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명절 끝 날에

본문 : 요한복음 7장 37~39절

설교자 : 이병권

 

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말씀의 제목처럼 오늘은 명절의 끝 날입니다. 명절을 보내고 벌써 그 끝 날이 되었습니다. 어떠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추석을 보내고 나니까 몸도 마음도 재충전이 되셨습니까? ‘이번 추석도 정말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이었어!’ 마음에 기쁨이 가득 남아있으십니까?

이제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회사에 가야 되고, 학교에 가야 되고, 일터로 돌아가야 합니다. 반복되는 우리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쩜 이렇게 시간은 금방 지나가는지 아쉬움이 남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명절은 명절이 오기 전에, 명절을 앞두고 명절을 기다릴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막상 명절이 되면 어떻습니까? 자매님들은 음식 하느라 고생 많으셨죠?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오죽하면 명절 후에 이혼율이 증가한다는 뉴스가 나오겠습니까? 청년들은 청년들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취업이나 결혼에 대한 부담으로 친척들 만나는 게 꺼려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절에는 왜 그렇게 피곤한지 가만히 있어도 잠이 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은 많고 멀리 고향에 다녀오신 분들은 더 피곤합니다.

그래서 명절 끝 날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명절을 보내면서 쌓인 피로와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남은 아쉬움과 허전함입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을 앞두고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러한 명절의 끝 날입니다. 그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명절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비타500이 필요할까요? 그런 것도 방법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절 끝 날에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명절 끝 날에 선포하신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허전함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으로 힘을 얻고 명절 후유증을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명절 끝 날에 어떤 말씀을 선포하셨는지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초막절이었습니다. 초막절이 본문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당시 초막절에 했던 예식을 알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제사장들은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붓는 예식을 행했습니다. 이 예식을 통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물을 공급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풍족한 비를 내려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물을 붓는 예식을 일곱 번 연속으로 행했습니다. 모든 예식이 끝나고 난 다음 날에는 온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명절을 마무리하였습니다(레 23:34~36). 예수님은 아마도 이 날에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신 것 같습니다.

이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여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람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생명의 근원되는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갈증을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합니다. 마음의 공허함,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족을 얻기 위해 수고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이 목마름을 채우려고 하지만 더 큰 갈증을 일으키며 만족함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로,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갈증을 채우려 하지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는 터진 웅덩이에 물을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불쌍한 인생들을 향해 예수님은 유일한 길을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4장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4:14) 그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많은 백성들을 향해 살아있는 물, 생수의 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8)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니 이게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예전에 동화책에서 큰 도깨비가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는데 도깨비의 배꼽에서 물이 막 쏟아져 나와서 정원에 물을 주는 겁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러면 어떨까요? 비가 오지 않아도 걱정이 없겠죠? 수도꼭지를 트는 것처럼 배꼽을 누르면 생수가 막 흘러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라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배로 번역된 단어는 사람의 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통 심장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물이 쏟아나고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갈증을 느끼지 않고 영원히 샘솟는 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갈증은 계속됩니다. 물을 잔뜩 마신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을 마셔도 시간이 지나면 또 물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물을 마셔야 하고 계속해서 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와서 자신이 주는 물을 먹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가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밖에서 안으로 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속에서부터 가득 채워져서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갈증 때문에 이리 기웃거리고 저리 기웃거리고, 이것으로 잠깐 즐거워했다가 저것으로 잠깐 만족을 얻었다가 또 다시 허무함을 느끼고 또 다른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부터 물이 나오는데 갈증이 해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의 초청에 응하면 차원이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 속에서 물이 솟아나는 물의 근원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초청에 응하셨습니까?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셨습니까?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물을 먹음으로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셨습니까? 참 기쁨과 만족, 평안과 안식을 얻으셨습니까?

그러면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을 해볼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마음의 허전함을 느낀 적이 없으십니까? 오늘처럼 명절의 끝 날이 되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 난 괜찮아! 문제없어! 이렇게 말씀할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외로움이나 답답함을 느낄 때가 없으십니까?

우리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지만 때로 부족함을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 마음이 불안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가 느끼는 목마름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완벽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하지만’이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지만’이라는 말을 솔직하게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과의 교제에서 ‘하지만’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 믿음이 부족한 것 같고, 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 같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구원 안 받은 사람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하고 문제없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 같습니다. 잘못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아!’ 이런 대답을 들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공허함이나 갈증이 없는 걸까요?

