찬송과 기도와 순종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미음과 현실이 다를 때 우리가 해야 할 합당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