물론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주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가득할 때, 정말 그 순간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을 때, 주님의 은혜로 내 마음이 벅차올라서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누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고,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주님과 함께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고,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충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지속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뭐가 문제일까요? 구원 받은 사람이 왜 마음의 어려움을 느낄까요? 구원받으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 구원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이런 문제는 나만 겪는 일은 아닙니다. 나만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문제를 나만 겪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도 마음의 허전함을 느낄 수 있고 부족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으로 충만하면 좋겠지만, 우리가 그런 삶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느끼고 부족함을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정상이고 계속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느낌에서, 그런 마음의 어려움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은 더 능력이 있고 더 기쁨이 넘치고 더 생명이 넘치는 충만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그런 부족함 없는 충만함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의 은혜가 느껴지는 그런 풍성한 삶을 살고 싶은데 그렇게 잘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 내 영혼의 갈증, 어떤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목마름을 예수님이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성령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성령님, 당연히 알고 있지요! 어떻게 성령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거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알고 살아갑니다. 그분을 구하거나 그분의 함께 하심을 바라거나 그분의 역사하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런 것 같습니다. 여러분, 지구가 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돌고 있다고 말도 안 돼! 전혀 느껴지지 않잖아!’ 라고 하실 분은 없으십니다. 우리는 다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라는 구분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메말라 있는 삶, 성령의 역사하심과 능력을 기대하지 않는 삶, 내 삶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내 생각과 계획대로 하다가 좀 막히면 그 때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가 왜 성령님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볼 수 있는 성령님에 대한 태도는 어쩌면 성경적이지 않은 성령운동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습니다. 성령대부흥회, 성령집회, 성령사역 이런 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오해하고 극단적으로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사이비 종교처럼 능력을 추구하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잘못된 성령운동을 반대하면서 어쩌면 내 삶에 마땅히 구해야 할 성령의 능력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생각의 틀에 성령님을 넣어두고 삽니다. 내 삶에서 성령님의 빈자리를 느끼면서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것으로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옷에 떼가 묻어서 더러워졌을 때 어떻게 합니까? 옷을 버려야 합니까? 옷을 깨끗하게 빨고 나서 입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성령님을 오해하고 잘못 이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님을 멀리하고 그분의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릴 때, 박수 치며 방방 뛰면서 성령의 불을 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며 쇼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처럼 주님을 부르며 의미 없이 주여! 주여!를 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와 늘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시며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그 뜻대로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분으로 만족하고 충만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삶을 살아 낼 수 있습니다. 그냥 낮은 수준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보다 더 주님 안에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그분을 의식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살면서 내가 느끼는 여러 가지 갈증은 생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곳에서 생수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갈증을 채워줄 생수는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진짜 문제는 내가 그만큼 성령님을 원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우리는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성령님에게 사로잡힌바 되어서 성령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성령님을 사모하십니까?

한 주석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충만해진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만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성령 충만을 원하고 기도 제목으로 성령 충만을 이야기하지만 정말 그분으로 충만해지기 위한 수고와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성령님이 충만히 역사하셔서 내 삶에 큰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출시된 최신 스마트 폰을 원합니다. 사진도 멋지게 잘 나오고 성능도 좋아서 뭐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폰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폰을 위해 돈을 지불할 만큼 그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쓰던 폰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할 만큼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따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거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그분처럼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성령님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들, 그분의 충만함과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 외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고난이 무엇인지 알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으로 기뻐했고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주님 한 분으로 만족했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연약하고 힘없고 부족한 삶을 삽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힘들어하고 내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성령님을 원하는 마음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된다면, 만약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된다면, 만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된다면,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갈증을 느끼며 세상에서 허덕이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세상과 싸워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충만함으로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으로 기쁨과 평안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보십시오. 그 원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 살피시고 주님을 먼저 구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내가 원하고 있는지 나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다른 것으로 그 갈증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그 갈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든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든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우리는 주님 외에 다른 것으로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간절히 주님을 원하고 바라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큰 것으로, 더 가치 있는 귀한 것으로 여러분의 삶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D. L. 무디는 말씀을 전하면서 빈 유리잔에 물을 채운 다음에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이 유리잔에 어떻게 내가 우유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물로 가득 찬 유리잔에 어떻게 우유를 채울 수 있을까요? 무디는 유리잔의 물을 다른 그릇에 비우고 그러고 나서 그 잔에 우유를 부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님을 채우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